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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서 퇴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DVD는 사재기 붐

매일경제 박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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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서 퇴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DVD는 사재기 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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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노예제 미화 논란을 일으킨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최근 미국 온라인동영상서비스 HBO맥스에서 퇴출됐다. [사진 제공 = 수도영화사]

흑인노예제 미화 논란을 일으킨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최근 미국 온라인동영상서비스 HBO맥스에서 퇴출됐다. [사진 제공 = 수도영화사]


사회적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함에 대한 요구가 고전 작품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PC란 편견이 섞인 표현과 행동을 자제하자는 사회적 운동으로 1980년대에 시작돼 2000년대 들어 강한 지지를 받고 있다. 본래 현시대 공인과 콘텐츠를 주로 겨냥하던 이 운동이 최근엔 옛 텍스트의 혐오와 차별 정서를 재검증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것. 대중문화의 파급력을 고려했을 때 당연한 움직임이라는 입장과 당대 시대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배제된 과격한 흐름이라는 반박이 대립하면서 논란도 일고 있다.

미국 조지 플로이드 사건을 계기로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흑인의 목숨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은 난데없이 고전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사재기로 이어지고 있다. 흑인 노예 제도 미화 논란을 낳는 이 영화를 영원히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확산되면서다. 특히 흑인 시나리오 작가 존 리들리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공개 비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HBO맥스에서 이 영화 서비스가 중단됐다. 이 때문에 고전영화 팬들의 불안감이 증폭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로 인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일 오후 2시(한국시간) 미국 쇼핑 사이트 아마존 영화·TV 베스트 셀러 부문 1위를 달리고 있다.

영국 BBC에 따르면 2003년 방영된 TV 코미디 시리즈 '리틀 브리튼'은 넷플릭스, BBC 아이플레이어 등 OTT에서 퇴출됐다. 백인 출연자가 흑인으로 분장한 것이 문제되면서다. 흑인 이외 인종이 흑인 역할을 연기하고자 분장하는 '블랙페이스(blackface)'는 인종차별 행위로 간주된다.

애니메이션 `덤보`에서 까마귀떼 대장의 이름은 `짐 크로`다. 이는 흑인을 낮춰 부르는 멸칭이어서 최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진 제공 =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 `덤보`에서 까마귀떼 대장의 이름은 `짐 크로`다. 이는 흑인을 낮춰 부르는 멸칭이어서 최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진 제공 = 월트디즈니]


클래식 애니메이션도 자유롭지 못하다. 월트디즈니 만화영화는 소수 인종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준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아기 코끼리를 주인공으로 삼은 '덤보'(1941)가 대표적이다. 코끼리 덤보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는 까마귀 떼 대장의 이름을 '짐 크로'라고 설정한 것이다. 짐 크로는 1830년대 미국에서 인기를 끈 흑인 비하 코미디쇼 캐릭터의 명칭이다. 1876년 미국 내 인종 간 분리를 합법화한 '흑백 분리법'이 '짐 크로 법'으로 불리기도 했다.

페미니즘 역시 고전을 재평가하는 기준으로 부상하고 있다.


'007 시리즈'는 본드걸에게 성적인 이미지만을 부각해 소모적으로 활용한다는 지탄을 받아왔다. 문학에서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주인공 김첨지를 그리는 방식이 여성을 향한 왜곡된 시선을 드러낸 것으로 꼬집힌다. 아내에게 욕하고, 아내 뺨을 때리는 남성이 '사랑은 많지만 표현에 서툰 남편'으로 묘사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운발 없는 생' 등 한국 근현대문학을 여성주의 시선으로 다시 본 작품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PC의 위세가 고전을 재평가할 정도로 강해지면서 현대 예술가는 스스로에게 더욱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게 됐다. 표현의 자유보다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앞선다는 공감대도 확산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은 최근 영화 '청년경찰' 제작사에 '국내 거주 중국 동포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데 대해 당사자들에게 사과하라'는 내용의 화해 권고 결정을 내렸다. 이 작품은 중국 동포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키운다는 비난을 받았다.

다만 당대 시대적 배경을 살피지 않은 채 작품의 퇴출만을 촉구하는 건 문화 아카이브를 위축시킬 것이란 일각의우려도 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작품 전체가 아닌 몇 장면만 가지고 평가하는 건 일반화의 오류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디즈니의 OTT 디즈니플러스는 일부 애니메이션에서 인종차별 요소를 포함한 장면을 삭제하지 않았다. 대신 '이 프로그램은 시대에 뒤떨어진 문화적 묘사를 포함할 수 있다'는 경고 문구를 삽입하기로 결정했다. 김효정 영화평론가는 "작품을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선 지금 어떤 의미를 갖고,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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