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 영화 기행
할리우드대로의 투어 버스 [사진/한미희 기자] |
할리우드대로(boulevard)는 동서 방향으로 쭉 뻗어 있다. 돌비 극장과 차이니즈 극장 등 관광객이 주로 몰리는 곳은 하이랜드 애비뉴를 기준으로 서쪽에 몰려 있고, 올드 할리우드 투어는 동쪽 지역에서 이뤄진다. 같은 할리우드대로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고전적인 스타일로 꾸민 에이프릴 브룩스 클레머 씨가 투어 가이드로 나서줬다. 조지아주 출신인 그는 패션을 전공했고 좋아하는 영화배우들의 전기를 읽으며 할리우드에 대한 사랑을 키웠다고 했다. 현재는 할리우드 유산보존위원회의 일원으로 올드 할리우드 워킹 투어를 이끌고 있다.
현재는 스피크이지바가 있는 할리우드대로의 가장 오래된 집. 한때 찰리 채플린이 다닌 학교이기도 했다. [사진/한미희 기자] |
◇ 교외의 작은 농촌 마을이었던 할리우드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의 북서쪽에 있는 할리우드는 1853년 오두막 한 채에서 시작됐다. 농사가 잘되는 농촌 마을 공동체였던 이곳에 1880년대 부동산 재벌 하비 헨더슨 윌콕 부부가 땅을 사 정착하며 '할리우드'라고 이름을 붙였다.
1900년까지 인구가 500명에 불과했던 이곳은 1910년 로스앤젤레스에 합병된 이후 세계 영화산업의 중심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미국 영화의 중심지가 동부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옮겨오게 된 것은 (덕이라고 해야 할지, 탓이라고 해야 할지)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 때문이다.
1천 개가 넘는 발명 특허를 가진 에디슨은 도용한 남의 아이디어를 상용화해 막대한 돈을 벌었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않고, 영화계에서도 그 악명을 떨쳤다.
직원이 발명한 영사기 키네토스코프로 특허를 얻고 프랑스 영화 '달세계 여행'(1902)을 불법 복제해 미국 전역에서 개봉해 크게 성공한 에디슨은 뉴저지에서 영화특허회사를 만들어 영화 시장을 장악하려 했다.
다른 영화 제작자들은 대부분의 영화 제작 특허를 가진 에디슨의 횡포를 피해 그로부터 가장 먼 서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로스앤젤레스는 바다와 산, 사막이 모두 있는 자연 스튜디오였고, 강렬한 햇살 덕에 조명이 따로 필요 없었다. 당시 인기 있었던 서부극을 찍기에는 천혜의 지리적·기후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할리우드대로 '명예의 거리'에는 지금까지 2천500명이 이름을 새겼다. [사진/한미희 기자] |
◇ 할리우드 최초의 것들
할리우드대로와 윌콕 애비뉴의 코너에 있는 퍼시픽 영화관은 원래 워너브러더스의 영화관이었다. 할리우드 유일의 대형 프랜차이즈 영화관이자, 사운드 시설을 갖춘 곳이었다.
1920년대 유성영화가 시작됐을 때 사람들은 첫 유성영화를 보고자 극장 주변에 긴 줄을 섰다. 그 대각선에 있는 현재 상가 건물이 1910년 할리우드에서 처음 문을 연 극장이다.
극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관광객도 많지 않은 이곳에 설치된 명예의 거리 동판은 서스펜스 스릴러의 거장 앨프레드 히치콕 감독이다. 히치콕 감독의 '사이코'(1960)가 이곳에서 프리미어 상영을 했기 때문이다.
영화 촬영은 예나 지금이나 시끄러운 일이어서 윌콕 부부를 비롯해 은퇴 후 조용하고 여유로운 삶을 위해 이곳으로 온 주민들은 '개 금지, 배우 금지'(No dogs, no actors)라는 팻말을 문에 붙여 놓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1924년 지어진 것이 배우 전용 숙소 '힐뷰 아파트먼트'(Hillview APTS)다. 지금은 분홍색 외벽으로 단장한 4층짜리 건물이다.
