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막내아들…日 유학파
개·영화 등 관심갖는 분야 깊게 파악하는 성향
고(故) 이건희 회장의 유년 시절 모습./제공=삼성그룹 |
아시아투데이 황의중 기자 = 고(故) 이건희 회장은 선친인 호암(湖巖) 이병철 삼성 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이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3남 5녀 중 일곱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경남 의령 친가로 보내져 할머니 손에서 자라다 1947년 상경해 학교를 다녔다. 1953년 선진국을 배우라는 부친의 엄명으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어린 시절부터 이 회장은 유독 과학탐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평생 즐겨 쓴 휘호가 무한탐구(無限探究)였다. 무슨 물건이든 손에 잡히면 뜯어 보고 해부해봐야 직성이 풀렸다. 기계에 대한 관심도 그때 생겨났다고 한다.
나이 차 나는 형제 속에서 외로움을 많이 느낄 수밖에 없었던 그는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다. 외로움을 타다 보니 개를 길렀다. 개 기르기는 취미가 돼 1979년엔 일본 세계견종종합전시회에 순종 진돗개 한 쌍을 직접 출전시키기도 했다. 순종을 찾느라 150마리까지 키워보기도 했다고 한다.
영화에 심취해 일본 유학 3년간 1200편 이상을 본 걸로 알려져 있다. 일본 막부시대 사무라이 영화가 많았다. 이처럼 그는 관심이 있는 분야에는 깊숙히 파고드는 성격을 지녔다. 이런 탐구심은 훗날 삼성 반도체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고 평가받는다.
유학생활을 마친 뒤에 그는 서울사대부고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와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1966년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재학 중이던 홍라희 여사와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1970년대 이 회장은 미국 실리콘밸리를 누비며 반도체 산업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게 된다. 이때 한국반도체가 그의 레이더에 걸렸다. 조악한 집적회로로 전자시계를 만들던 한국 반도체가 파산 위기에 직면했을 때 ‘삼성이 인수하자’고 건의했으나 호암은 고개를 저었다.
서른둘의 이건희는 순전히 자기 돈으로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했다. 그리고는 실리콘밸리를 50여 차례 드나들며 반도체 기술이전을 받아오려 애썼다. 페어차일드사에는 지분 30%를 내놓는 대신 기술을 받아오기도 했다.
삼성그룹 후계자로서의 본격적인 경영수업은 1978년 8월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시작됐다. 이병철 창업주가 위암 판정을 받고 약 2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창업주는 1977년 니케이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건희가 후계자”라고 공식화했다. 이 회장이 삼성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것은 부회장이 되고도 9년이나 지난 뒤였다.
1987년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해서 취임사를 하는 이건희 회장/제공=삼성그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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