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조선일보 언론사 이미지

[문기자 잡담]일본에선 흔하지만 한국에선 희귀해진 이 문화

조선일보 문현웅 기자
원문보기

[문기자 잡담]일본에선 흔하지만 한국에선 희귀해진 이 문화

서울맑음 / -3.9 °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궁술(弓術)을 숭상했다. 사냥이나 전쟁과는 거리가 먼 책상물림 유학자마저도 활쏘기 연습만큼은 꾸준히 했다. 사격은 사대부의 기본 소양인 육예(六藝) 중 하나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전통 설화만 봐도 지나가던 선비 화살에 맞아 죽은 구렁이나 호랑이 수를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무사도’(武士道)라는 말이 널리 쓰이기에 앞서 무인 계급의 덕목을 지칭하는 표현은 ‘궁마의 도’(弓馬の道)였다. 사무라이(侍)의 기본 장비 역시 활이었다. 이 때문에 궁수(弓取り)는 곧 무사를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예컨대 전국시대 다이묘인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1519~1560)는 정말 압도적인 명궁이라 ‘도카이 제일의 궁수’(東海一の弓取り)로 불린 것이 아니다. 그저 일대에서 가장 위세 높은 무장이라는 맥락에서 그런 칭호를 얻었을 뿐이다.

◇엇갈린 운명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선 한국과 일본의 전통 활쏘기 형편이 자못 달라졌다. 전 일본 궁도 연맹에 따르면 2019년 3월 기준으로 연맹에 등록한 회원 수는 13만5403명에 달한다. 또한 각급 학교 2000여곳에서 전통 활쏘기를 가르친다. 이 때문에 일본에선 각종 매체에서 궁도를 흔히 볼 수 있다.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의 미즈노 미도리나 ‘카구야 님은 고백받고 싶어’의 시노미야 카구야처럼 만화나 애니메이션 속 궁도부 캐릭터도 숱하고, 게임에서도 ‘페르소나 시리즈’의 타케바 유카리나 ‘역전재판 5’의 시즈야 레이 등 궁도를 하는 이가 심심찮게 나온다.
궁도 소녀 미즈노 미도리./아이돌마스터 신데렐라 걸즈 스타라이트 스테이지

궁도 소녀 미즈노 미도리./아이돌마스터 신데렐라 걸즈 스타라이트 스테이지


반면 한국은 대한궁도협회에 등록된 회원 수가 2만명 선에 그치고 있다. 양국 간 인구 차가 두배를 웃돌긴 하지만, 그것만으론 회원 수 격차가 6배 넘게 벌어진 상황을 온전히 설명하긴 어렵다. 정규 혹은 방과 후 수업에서 전통적인 궁술을 가르치는 학교도 드물다. 대한궁도협회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궁도를 학과 수업에 편성한 학교는 서울 충무초등학교와 민족사관고등학교 정도뿐이다. 궁도 동아리를 운영하는 학교도 한민고, 낙생고 등 20여곳에 불과하다.

물론 전통 활쏘기를 다루는 단체는 대한궁도협회 이외에도 여럿 존재한다. 특정 협회에 몸담지 않고서 국궁을 즐기는 인구도 꽤 있다. 하지만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라, 계산에 넣는다 한들 차이가 그다지 좁혀지진 않는다. 또한 일본과는 달리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국내 매체에선 궁도가 등장하는 장면을 찾기 어렵다. 2011년 개봉작 ‘최종병기 활’이 대중에 꽤 깊은 인상을 남기긴 했지만, 이 영화 배경은 현대가 아닌 병자호란 시기다. 두 나라의 국궁은 어쩌다 운명이 갈리게 됐을까.
영화 '최종병기 활'의 한 장면./조선DB

영화 '최종병기 활'의 한 장면./조선DB


◇비메달 종목의 슬픔

김태훈 대한궁도협회 사무처장은 “일본은 일찍이 국내·외 문화 전파와 수출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검도, 스모, 유도, 궁도를 정부 차원에서 널리 권장하고 정책적으로도 밀어줬다”고 했다. 사례 중 하나로 국제궁도연맹(IKYF·International Kyudo Federation)을 들 수 있다. 일본이 궁도정신을 통해 인류 평화를 이루겠다며 2006년 창설한 단체로, 미국, 호주, 벨기에, 프랑스 등 28개국이 회원으로 속해 있다. 이들은 4년마다 개최지를 바꿔가며 세계궁도대회를 개최해 일본의 전통 활쏘기를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일본 황족인 고(故)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아내 히사코(67) 비를 명예 회장으로 앉혀 국가 차원에서 권위와 힘도 실어 줬다.

