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관계에 불어온 훈풍은 1년도 가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북한은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김정은 총비서의 백두산 답사를 시작으로 ‘자력갱생’과 ‘자위력 강화’를 내세우고 있다. 반면, ‘3년 전 봄날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김여정의 담화문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모멘텀을 다시 살리기 위한 외교적 행보를 지속해오고 있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남북관계 부침은 2018년만의 일이 아니다.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으로 시작된 행진은 가다 서다 했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남북관계는 왜 고질적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인류가 통치 외 영역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뤄왔고 지구 대기권을 벗어나 우주로까지 그 영향력을 확장해왔지만, 통치술만은 3천년 역사동안 유독 별 진전 없이 정체돼 왔다는 바버라 터치먼의 주장을 참고해볼만하다.
터치먼은 ‘바보들의 행진’에서 역사에서 이해가지 않은 대참사나 패전, 국가소멸의 원인을 4 종류의 악정(惡政)에서 찾고 있다. 첫 번째 유형인 폭정 또는 압정, 두 번째 유형인 지나친 야심, 세 번째 유형인 무능 또는 타락, 네 번째 유형인 독선 또는 아집 그리고 이러한 유형들의 몇 가지 결합은 그 출발점이 이성적인 것이든 아니든 최악의 결과로 이어졌다.
6·25 전쟁 이후 남북관계 역사를 돌이켜볼 때, 지난 1월 8차 당대회에서 김 총비서가 남북관계와 관련해 한 발언도 한반도 평화에 대한 ‘독선과 아집’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전처럼 일방적으로 선의를 보여줄 필요도 없고, 남측이 화답하는 만큼, 남북 합의를 이행하기 위해 움직이는만큼 상대해줘야 한다"고 했다. 이는 마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작동되지 않는 것도 남한 탓이고, 평화 프로세스의 모멘텀을 유지하기 위한 기준점도 철저히 북한 중심의 관점으로 끌고 가야 한다는 ‘지나친 야심’을 보여준다.
문제는 북 측의 이런 주장에 한미연합 훈련 연기 등 우리 외교안보 정책을 조정해야 한다는 정치인과 전문가들의 제언인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제언은 마치 목마를 아테나 신전으로 끌고 들어온 트로이의 장로 디모이테스의 ‘무능함’과 닮았다. 반면 트로이의
또 다른 장로 카푸스는 아테나가 오랫동안 그리스군을 편들어 온 점을 볼 때, 이 목마는 음모가 있다며 즉각 태우거나 도끼로 부숴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를 봐야 한다고 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북한의 말을 순수하게 믿고자 하는 디모이테스와 같은 정책 제언보다는 북 측의 의도를 의심해보고 점검하는 카푸스 같은 제언이 필요하다. 또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추진을 위한 모멘텀 조성이 아무리 목적과 방향성 측면에서 이성적이고 바람직하다고 할지라도, 지금의 정책 추진 방향이 혹시 독선은 아닌지 역사적 경험에 비춘 점검이 필요하다. 첫째 후세의 눈으로 볼 때도 지금의 정책적 노력과 조치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이익이 되는가. 둘째 지금 선택한 정책이 실행 가능한 것 중에서 선택된 것인가. 셋째 이 정책이 통치자와 분리될 만큼 정책적 지속성을 가질 수 있는가다. 이제는 남북관계가 독선과 아집이 아닌 상식과 용기에 기초해서 나아가기를 기대해본다.
이호령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이지은 기자 leez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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