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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소문 여행-서소문 밖 네거리의 새로운 문화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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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소문 여행-서소문 밖 네거리의 새로운 문화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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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밖이 변하고 있다. 산책하기 좋은 서소문역사공원, 서소문 밖 네거리의 장소성과 역사성을 담은 유물들을 보기 좋게 전시한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국내 최초의 서양식 건축 성당인 약현성당, 현대적 감성의 문화 콘텐츠 체험 공간으로 단장한 중림창고 등 순교 성지에서 문화 체험 공간까지 최근에 새로 그려진 서소문의 문화 지도를 소개한다.


지난해 서소문에 널찍한 초록빛 근린공원이 하나 생겼다. 서소문역사공원이다. 이 자리는 서울역의 서북쪽 경의선 철로와 서소문 고가 도로가 교차하는 곳으로, 교통 소음이 많고 그늘진 다소 음울한 지역이라 관광객은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걸어서 지나다니기를 꺼렸다. 이곳을 서울시에서 수제화 거리로 유명한 염천교 바로 앞까지 연결해 역사 문화 공원으로 지정하여 3년에 걸친 공사 끝에 서울시민의 휴식처로 새단장했다.

인근의 음습한 분위기를 일시에 환하고 푸릇하게 바꿔 버린 약 2만5000여 m2(약 7500평)의 넓은 녹지와 함께 공원 안의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건축계와 종교계, 문화 예술계의 화제가 되었고, 오픈한 지 불과 반년 만에 서울에서 가볼 만한 곳으로 손꼽히는 명소가 되었다. 19세기 후반 천주교 박해 당시 순교한 이들의 역사가 담긴 곳. 대한민국 천주교 100년 역사의 최대 순교 성지지만 그렇다고 종교적 공간으로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곳은 조선 후기에 상거래가 활발하게 일어나 조선 실학자들이 공들여 기록했던 지역이고, 종교적 문화 유물과 공간의 역사 문화적 의미를 살리는 건축과 현대 예술 작품들이 돋보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수레가 부딪힐 정도로 번성했던 서소문 밖 약현

조선 시대 한양에는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을 잇는 성곽을 쌓아 도성을 방어하는 시설을 만들었다. 성곽 사이사이에 크고 작은 문을 만들어 성 안팎을 드나드는 이를 통제했는데, 현재의 남대문(숭례문), 동대문(흥인문), 서대문(돈의문), 북대문(숙청문)이 사대문四大門이고, 그 사이에 다시 동북의 홍화문(동소문), 남서의 소의문(서소문), 동남의 광희문(수구문), 서북의 창의문(자하문) 등 사소문四小門이란 작은 문을 더 두었다.

이 중 소의문은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에 있어 마포나 서강을 통해 바닷길로 나가는 길목이었다. 삼남 지방에서 한양으로 곡식이나 어물을 갖고 오는 상인들은 반드시 소의문을 거쳐야 했고, 수시로 도성 안의 시전 상인들을 연결하는 난전이 펼쳐졌다. 18세기 전반에는 한양의 큰 상업 중심지였던 이곳을 칠패七牌라 불렀고, 지금도 이곳의 도로명 주소는 ‘서울시 중구 칠패로’다. 당시에는 약초가 많아 ‘약초고개’란 뜻의 약현藥峴으로도 불렀다.


조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고을 수령들이 지켜야 할 지침을 적은 저서 『목민심서』에서 ‘약현은 용산으로 가는 길로 곡물이 폭주하고 수레가 부딪히고 사람이 어깨를 부딪히는 곳’이라고 기록하며 ‘한강 물길을 통해 반입되는 모든 물자가 서소문 밖으로 모여들었다’고도 적었다.

또한 북학파 학자 유득공이 한양의 풍속에 대해 정리한 저서 『경도잡지』의 ‘시포市鋪’ 조에 ‘대체로 장보러 가는 사람은 새벽에는 이현과 소의문 밖으로 모이고, 점심 때는 종가로 모인다. 온 장안의 수요품 중에 동부에서는 채소가, 칠패에서는 생선이 가장 풍부하다’라고 서소문 밖 새벽 시장 풍경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 새벽 수산 시장은 지금도 합동(새벽)시장이란 이름으로 약현성당 입구에 아침마다 좌판을 벌인다.

