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분단의 평화적 관리능력과 통일 후 사회통합 살펴봐야"
"지역구도 해체되면 의제 중심 정당정치문화 발전할 것"
인터뷰 중인 정범구 주독 한국대사 [베를린=연합뉴스] |
[※ 편집자 주 = 오는 3일이 독일 통일 30주년 기념일입니다. 한반도의 유일한 분단 극복 참고사례인 독일 통일의 과정 및 현재를 통해 한반도의 현실에 맞는 시사점을 지난달 30일부터 3일간 3편의 연재를 통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독일통일 30년]① '서서갈등' 관리 능력, 통일후 사회통합 원동력
[독일통일 30년]② "증오 집단엔 권력안줘"…'마음장벽'도 허물기 진행형
[독일통일 30년]③ 정범구 "서독도 갈등컸지만 실무적 토론…우린 감정적" ←←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정범구 주독일 한국대사는 2선 국회의원 출신의 정치인, TV토론 사회자로도 알려졌지만 독일 마부르크대 정치학 박사이기도 하다.
서독시절과 통일기에 유학생으로 마부르크에서 독일을 경험했고 최근 3년 가까이 외교관으로 베를린에서 독일을 다시 경험했다.
1일(현지시간) 정 대사에게 외교관뿐만 아니라 정치인, 학자로서 독일 통일 30주년을 바라보는 입장을 물었다. 특히 서독이 치열한 내부 갈등 속 동독과의 교류·협력 정책을 이뤄낸 과정과 통일 이후 독일 시민사회의 역량과 관련해 질문을 던졌다.
정 대사는 과거 대동독정책을 놓고 벌어진 서독의 갈등 상황과 관련해 "실무적이고 구체적인 논쟁이 진행됐었다"고 말했다. 이와 비교해 한국의 대북정책을 놓고 벌어지는 갈등에 대해선 "감정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독일 통일의 경험에 비추어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시사점에 대해 분단의 평화적 관리 능력과 통일 후 사회통합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지역구도가 해체되면 의제 중심의 정당정치문화가 발전할 것"이라며 "기후변화, 디지털화, 사회구조 변화 등의 문제가 시민운동 차원을 넘어 정치세력의 의제로 들어와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정 대사와의 일문일답.
-- 대사이기도 하지만, 정치인 출신이자 학자의 입장으로도 물어보겠다. 최근 몇년 간 독일 정치인들, 독일 통일의 산증인들을 많이 만나보며 정리한 입장에 대해서도 듣고 싶다. 한국 사회에서는 최근 옛 동독지역의 이른바 '2등 시민'론에 대해 주목하는 트렌드가 있다. 그런데, 이는 한반도 분단 및 통일과의 연관성보다 다문화 및 다원화, 양극화가 진행되는 사회에서 이를 완화하고 사회통합을 진전시키기 위한 정치·사회학적 연구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현재로선 평화 정착과 교류·협력의 길을 닦는 것에 주력해야 할 상황이고, 통일은 요원해 보인다. 독일 통일 사례에서 한반도 문제와의 연결성, 시사점을 찾기가 쉽지 않은 측면이 있는데.
▲ 최근 작센안할트주와 튀링겐주 총리를 만나 독일 통일 이후의 사회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최근 마부르크대에서 특강을 할 때 했던 이야기이기도 한데, 독일의 통일과 한반도는 시간적 격차가 크고, 주변의 지정학적 특성도 다르다. 독일은 45년간의 분단 경험과 30년간의 통일 경험을 갖고 있는데, 우리는 분단만 75년이고 앞으로 얼마나 분단 상황이 이어질지 예측하기 어렵다.
독일 통일 사례에 비춰 한반도 상황에 대해 두 가지를 중요하게 봐야 한다. 첫째는 분단의 평화적인 관리다. 통일이 언제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우리의 입장에서 서독이 1970년부터 폴란드, 모스크바와 상호협력조약을 맺고 동독과 교류·협력의 기반이 되는 기본조약을 체결해나가며 20년 만에 통일에 이르게 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분단의 평화적 관리는 분단을 인정하되 전쟁의 위협을 제거하고 평화를 확보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분단의 평화적 관리가 가장 중요하지만, 동시적으로 통일 이후의 사회통합도 지금부터 독일의 경험을 살펴보며 준비할 필요성이 있다. 여론조사에서 옛 동독지역 시민의 57%가 '2등 시민'이라고 느끼는데 작센안할트주와 튀링겐주 총리들은 모두 이를 심리적인 것이라고 했다. 수치로 나타나는 동서독 간 경제적 격차는 확연히 줄었다. 동독지역의 물가가 낮은 것을 고려하면 실제 가처분소득에선 더욱 차이가 줄어든다. 그런데 독일의 사회 지도층에 동독 출신이 아직 20%가 안 된다. 이런 요인이 '2등 시민'의 감정을 자극하는데, 내가 만나본 독일 정치인들은 이것 역시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로 본다. 또, 통일 이후 태어난 세대는 '2등 시민'의 감정을 덜 느낀다.
