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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책과 지성] 동창회에 가도 헤게모니는 있다

매일경제 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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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책과 지성] 동창회에 가도 헤게모니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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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회에도 헤게모니는 있다.

어떤 친구는 모임에 잘 나오지도 않고, 연락도 잘 받지 않지만 발언권은 세다. 모임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보면서 모임을 운영한다. 모임 날짜를 잡거나 장소를 정할 때도 그의 의중이 반영된다. 그는 늘 상석을 권유받고, 어떤 문제로 토론이 벌어졌을 때 그의 주장이 결론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구성원들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헤게모니다. 이해관계 때문이든, 그가 무서워서든, 아니면 그가 지적으로 우월해서이든 그에게 동의하는 지배적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헤게모니는 유지된다.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그의 저서 '옥중수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헤게모니는 비강제적인 권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이다. 집단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기구인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헤게모니라는 개념은 참 절묘하면서도 정확하다. 외래어 사용 자제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헤게모니를 '주도권'으로 고쳐 부를 것을 요구한다지만 왠지 부족하다.

헤게모니라는 말을 그람시가 처음 만든 것은 아니다. 이 단어는 원래 권위나 지배를 뜻하는 그리스어 '헤게모니아(Hegemonia)'가 어원이다. 이것을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가들이 쓰기 시작했고, 그람시가 이 단어를 가지고 진지전 이론을 설명하면서 대중화됐다.



러시아에서 '정치적 지배'만을 의미하던 헤게모니는 그람시로 건너오면서 지배계급의 본질을 뜻하는 말이 됐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은 처음엔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을 비롯한 유럽 우파 전체주의 정권들을 공격하는 데 쓰였다.

흥미롭게도 세월이 흐르면서 헤게모니도 바뀌었다. 유럽, 남미를 비롯한 많은 국가들에서 좌파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이다. 우리나라도 헤게모니가 교체된 국가 중 하나에 포함될 것이다. 헤게모니는 살아서 움직이는 단어다. 인간의 권력 의지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할 것이다.


1891년 이탈리아 사르데냐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람시는 어린시절 계단에서 추락해 장애인이 된다. 허리가 심하게 굽기 시작했고 키는 어른이 된 이후에도 150㎝밖에 되지 않았다. 신체가 휘어지면서 다양한 내과 질환에도 시달렸다.

몸이 불편했던 천재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람시도 앉아서 천리를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흐름을 간파하는 탁월한 관찰자이자 예언자였다.

무솔리니 정권에 의해 20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감옥에 앉아 왜 마르크스 혁명이 자본주의가 발달한 유럽이 아닌 농업국가 러시아에서 일어났는지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때 내린 결론이 헤게모니 이론이다.


그람시는 혁명의 핵심 동력이 빈부 차이나 운동조직, 무력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는다. 다중이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문화적 도덕적 이데올로기가 하나로 모여 헤게모니가 될 때 권력교체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찾아낸다. 그람시의 이론을 동양적으로 설명하자면 '대세(大勢)'라는 말이 떠오른다. 다중이 동의하는 물줄기가 권력이 되는 것이다. 흐름을 모르는 자 권력을 얻을 수 없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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