당시에 도성 안은 사회 계층에 따라 거주 공간이 구분되었으나 서소문 밖 약현은 다양한 사회 계층이 어우러져 사는 곳이었다. 권력의 핵심에서 한발 물러난 학자들과 약초를 다루던 의원들,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들, 삶의 터를 빼앗기고 한양으로 올라온 유민들까지 구역 없이 뒤섞여 살았다고 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은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해 신분이나 출신 지역, 직업의 구분이 흐릿해서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순교 성지에 조성된 서소문역사공원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은 가장 역동적인 삶의 현장인 동시에 ‘죽음’의 장소이기도 했다. 도성 안 백성들이 죽으면 시신을 서쪽으로 운구할 때 이용한 문이었고, 사람이 많은 서소문 밖 저잣거리에서 동학 농민 운동 지도자 등 중죄인을 처형하는 국가 형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삶과 죽음이 함께 존재하고, 또 교차하는 곳이었다. 특히 한국 천주교 100년 역사 중 단일 성지로는 가장 많은 천주교인이 순교한 성지여서 이 근처에 순교지와 연관된 종교적 장소가 많다.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우리 땅에 천주교가 전해진 이후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86년 병인박해를 당하고 1886년 한불 수호 조약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얻을 때까지, 100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2만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 당했다. 당시 98명의 천주교인이 이곳 서소문 밖 형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조선 시대부터 국가 형장으로 이용하던 이곳에서 세 번의 박해 때마다 천주교인들의 목숨을 앗아간 망나니들이 칼을 씻던 뚜께우물의 흔적이 아직도 서소문역사공원 안에 남아 있다.


민초들의 삶은 절박하고 끈질기다. 피와 눈물이 넘쳐 흐르던 시절을 꿋꿋이 견디며 변함없이 새벽마다 생선 시장이 열리던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는 수산 청과 시장으로 다시 붐볐다. 서울 도심 재정비가 한창이던 1973년에는 서소문근린공원으로 지정되었으나 이후 20여 년간 사람의 발길이 끊기고 쇠락하면서 노숙자들의 공원이 되었다. 도심 속 주차 공간의 부족으로 1996년에 공영 주차장이 되었다가 지난 3년간 공사를 해서 서소문역사공원이 되었다. 순교자 현양탑이 있는 공원의 지상에는 7000여 주의 수목과 9만5000여 본의 초화류를 심어서 산책과 휴식을 위한 녹지 공간을 조성했다.

순교자 현양탑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신조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박해와 죽음의 상징인 칼을 형상화하고, 생명의 상징인 물이 앞에 흐르도록 했고, 순교의 참상을 형상화한 청동 조각을 붙였다. 이곳에서 순교한 98명의 순교자 중 44명은 순교 기록과 교황청의 검증으로 성인 반열에 올랐다. 성인의 전 단계인 복자에 오른 27명의 이름도 함께 새겨져 있다. 공원의 지하에는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건물이 자리해 박물관과 전시실, 기념 전당과 도서실 등이 만들어졌다.


▶장소의 의미를 건축으로 잘 담아낸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멀리서 보면 건물이 어디 있는지 찾기 쉽지 않다. 공원 부지를 판화의 평면으로 보고 중요한 공간들은 조각도로 땅에 새기듯 바닥을 파고 들어가는 인그레이빙 구조로 건축해, 박물관이 서소문역사공원의 잔디밭 아래 지하층에 있기 때문이다. 도심의 녹지를 보존하면서 지하 공간을 활용한 건축 방식으로 박물관은 제37회 서울시건축상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당시 박물관은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았다.

“서소문 밖 네거리의 장소성, 상징성, 역사성이 공존하는 대지에 종교적 상징성과 공공성을 완성도 높게 표현한 역작이다. 지상부는 시민이 이용하는 공원 시설로, 지하는 전시 등 공공시설과 종교적 상징 공간으로 잘 계획되었다. 특히 지하 공간의 빛과 동선을 이용한 공간 표현과 완성도가 매우 우수하다.”

