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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이슈 [연재] 연합뉴스 '특파원 시선'

[특파원 시선] 냉혹한 국제관계…왜 누구도 아르메니아를 돕지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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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실리 모두 아제르바이잔에 밀려

서방 '동정표' 얻었지만 적극적 지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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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 국방부가 공개한 포병 사격 영상 캡처
[AFP=연합뉴스]



(이스탄불=연합뉴스) 김승욱 특파원 = 남캅카스의 '숙적'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분쟁지역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놓고 다시 한번 맞붙었다.

지난 9월 27일부터 6주 넘게 이어진 양국의 교전은 아르메니아의 '참패'로 끝났다.

아제르바이잔은 미승인국 아르차흐 공화국(옛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의 제2 도시인 슈샤를 비롯한 주요 지역을 차지했으며, 언제든 아르차흐의 수도 스테파나케르트의 생명줄을 끊을 수 있게 됐다.

사실 아르메니아의 국력은 아제르바이잔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아르메니아의 인구가 300만 명에 불과한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1천만 명에 달한다. 아제르바이잔의 국내총생산(GDP)은 472억 달러(약 53조원)에 달하지만, 아르메니아의 GDP는 134억 달러(약 15조원)에 그친다.

국력에서 열세인 아르메니아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나선 국가는 한 곳도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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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 군을 향해 포격하는 아르메니아 병사
[아르메니아 국방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국제법상 아제르바이잔 영토…명분 싸움에서 졌다

아르메니아는 명분 싸움에서부터 아제르바이잔에 밀렸다.

양측의 전장이 된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옛 소련 시절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약 80%를 차지한 아제르바이잔 영토였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계는 독립공화국을 세운 뒤 아르메니아와 통합하겠다고 선포했으나, 아제르바이잔이 이를 거부하면서 양측이 1992∼1994년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이후 나고르노-카라바흐는 국제법적으론 아제르바이잔 영토지만 아르메니아가 실효 지배를 하는 분쟁지역으로 남았으며,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은 2017년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명칭을 바꿨다.

사실상 아르메니아의 보호국인 아르차흐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실효 지배하는 상황이 30년 가까이 이어졌지만 국제법상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 영토였다.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 본토를 공격했다면 사정이 달랐겠지만, 엄연히 아제르바이잔 영토 내에서 벌어진 교전이다 보니 외국이 아르메니아를 지지하더라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기에는 명분이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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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간 교전으로 파손된 가잔체토츠 대성당
[로이터=연합뉴스]



◇ '동정표'만으로는 부족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가 국제법상 아제르바이잔 영토임은 사실이나 아르메니아에게도 국제 여론을 자국에 유리하게 돌릴 재료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아르메니아인은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이 붕괴할 당시 대학살의 비극을 겪은 민족이다.

터키는 아르메니아 학살을 인정하지 않지만, 국제 학계는 1915∼1917년 오스만 제국 내에서 아르메니아인 약 150만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산한다.

미국 상원도 지난해 아르메니아 학살을 인정하고 희생자를 추념하는 내용을 담은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아르메니아인의 희생을 인정한다.

공교롭게도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와 같은 튀르크 민족이 세운 국가다. 양국 국민은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서로를 형제국으로 인식한다.

대부분의 서방 국가와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는 기독교 국가다. 이슬람 세력에 점령당했음에도 오랜 세월 기독교 신앙을 지켜왔다는 점에서 아르메니아를 보는 유럽 국가의 시선에는 일종의 '연민'이 깔려있다.

또 아르메니아는 2018년 세르지 사르키샨 전 대통령의 권력 연장 시도에 반발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무혈 시민혁명'으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적어도 서방 국가들에게는 같은 신앙을 공유하고 민주주의가 정착한 데다 대학살의 피해자이기까지 한 아르메니아에 '동정표'를 줄 여지가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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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지역 나고르노-카라바흐에 주둔하게 된 러시아 평화유지군
[AFP=연합뉴스]



◇ 원유·천연가스의 힘…결국 '실리'가 우선

그런데도 아르메니아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국가는 한 곳도 없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 대부분은 양측의 자제와 휴전을 촉구하는 원론적 수준의 입장을 표명하는 데 그쳤다.