-- 옛 서독지역보다 동독지역에서 입지가 넓은 극우 성향의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지지율이 올해 들어 하락세다. 독일 극우의 부상은 한국에서도 큰 관심사였는데, 이제 관리가 되는 시점인 것 같다. 독일의 지도자들은 극우, 표퓰리즘, 인종주의에 침묵하지 말아달라며 기회가 될 때마다 시민에게 당부한다. 물론 코로나19 확산 사태 속에서 방역 지침을 어긴 극우의 시위가 부각되기도 했지만, AfD의 내홍도 심해지고 전반적으로 극우의 힘이 약해지고 있다. 극우세력에 맞서 선전하는 독일 사회의 힘을 어떻게 보는가.
▲ 막연하게 보면 보수정당 지지자들 가운데 일부가 AfD 지지자로 변신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통계를 살펴보니 동독시절 집권당인 사회주의통일당(SED)의 당원 출신들이 AfD의 지지층으로 합류한 경우가 많다. 극과 극이 통하는 사례이기도 한데, 동독시절 1천700만명의 인구 가운데 300만명이 당원, 군인, 공무원, 경찰이었다. 동독 지배체제의 혜택을 받으며 권위주의를 지탱했던 이들 세력은 동독 체제의 붕괴 후 갈 곳을 잃어버렸다. 강한 질서를 요구하고 외국인을 배척하는 AfD가 그들의 피난처가 된 것이다. 올해 독일 사회의 최대 과제인 코로나19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힘이 빠져가던 기성정당이 실력을 보여준 점이 AfD의 퇴조에 영향을 미쳤다. AfD는 반대, 불만 정당이라 적극적인 사태 해결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반난민정서에 기대며 불만을 흡수하던 방식이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지지자들에게 점점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올해 서독지역이긴 하지만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선거에서도 AfD의 존재감이 없어지지 않았는가. 두고 봐야 할 문제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으로 많은 독일 정치인들이 보고 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후 장벽 위에 올라가 환호하는 동서독 시민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
-- 과거 서독은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대동독 정책을 유지하며 통일을 달성했는데, 이 과정에서 치열한 갈등이 있었다. 물론 사사건건 진영 간 대결 구도가 전개되는 우리나라와는 독일의 정치체제와 시민사회가 다르긴 하다. 그렇지만, 대동독정책을 놓고 헌법소원과 총리 불신임, 탈당 사태 등 극심한 혼란과 갈등을 관리하고 극복해나가면서 신동방정책을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 이런 갈등 관리 능력은 통일 이후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사회통합을 이뤄내는 힘의 원천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신동방정책에 대해 보수파는 동독에 자금이 흘러 들어가면 공산주의 정권의 유지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며 반발했다. 그런데 일반 서독 시민은 동독 시민을 적대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동서독 간에 전쟁이 없어서 서로 증오할 이유가 없고, 분단이 됐어도 65세 이상 동독 시민은 서독에 다녀올 수 있었다. 서독 시민은 사실 돈과 여유만 있으면 동독에 갈 수 있었다. 둘째, 독일에도 냉전시대에 반공문화가 있었지만, 우리처럼 심하지 않았다. 통일 전까지 서독에 공산당이 있었고, 동독으로부터 자금지원을 공공연하게 받았는데도 서독 체제가 공산당을 불법화하지 않았다. 서독에는 보수, 중도, 좌파 등 정당의 이념 스펙트럼이 넓었다. 다양한 토론문화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서독 정치에선 갈등이 컸을 수 있어도 선악은 없었다. 상대적으로 빨간색이냐, 상대적으로 파란색이냐는 차이다. 서독은 신동방정책에 대해서도 돈이 공산당으로 흘러 들어가느냐 등의 실무적인 토론, 논쟁문화를 보였다면, 한국에서의 대북정책에 대한 토론은 감정적이다. 개성공단 같은 경우도 아마도 독일이었다면 '퍼주기'다, '아니다'가 아니라 해외 기업의 개성공단 입주 여부와 같은 실무적이고 구체적인 토론을 진행했을 것이다.