붉은 벽돌과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한 벽을 따라 지하 벙커처럼 아래로 내려앉은 박물관으로 들어가니 사방에 붉은 벽돌이 하늘 높이 쌓인 광장 가운데 조각품이 한 점 오롯이 서 있다. 입구부터 경건해지는 느낌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비율이 왜곡되어 위에서 눌린 듯한 형상의 인물 조각이 한 점 관람객을 맞는다. 이환권 작가의 ‘난민복서’다. 카메룬 출신의 난민 권투 선수를 모델로 해서 난민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와 관심을 다룬 작품이다. 박물관 내부는 천장과 기둥 사이가 반복적인 십자 모양을 그리는 가운데 이경순 작가의 ‘순교자의 길’ 시리즈가 양옆에 전시되어 있다. 작품을 하나하나 보면서 걷다 보면 순례자처럼 숙연해진다. 박해받은 신자들이 순교의 길을 걸었던 성지의 역사를 되새겨보게 하는 묵직한 질감의 작품과 묵상의 글이 새겨져 있다. 박물관 안에는 이외에도 박선기, 권석만 작가의 작품 등 현대 미술 작품들이 공간에 의미를 더하고 있다.

박물관은 조선 후기 사상사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된 상설 전시관, 회랑식 공간에 있는 기획 전시실, 미사를 볼 수 있는 성 정하상 기념 경당, 대형 미디어 아트 작품을 상영하는 영적 공간인 콘솔레이션홀, 교회 서적을 비롯해 예술과 인문학 서적 1만여 권을 갖춘 도서관 그리고 하늘광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하 3층의 상설 전시관은 화이트 인조 대리석 아치와 십자형 기둥을 규칙적으로 반복 사용해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직선과 곡선의 조화가 아름답다. 제1전시실에는 정약용의 저서가 많이 전시되어 있다. 실학 사상을 담은 저술 154권 76책으로 구성된 『여유당전서』와 고을 수령의 백성에 대한 도리를 적은 『목민심서』, 지인들과 나눈 친필 서간첩 『매옥서궤』 등이다. 또한 천주교 포교와 박해에 관련된 유물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정약종이 쓴 순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정하상이 천주교 교리의 정당성을 알리려고 우의정에게 쓴 편지인 『상재상서』 등이 있다.



이와 함께 순교자를 기리는 현대 작가들의 작품들도 이곳에 있다. 무명 순교자 지석을 상징하는 백자를 수십 개 늘어놓아 무덤을 형상화한 최지만 작가의 ‘순교자의 무덤’, 헌종의 ‘척사윤음’으로 박해받은 신자들을 유리 너머의 빛으로 표현한 손승희 작가의 ‘척사윤음’ 등이 유물들과 함께 어우러져 조선 후기의 인문학과 종교적 분위기를 추측할 수 있게 해 준다.

제2전시실에는 서소문 밖 네거리의 역사 유적지 공간의 특성과 역사성을 보여 주는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내용을 시각적 콘텐츠로 만들어 관람객들이 이해하기 쉽게 전시해 놓았다. 조선 후기 서소문 밖 네거리의 장소적 의미를 알 수 있는 문헌들, 남대문 전투의 기록을 담은 뮈텔 주교의 일기 등을 보고 있노라면 18세기 조선 사람들의 생활상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곳은 콘솔레이션홀과 하늘광장이다. 이 땅에서 죽은 이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공간이란 뜻의 콘솔레이션홀은 철제 매시 패널을 위에서 사각으로 내리고, 안쪽에 스크린을 통해 미디어 아트를 상영한다. 앞쪽 무대 가운데 순교 성인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어 이곳에서는 시종 음악이 울려 퍼진다. 겸재 정선의 ‘금강내산전도’를 비롯해 콘크리트 벽의 단면, 파도치는 바다, 숲 영상에 이어 스테인드글라스의 성화가 이어지는 40여 분의 미디어 아트를 보면서 앉아 있다 보면 자연스레 고요한 명상의 바다에 빠져든다. 박물관의 어느 공간보다도 이 장소의 의미를 진지하게 전달하는 곳이다. 이곳에 들르면 최소한 10분 이상 앉아서 조용한 시간을 가져 보기를 권한다.

지하 3층에 있는 박물관 가운데 하늘광장이 있다. 말 그대로 중정처럼 생긴 정원으로, 고개를 들면 네모난 하늘이 보인다. 사방을 붉은 벽돌로 촘촘히 쌓아 올린 공간 안에 사람 모양의 목조각품이 도열해 있다. 기찻길 침목을 일으켜 세워 44명의 순교 성인을 표현한 정현 작가의 ‘서 있는 사람들’이다. 반대편에 길쭉하게 하늘로 솟은 이환권 작가의 ‘영웅’과 대비되어 두 작품을 보러 오는 관람객이 많다.

