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은 왜 맹획을 일곱번 붙잡고 일곱번 풀어줬을까
힘으로 '애국' 강제하는 중국…'매력 부재' 고민할 때
홍콩 빅토리아 피크의 관광객들 |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유비 사후 촉나라 승상이던 제갈량(諸葛亮)은 남만(南蠻) 정벌에 나선다.
반란 세력 수장은 맹획(孟獲)이었는데 뛰어난 전략가인 제갈량은 맹획을 잡고 풀어주기를 일곱번이나 되풀이한다.
용맹하면서도 현지인들의 신망이 두터운 맹획을 붙잡아 목을 베어 공포심을 심어주는 것보다는 맹획이 진심으로 복종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삼국지 제갈량전 속의 '칠종칠금'(七縱七擒) 얘기다. 지금도 인내심을 갖고 상대방이 숙여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뜻으로 이 말이 널리 쓰인다.
현대 중국에서는 한국과는 달리 '잡았다는' 뜻의 금(擒)을 '풀어줬다는 뜻의 '종'(縱)보다 앞세워 칠금칠종(七擒七縱)이라고 주로 쓴다.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 '파산' 논란을 불러온 중국의 홍콩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 강행 사태를 바라보며 칠종칠금이라는 고사성어가 떠올랐다.
중국이 속전속결로 밀어붙인 홍콩보안법 제정을 두고 중국 안팎의 평가가 분분하다.
그렇지만 홍콩보안법 제정 강행은 기본적으로 철권을 앞세워 홍콩 주민들에게 충성과 애국, 복종을 강제하는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홍콩 시민 다수의 반대 의사가 표출된 홍콩보안법을 홍콩 의회가 아닌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제정해 내려보낸 전례가 없었기에 '홍콩인이 홍콩을 통치한다'(港人治港)는 원칙이 무너졌다는 맹렬한 비판 제기가 가능한 상황이다.
경계가 모호한 '반정부 활동'으로 무기징역까지 처할 수 있는 홍콩보안법의 시대가 개막하자마자 홍콩의 거리는 빠르게 질서를 되찾는 것처럼 보인다.
홍콩·중국 정부와 홍콩 민주 진영 간의 힘의 균형이 일순간에 깨짐에 따라 나타난 인위적인 평화다.
'우산 혁명' 주역들이 이끌던 데모시스토당(香港衆志)을 비롯한 여러 급진 정당과 시민단체들이 공포 속에 스스로 해산했고, 네이선 로(羅冠聰) 등은 해외로 망명했다. 중국 본토와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회색 지대'로서의 홍콩 정체성에는 큰 충격이 가해졌다.
작년 여름부터 홍콩의 민주화 시위 열기가 고조되면서 적지 않은 홍콩인들 사이에서 스스럼없이 중국에서 떨어져나오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여서 중국 중앙정부의 인내심에 한계가 온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홍콩은 추악한 동기로 촉발된 아편전쟁 후인 1842년 중국이 영국에 빼앗겼다가 1997년 돌려받았다. 중국이 홍콩을 다시는 분리될 수 없는 신성한 영토로 여기는 것은 일제의 침략 역사를 겪은 우리로서도 이해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
홍콩의 민주화 시위가 한창이던 작년 12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홍콩 바로 앞인 마카오를 찾아가 "아편전쟁 이래 민족의 치욕사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홍콩을 둘러싼 혼란의 기원의 바라보는 중국 지도부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현재 중국 지도부의 눈에 홍콩은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 '반항아'다. 100년이 넘는 세월 '회색 지대' 시민으로 살아온 홍콩인들이 중국 본토와 차이가 있는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자신을 '홍콩인'으로 여기면서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에는 의문을 던지는 이들이 적지 않다.
경찰에 체포된 홍콩 시위대 |
경제적으로는 이미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해 'G2'(주요 2개국)로도 불리는 중국은 이제 '소프트 파워 부재'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다.
사실 이는 중국에 마지막 남은 '수복 대상'인 대만에도 마찬가지로 해당하는 문제다.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분단이 길어지면서 점점 더 많은 대만인이 더는 스스로 중국인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
중국은 분단 고착화를 우려해 군사·경제·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대만을 거칠게 압박하고 있지만 대만인들의 중국을 향한 반감만 더욱 커지고 있다. 강해진 반중 정서 속에서 장기 집권을 꿈꾸는 대만 민진당 세력은 조용히 웃는다.
군사력과 경제력 같은 힘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을 사는 소프트 파워, 즉 '매력'이다.
홍콩인과 대만인들이 '중국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어쩌면 '자유 세계' 속에서 사는 현대인의 일상이 된 페이스북과 유튜브를 자유롭게 쓸 수 없는 것 같은 매우 작은 것 같지만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면 국민이 지도자를 직접 선출하는 정치 제도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과거 중원에서 일어난 대제국들은 군사력을 앞세운 공포보다는 선진 문화와 경제, 기술 등 앞선 소프트 파워의 힘으로 오랜 기간 번성할 수 있었다.
1978년 개혁개방 시작 이후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광풍에서 벗어나 '서방' 세계와 많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중국 특색 사회주의' 중국과 세계 다른 나라와의 간극은 여전히 크다.
이 글을 쓰면서도 필자는 1년에 한 번씩 반드시 갱신해야 하는 중국 외신기자증과 거류허가증 문제를 떠올리며 '자기 검열'을 하면서 표현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 아마도 한국에서 일하는 중국 매체 특파원들은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시 주석 집권 이후에는 고도로 강력해진 사회·인터넷 통제 강화와 권력 1인 집중 등 여러 측면에서 '역행' 지적도 적지 않다.
국제사회와 친밀해지기보다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듯한 시진핑 시대의 일부 변화는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중국공산당'을 표적으로 삼은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강화하는 데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과거 취재 도중 대만 중앙연구원의 장촨셴(張傳賢) 연구원으로부터 들은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수 없는 이유'는 아직도 머릿속에 깊이 남아 있다.
"시진핑이 대만을 통일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민진당도 중화민국 국군도 아닙니다. 여기에 중국과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 2천만 대만 민중이 있다는 사실지요."
ch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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