-- 북한인권실태 조사를 놓고 통일부의 민간 위탁 계약 중단 논란이 최근 있었다. 분단기에 서독 정부가 동독에 돈을 주고 정치범을 데려오는 프라이카우프를 놓고 당시 서독 정치권에서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프라이카우프가 당시 실시된 동독에 대한 인권실태조사와 맞물려 동독 내 인권향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다. 정치범이 서독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인권탄압을 자행했다가는 서독의 인권기록소에 기록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인권탄압의 억제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인권기록소는 진보세력이 앞장서서 만들기도 했다.
▲ 인권 자체는 중요하고 타협의 대상이 아니지만, 이 문제를 절대화시키면 토론이 안 된다. 동독 정치범 수감자의 90%는 애초 서독으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었고 이들을 프라이카우프로 데려온 것이다. 프라이카우프는 동서독이 '윈 윈'한 것이다. 우리는 북한에서의 인권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런데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국내 취약자의 인권 문제도 동일한 잣대로 바라보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북한 인권 문제가 현 정부의 대북 화해정책을 반대하기 위해 쓰이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동독의 정치범 수용소의 경우 잠안재우기 정도가 고문의 최고 정도였을 것이다. 동독이 사회주의 국가였지만 북한과는 다르다. 인권기록의 경우 독일은 봉건시대부터 사소한 일도 기록해오는 문화가 발달해왔다. 출발점 자체가 우리와 다르다.
-- 통일 독일은 분단기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주하는 동독 시민에게 총격을 명령한 간부들을 상대로 책임을 물어 장교에서부터 서기장까지 수년 간의 징역형을 받도록 했다. 일부 독일 통일 연구자는 직접적인 비교 대상은 아니지만, 연평도 공무원 피살 사건을 보고선 이런 사건에 대한 기록이 철저히 이뤄진다면 평소 북측의 반인권 행위를 제어하는 효과를 조금이라도 낳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한다.
▲ 북한이 그런 정도의 인권, 시민, 역사의식을 갖고 있을지 의심스럽다. 시민사회의 소양 차이도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인권기록에 대한 두려움은 후세의 평가를 두려워해야 가능한 이야기인데 북한이 과연 그런 사회인지는 의문이 든다. 동독의 경우도 과연 비밀경찰이 동독의 체제 붕괴까지 염두에 두고 인권 문제를 다뤘을 것 같지 않다.
1946년 2차세계대전 폐전 후 파괴된 독일제국 의회-72년 후인 2018년 관광객이 붐비는 독일연방 의회 [연합뉴스 자료사진] |
-- 한국과 독일에서 학계, 언론계, 정계, 외교계를 두루 경험했는데, 서독의 서서갈등과 비견되는 한국 남남갈등의 극복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 참 어려운 과제다. 근래 투표 성향으로 보면 조금 개선되는 것 같은 희망도 생긴다. 제가 정치학자로서 꽤 오랫동안 한국 정치구도에서 진보세력이 얻을 수 있는 총량의 벽을 33%라고 봤다. 역대 모든 선거에서 그랬는데, 민주당을 진보정당으로 표현하면 최근 그 벽을 넘었다. 과거 박정희 정권이 지역주의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뒤 영남정권은 장기간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사회를 지배했는데 이것이 조금씩 무너지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이 더 진행돼 지역구도가 해체되면 의제 중심의 정당정치 문화가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세력이 조금씩 발언권을 찾아가는 자유민주주의시대로 가야 한다. 기후변화, 디지털화, 사회구조변화 등의 문제가 시민운동 차원을 넘어 정치세력의 의제로 들어와야 한다.
-- 유학생 시절, 대사로서 서독과 통일 독일의 시민사회를 눈여겨봤을 텐데.
▲ 동독과 북한을 비교할 때 무리가 많은 이유로, 동독 사회는 사회주의 국가지만 법치가 있었다. 복수정당이 허용됐다. 기독민주당 당원은 공무원이나 경찰이 될 수 없는 불이익도 있었지만, 기본적인 집회·결사의 자유는 있었다. 동독 사회는 과거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부르주아 사회를 경험했다. 그 문화가 남아있었다. 이와 달리 한반도에선 봉건왕조가 무너진 뒤 식민통치의 시기를 겪은 데 이어 북쪽에는 전체주의 지배체제가 들어섰다. 아직 북한 주민이 민주적 훈련의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다. 남북 간에 평화적 공존 기간 없이 갑자기 통일되면 여러 측면에서 재앙이 될 것이다. 전혀 다른 세계관, 전혀 다른 문화적 습관의 체제를 살고 있다. 이 이질성은 동서독의 이질성과 비교해 엄청나게 크다. 먼저 접근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lkb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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