일본이 창설한 국제궁도연맹에서 전통 활쏘기를 시연하는 장면./IKYF

일본이 창설한 국제궁도연맹에서 전통 활쏘기를 시연하는 장면./IKYF


한국은 달랐다. 김 처장은 “우리 전통 무예 중 태권도만 국내·외에 알릴 대상으로 주목받았을 뿐, 태껸, 씨름, 궁도 등엔 지원이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대한궁도협회는 해외 지부가 아르헨티나에 1곳 있을 뿐이며, 그마저도 정부 지원에 힘입은 진출은 아니다.

우리 정부가 궁도를 유달리 미워해 손을 뗀 것은 아니다. 그저 모든 관심과 여력을 양궁 쪽에 쏟았을 뿐이다. 당시 개발도상국이던 국가 사정 때문이었다. 국제무대의 후발 주자였던 한국은, 국위를 선양하며 나라 이름을 널리 알리고 민족 자긍심을 높일 수단이 절실했다.

한민족은 예나 지금이나 활을 잘 쏘았다. 국궁이건 양궁이건 국제대회에 나가면 상을 휩쓸 가망이 충분했다. 그러나 국궁은 세계의 이목을 끌며 돋보일만한 국제대회가 없었다. 반면 양궁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 메달을 노릴 수 있었다.


활에 재능을 보이는 젊은 인재는 대개 양궁 쪽으로 진로를 밟으라는 권유를 받았다. 김 처장은 “선수들 역시 지원도 풍부한데다 실력이 충분하면 메달리스트의 영광까지 누릴 수 있는 양궁 쪽을 훨씬 선호했다”고 말했다. 과거 대한궁도협회의 한 분야였던 양궁은 1983년 3월 대한양궁협회로 분리해 나왔다. 그리고선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거치며 모체를 넘어서는 규모로 성장했다.

일본은 비교적 일찍 개발도상국 지위를 벗어난 덕에 우리와는 정책을 달리할 수 있었다. 그들도 1964년 도쿄올림픽 이전까진 엘리트 체육 쪽에 치중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올림픽 이후로는 온 국민이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운동을 제공하는 쪽에 보다 힘을 쏟았다. 성공적으로 올림픽을 개최한데다 결과도 좋았으니(종합 3위), 적어도 한동안은 스포츠로 나라를 홍보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게다가 1980년대 들어 경제 호황기를 맞이하자, 국제대회 메달 개수를 내세워가며 국가 위신을 세울 필요가 한층 더 줄었다. 그런 이유로 일본 정부는 ‘올림픽 종목’인 양궁에 우리만큼 매달리진 않았다. 대신 그들의 전통문화인 궁도를 학교체육과 생활체육에 널리 보급하고자 노력했다.

궁도부 활동을 하는 대학생들./메이세이대 공식 트위터

궁도부 활동을 하는 대학생들./메이세이대 공식 트위터


‘유토리(ゆとり) 교육’의 영향도 있었다. 경쟁적 교육에서 벗어나 자율학습과 동아리 활동을 병행하며 창의적 인재를 육성하는 방침으로, 일본은 이를 1976년부터 단계적으로 도입했다. 그 결과 각급 학교에서 부활동이 활발해졌고, 자연스레 동아리에 가입해 궁도를 즐기는 학생도 늘었다. 지금도 일본은 다수 학교에 궁도부가 마련돼 있다. 특히 아이치현에서는 현 내 고등학교 중 절반가량에서 궁도부를 운영 중이다.
일본에서는 이처럼 하카마를 입고서 활을 들고 다니는 학생을 흔히 볼 수 있다./릿쿄스포츠

일본에서는 이처럼 하카마를 입고서 활을 들고 다니는 학생을 흔히 볼 수 있다./릿쿄스포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나라에서 양궁에 비해 덜 밀어주었을 뿐, 한반도에서 국궁이 아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다. 대한궁도협회에 따르면 매해 열리는 전통 활쏘기 관련 대회 50여건에 달한다. 행사 때마다 찾아오는 인원도 1000~1500명 정도는 된다 한다.

우리 정부도 국궁에 대한 관심을 아주 끊진 않았다. 2014년 안전행정부는 서울 종로구 등과 함께 옛 고종의 궁술연습장이었던 사직공원 내 황학정에 공익 박물관인 ‘국궁전시관’을 설치했다. 지난 4월 20일엔 문화재청이 ‘활쏘기’를 국가무형문화재 새 종목으로 지정 예고했다고 발표했다. 예고 기간(30일 이상)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무형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지정 여부를 최종적으로 확정한다.

[문현웅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