힐뷰 아파트먼트 뒤로 할리우드대로의 가장 오래된 집이 있다. 1903년 지어진 집의 지붕이 너와집을 닮았다. 현재는 스피크이지바로 운영 중이지만 한때 찰리 채플린이 다녔던 학교로 쓰이기도 했다.
가이드 에이프릴이 최초의 유성 영화를 보기 위해 당시 워너브러더스 극장 주변으로 줄을 선 사람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사진/한미희 기자] |
◇ 부동산 광고판의 역전
찰리 채플린의 무성 영화를 촬영했던 할리우드대로 6410번지 입구를 지나 한 건물로 들어갔다. 1888년 지어진 할리우드의 가장 오래된 호텔이었지만 지금은 사무실로 임대되고 있다.
워킹 투어에서 쓰고 있는 사무실 창밖으로 멀리 할리우드 사인이 보인다. 1923년 처음 설치될 때는 'HOLLYWOOD'가 아니었다. 언덕 위 '할리우드랜드'(HOLLYWOODLAND)라는 지역의 부동산 광고판이었기에, 'HOLLYWOODLAND'였다.
각 글자는 가로 9m, 높이 15m로 전체에 4천 개의 전구가 깜박거렸고 이를 위해 들어간 돈이 2만1천달러, 현재 가치로는 32만달러(약 3억9천만원) 정도였다.
1949년 '랜드'(LAND)를 철거하고 '할리우드'만 남았고 이후 훼손된 상태로 방치되던 것을 1978년 잡지 플레이보이의 휴 헤프너가 주축이 돼 복원 운동을 벌여 현재의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높이 14m, 전체 길이가 106m에 달하는 이 사인은 날씨가 맑으면 수십㎞ 밖에서도 볼 수 있는 로스앤젤레스의 대표적인 랜드마크가 됐다.
투어의 마지막에 들른 래리 에드먼즈 북숍은 할리우드의 오래된, 유일한 영화 전문 중고 서점이다. 1938년 문을 연 이 서점은 영화 서적뿐만 아니라 포스터와 사진, 대본 등을 모두 취급한다. 마거릿 헤릭 도서관만큼은 아닐지라도, 투어를 마친 뒤 흥미롭게 둘러볼 만하다.
래리 에드먼즈 북숍에 히치콕 코너가 따로 마련돼 있다. [사진/한미희 기자] |
◇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
'기생충'과 함께 이번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후보에 올랐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는 이 '올드 할리우드' 여행에 시의적절한 영화가 아닐 수 없다.
격변의 시대였던 1969년 할리우드에서 실제 벌어졌던 비극적인 사건에 가상의 인물을 들여보내 실제와는 다른 결말로 가는 이 영화는 '할리우드 키드'였던 타란티노 감독이 빛났던 시절의 할리우드에 바치는 헌사로 평가된다.
그래서 이 올드 할리우드 투어의 마무리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인 '무소 & 프랭크 그릴'이 좋겠다. 1919년 오픈해 지난해 100주년을 기념했다.
'무소 & 프랭크 그릴'에서 촬영한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의 한 장면 [소니 픽처스 제공] |
'원스 어폰 어 타임…'에서 릭과 클리프가 바에 앉아 칵테일을 마시던 바로 그곳이다. 무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브래드 피트, 그리고 알파치노가 함께 등장하는 그 장면이다.
가이드 에이프릴은 "웨이터 아무개를 찾으면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브래드 피트가 앉았던 자리는 물론, 당시 현장 이야기를 자세히 해 줄 것"이라고 귀띔했다. 하지만 웨이터 아무개를 찾을 여유는 없었다.
평일 저녁임에도 이 고풍스러운 식당은 오가기 불편할 정도로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찼고, 빨간 재킷을 입은 나이 지긋하고 연륜 있는 웨이터들이 그사이를 바삐 오가고 있었다.
할리우드의 가장 오래된 식당인 '무소&프랭크 그릴' [사진/한미희 기자] |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mih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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