그나마 동지중해 천연자원 개발 문제와 시리아·리비아 내전 등에서 터키와 갈등을 빚은 프랑스 정도가 아르메니아를 돕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으나 마땅히 지원할 방법이 없었다.

아르메니아가 바다와 접하지 못한 내륙국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아르메니아에 병력이나 물자를 보내려 해도 타국의 영토를 지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아르메니아와 국경을 맞댄 국가 중 아르메니아에 항구를 열어줄 수 있는 국가는 조지아가 유일했지만, 조지아는 중립을 표방하며 아르메니아로 가는 군수 물자의 반입을 막아버렸다.

조지아는 아르메니아와 함께 남캅카스에서 '유이한' 기독교 국가다. 한때 바그라티온 왕조의 통치 아래 같은 나라였던 적도 있다.

그러나 조지아는 끝까지 아르메니아로 가는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명분은 '중립'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아제르바이잔의 막대한 원유와 천연가스를 의식한 것이라는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아제르바이잔은 '불의 나라'로 불릴 정도로 원유가 풍부한 국가이며, 바쿠는 소련 시절부터 유명한 유전지대였다.

조지아는 아제르바이잔 바쿠 유전의 천연가스를 유럽으로 연결하는 파이프가 지나는 곳으로 아제르바이잔 덕에 매년 수억 달러에 달하는 이득을 보고 있다.

반면 캅카스 산맥의 고원지대에 자리 잡은 아르메니아는 변변한 천연자원이 없을 뿐 아니라 국토 대부분이 산지라 농사에도 적합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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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역시 이슬람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했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에 막대한 원유를 수출하기 때문이다.

최대 적성국인 이란과 접한 아제르바이잔과 우호 관계를 유지할 경우 이란을 견제하는 카드가 될 수 있다는 이유도 있다.

더구나 아제르바이잔은 이스라엘의 주요 무기 수출국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번 교전에서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에서 구매한 무인기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번 교전에서 아르메니아가 끝까지 기대한 국가는 러시아였다. 러시아와 아르메니아는 구소련권 국가의 군사 동맹체인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회원국이기도 하다.

실제로 러시아는 지난 2016년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대규모 교전이 발생했을 당시 적극적으로 아르메니아를 지지해 조기 휴전을 끌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제르바이잔의 공격에 러시아 헬기가 격추돼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일이 벌어졌음에도 러시아는 끝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러시아의 소극적인 태도를 두고 2018년 민주혁명이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친 러시아 성향의 사르키샨 전 대통령과 달리 파시냔 정부는 적극적으로 친서방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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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집을 불태우는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 주민
[로이터=연합뉴스]



◇ 냉혹한 국제관계…우리 일이 될 수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 교전은 작지만 새로운 전쟁이었다. 주력 기갑 부대가 무인기에 심각한 타격을 입는가 하면 SNS가 심리전의 격전장으로 떠오르는 등 전쟁의 새로운 양상이 부각됐다.

그러나 국방과 외교의 본질은 변치 않았다. 국력이 곧 국방력과 직결됐으며, 냉혹한 국제질서 속에서 어설픈 연민이나 동정은 통하지 않았다. 관련국들은 모두 자국의 이익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했다.

수천년 간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온 한국인에게 아르메니아의 패전은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의 국력은 아르메니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서있지만,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한국을 둘러싼 주변국의 국력은 우리를 앞선다.

북한이라는 위협이 여전한 가운데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갈수록 심화하면서 한국은 언제든 강대국 간 대립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스스로를 지킬 힘을 키우고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현명한 외교가 필요한 시점이다.

kind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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