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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이슈 전두환과 노태우

[르포]"추모도 못 하나" vs "용납 안 돼" 전두환 거리 분향소, 철거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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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90세 일기로 23일 사망

보수단체 "대통령으로 공 있다"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 분향소 설치했다가 철거 당해

시민들 "분향소는 차릴 수 있지 않나" vs "우리 세대서는 용서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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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보수단체가 설치한 전두환씨 분향소가 철거됐다.사진=윤슬기 기자 seul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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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윤슬기 기자] "전직 대통령인데 분향소는 차릴 수 있지 않나.", "광주 시민 학살한 전두환, 우리 세대에서는 용서 안 돼."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가 지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90세.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씨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는 등 역사적 과오를 저질렀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사과는커녕 모르쇠로 일관해 국민 공분을 일으키기도 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등장한 그는 전직 대통령 고(故) 노태우씨 등 육사 11기 중심의 사조직 '하나회'와 함께 신군부를 형성하고 당시 군 수뇌부, 중앙청, 국방부 등을 하나하나 장악하면서 1979년 12월12일 반란에 성공한다.

당시 시민들은 독재자 박 전 대통령이 죽자 민주화가 실현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득 차있었다. 1980년 3월 개강 이후 신군부의 군사반란을 알게 된 전국의 대학생 10만여명은 1980년 5월1일부터 서울역 광장에 모여 민주화를 외쳤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다. 전씨는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자 시국 수습을 명분 삼아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광주에서도 역시 전씨의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시위를 일으켰다. 하지만 신군부는 계엄군과 공수특전여단을 투입해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했고, 1950년 한국전쟁 이후 가장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 5·18 광주 학살은 전씨의 정치 역사에 있어 지워지지 않는 최대 오점으로 남았다.

이렇게 '역사의 죄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전 씨 사망 관련 일부 보수단체에서는 대통령으로서 전씨의 공을 인정해야 한다며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 전씨의 추모 분향소를 기습 설치하기도 했다. 하지만 종로구청이 도로법 위반 소지가 있다며 약 2시간만에 분향소를 철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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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 철거된 후 남은 전두환 전 대통령 영정 사진이 놓여있다. 보수 성향 단체인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국본)는 이날 심야 시간대 전 전 대통령 추모 분향소를 설치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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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천막 앞에서 만난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국본) 관계자는 불만을 토로했다. 국본 관계자는 "민주주의 국가에 전두환 대통령을 지지할 자유가 있는 것 아니냐"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좌측으로 기울어진 일방통행을 하고 있는 것 같다"라며 "전두환 대통령이 군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정황도 있고 군대가 나서야하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누군가는 나서서 질서를 바로 잡아야했고, 그게 육사 출신 엘리트 전두환이었다"라고 주장했다.

국본 관계자는 또 "행정절차 지키지 않고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반대진영을 고립하고, 짓밟는 문재인 정부의 행태는 잘못됐다"라고 덧붙였다.

분향소 근처를 지나던 60대 여성 시민 A씨도 분향소까지 못 차리게 하는 것은 하는 과도한 조치라고 지적했다. A씨는 "남편이 30년 넘게 일하다 퇴역한 군인이다. 남편 말도 들어보고 어제 티비도 보니까 전두환도 억울한 부분이 있을 것 같다"라며 "아직까지 전두환이 명령했다 명확히 밝혀진 것도 없는 상황이다. 군 지휘관으로서 반란이 일어나면 출동해서 막아야하는 거고, 이북에서 내려왔다는 얘기도 있었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발포 명령과 관련해) 통제를 못 한 것은 잘못이지만, 전두환이 수십년 동안 일관되게 (학살의 시초가 된 발포 명령을) 안 했다라고 주장하는 것 보면 정말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전두환도 억울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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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단체가 분향소 철거 후 남은 천막까지 치우는 모습./사진=윤슬기 기자 seul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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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철거된 분향소 앞에서 강력하게 전씨를 규탄하는 시민도 있었다. 자신을 삼청교육대 피해자라고 밝힌 김모(59)씨는 "이제야 죽었냐"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김씨는 "내가 80년대에 동네에서 작게 싸움을 했는데, '너 삼청교육대 갈래, 징역 살래' 그러더니 삼청교육대로 끌고 갔다. 원래 4주 순화교육 훈련을 받았어야 했는데 전두환이 (대통령) 취임한다고 특사로 2주만에 풀려났다"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삼청교육대 가니 새벽 3시에 팬티 바람으로 연병장에 집합시키고, 줘패고, 개돼지 취급을 하더라"라며 "전두환 사망했다는 말 듣고는 신나서 축하주를 마셨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또 "나야 무사히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다행이지만 삼청교육대 끌려갔다 오신 우리 아버지는 허벅지에 구멍이 뚫려 있더라. 썩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며 "죽을 때까지 사과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용서는 무슨 용서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삼청교육대는 전씨의 군부독재 시기를 대표하는 '그늘'이자 무고한 시민들이 인권 침해를 당했던 곳으로,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이 발령된 직후 사회정화정책의 일환으로 군부대 내에 설치됐다. 당시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던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길거리에 침을 뱉었다거나 머리를 길렀다는 등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잡혀가 변을 당했다.

보신각 근처에서 자영업을 하는 B씨도 전씨가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지탄했다. B씨는 "전두환이 막 정권을 잡았을 때였나. 그때 이 동네는 최루탄 굴러다는 게 일상이었다"라며 "서울도 그 정도였는데 광주는 어땠겠나. 후대는 어떨지 몰라도 우리 세대는 전두환 용서 못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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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 본부장이 1979년 11월 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전모를 육군회관에서 발표하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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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치권에서 전씨의 빈소를 찾는 발길은 뜸하다. 전씨에게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책임이 있다고 보는 여론이 강한 만큼 이를 의식한 행보로 보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앞서 조문을 가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후보는 23일 오전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전두환씨는 명백하게 확인된 것처럼 내란, 학살 사건의 주범"이라며 "최하 수백명의 사람을 살상했던, 자신의 사적 욕망을 위해 국가권력을 찬탈했던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에 대해 마지막 순간까지도 국민에게 반성하고 사과하지 않았다"라고 비판하며 조문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도 당초 조문 여부에 대해서 "가야 하지 않겠나"라고 밝혔다가 이후 조문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전두환 전 대통령 상가에 따로 조문할 계획이 없다"라면서 "당을 대표해서 조화는 보내도록 하겠다"라고 했다.

윤슬기 기자 seul97@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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