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제네바의 세계무역기구(WTO) 본부 벽에 이 기구의 로고가 붙어 있다. 제네바 | 로이터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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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28일(현지시간) 세계무역기구(WTO) 차기 사무총장으로 한국의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WTO 사무총장 선거가 미국 대 ‘나머지 세계’의 싸움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최종 후보로 유 본부장을 올린 한국은 자칫 고래 싸움에 낀 처지가 될 판이다.
USTR은 이날 낸 성명에서 “유 본부장은 통상 협상가와 무역정책 입안자로서 25년 간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진정한 통상 전문가”라고 했다. 유 본부장의 ‘현장 경험’을 강조하면서, 나이지리아의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전 재무장관에게는 통상 부문 경험이 적다는 것을 반대 이유로 지목했다.
미국의 반대만 아니면 WTO의 신임 사무총장이자 ‘첫 여성 수장’으로 나이지리아 후보가 결정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이날 스위스 제네바의 WTO 본부에서 열린 대사급 회의에서 최종 라운드 선호도 조사를 한 결과 나이지리아 후보가 우세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WTO는 구체적인 수치를 발표하지 않았으나 BBC 등에 따르면 오콘조이웨알라 전 장관이 102표, 유 본부장이 60표를 얻었다.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이 7월 16일 스위스 제네바의 세계무역기구(WTO)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무총장 후보 출마를 밝히고 있다. 제네바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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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의 사무총장은 후보가 2명으로 좁혀진 마지막 라운드 표결 뒤 두 후보에 대한 회원국들의 반대 여부를 물어, 어느 회원국도 반대하지 않는 후보가 추대되는 ‘컨센서스(합의)’ 방식으로 결정된다. 유 본부장의 표가 적지 않게 나왔더라도, 1위인 나이지리아 후보에 대해 회원국들이 별도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으면 컨센서스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날 회의 뒤 키스 록웰 대변인은 “한 회원국 대표가 응고지에 반대하고 유 장관을 지지했다. 미국 대표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오콘조이웨알라는 미국 시민권을 가진 이중국적자인데도 미국은 한국 후보를 택했다.
외신들은 미국이 나이지리아 후보에 ‘비토’를 했다고 보도했다. WTO는 한국과 나이지리아 측에도 선호도 조사 결과를 통보했다. 사실상 한국에 후보 사퇴를 권유한 것으로 해석된다. 록웰 대변인은 “미국을 비롯한 회원국들과 계속 대화를 하고 있으며, 한국은 유 후보의 사퇴를 거절했다”고 말했다.
미국 측은 나이지리아 후보에게 통상 경험이 없다는 점을 들었으나 ‘미국 우선주의’를 강제하기 위해 중국과 EU가 지지하는 후보를 거부한 것으로 비치고 있다. 나이지리아 후보는 이미 164개 회원국 가운데 EU, 아프리카, 카리브 국가들 대부분의 지지를 확보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은 ‘미국만 믿고’ 버티는 모양새가 됐고, 미국 일방주의의 도구로 이용되는 것처럼 보일 우려가 커졌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WTO가 미국에 불공정한 판결들을 내린다며 번번이 발목을 잡아왔다. WTO에서 무역분쟁에 대해 최종적으로 판정을 내리는 상소기구의 위원 임명을 계속 막아, 지난해 12월부터는 아예 상소기구의 기능이 정지됐다. 중국과 무역전쟁을 벌여온 트럼프 대통령은 올 1월 다보스 포럼에서는 유럽을 맹비난하며 WTO를 “극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정부는 중국이 여전히 WTO 내에서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는 것에도 볼멘 소리를 내왔다.
유럽, 중국, 캐나다, 중남미와 아프리카 국가들은 일제히 미국에 반대하며 뭉치고 있다. EU의 한 회원국 대표는 “미국이 반대하고 싶었다면 좀 더 일찍 의사를 표시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유 본부장을 지지했던 회원국의 대표조차 ‘미국의 반대에 대한 반대’에 가세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했다. 가디언은 호베르투 아제베두 현 사무총장을 비롯해 WTO 25년 역사상 6명의 사무총장 모두 ‘합의’ 형식으로 추대됐다는 점을 지적했다. 미국 때문에 사상 첫 표대결로 가면서 WTO 새 수장 체제 출범에 흠집만 나게 됐다는 뜻이다. 오콘조이웨알라 전 장관이 개도국들을 대표한다는 점, 오랫동안 세계은행에서 다자주의 업무를 해왔다는 점에서도 미국의 반대에 비판이 나오고 있다.
EU는 미국이 WTO 상소기구를 마비시킨 것에 강하게 반발해왔다. 유럽위원회, 유럽의회, EU 집행위는 28일 WTO가 분쟁을 해결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역내 이익을 지키기 위한 조치에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EU는 호주, 캐나다, 중국 등 주요 교역상대국과 WTO 밖에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독자적인 ‘항소 메커니즘’을 만들기로 했다. 또 WTO 패널 판정이 불리하게 나와도 항소할 길이 막혔다며 분쟁 상대국에 무역보복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 때문에 WTO 기능이 마비된 상황에서 미국 트럼프 정부에 대한 각국의 반감을 한국이 함께 뒤집어쓰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구정은 선임기자 ttalgi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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