하늘광장 옆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어둑한 경사로가 이어진다. 하늘길이다. 걷다 보면 빗방울이 떨어져 퍼지는 영상이 시작되며 빗방울이 파도로 바뀌어 상념과 고통을 씻어내듯 파도가 내려온다. 거대한 파도가 잦아들면서 길 끝에서 잔잔한 빛이 드러나면서 빛이 이어져 길이 만들어지고, 그 길을 따라 가도록 한다. 하늘길의 두 번째 미디어 아트인 ‘좁은 문으로’는 첨단 멀티 프로젝션 매핑과 입체 사운드 스케이프 기술이 적용된 작품이다. 특히 50여 개의 스피커 모듈로 구성된 음향 시스템이 더욱 정교한 서라운드 효과와 몰입감을 느끼게 해 준다.

전체를 다 돌아보고 나오면 박물관을 본 것이 아니라 순례자의 길을 걸은 듯한 느낌이 든다. 건축적으로 동선을 설계할 때 고려했던 부분일 것이다. 장소의 상징성을 건축으로 잘 녹여낸 공간이다. 굳이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도 세상이 시끄러울 때 들러서 조용히 둘러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성스럽고 아름다운 약현성당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의 서쪽 언덕 위에 조선 최초의 서양식 성당인 천주교 중림동 약현성당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으나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약현성당은 의미 면으로나 교회 건축사 면으로나 큰 의미가 있는 곳으로 사적 제252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천주교 박해 당시 수많은 교인의 참형지였던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지’와 숭례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해있다.

제7대 조선 대목구장이던 블랑 주교는 1887년 수렛골(현 중구 순화동)에 한옥을 구해 교리 강습소로 이용하다가 교세가 빠르게 증가하자 새로운 본당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약현본당 초대 주임 신부인 카밀 두세 신부는 교회의 전통에 따라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서소문 밖 성지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성당을 지을 것을 건의했다. 훗날 명동성당을 설계한 외젠 코스트 신부가 설계를 맡아 1891년에 착공했다. 견고한 성당을 짓기 위해 좋은 품질의 흙을 구하다가 왕궁의 기와를 굽던 와서현 흙을 찾았는데, 알고 보니 이곳은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남종삼 성인과 최형 성인의 시신이 40여 년간 묻혀 있던 곳이었다. 그 흙으로 벽돌을 직접 만들어 쌓아 지은 것이 약현성당이다. 즉 순교 성인의 살과 피로 세워진 성당이고 서소문 형장이 사시사철 내려다보이는 성당이기에 한국 천주교에서 약현성당의 무게가 클 수밖에 없다.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도 여기에 있다. 교회 건축사 면으로도 그렇다. 약현성당은 우선 아름답다. 그저 하늘로 높이 치솟기만 하는 유럽의 고딕 양식 성당들과 달리 약현성당은 고딕적 요소가 적은 단순한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외양은 폭 12m, 길이 32m의 붉은 벽돌 벽에 26m의 뾰족 첨탑과 지붕 그리고 세로로 길게 난 유리창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내부 공간은 양쪽에 늘어선 기둥에 의해 3개 열로 구분되는 삼랑식 평면 구성이다.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성스러운 분위기는 줄지어 늘어선 8각 돌기둥과 성단 뒤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성스럽게 들어오는 화려한 빛 덕분이다. 돌기둥은 위로 올라가면서 벽돌로 만든 아치와 짙은 갈색의 나무 장식으로 균형을 이루고, 그 위로 천장까지 올라간 갈빗대 모양의 뼈대가 뾰족한 궁륭 천장을 이룬다. 양옆의 창은 반원형이면서 윗부분이 뾰족한 아치 형태이다. 바닥은 원래 마루였다는데 지금은 돌로 되어 있다. 1900년 이전의 서양식 건축물 중 일본을 통하지 않고 서양인이 직접 설계했다는 점에서 명동대성당과 함께 한국 근대 건축물로서 가치가 있어, 수많은 건축학도들이 카메라를 들고 이곳을 찾곤 한다.

▶국내 최초의 주상 복합 아파트, 성요셉아파트


약현성당 바로 옆에 기다란 건축물이 있다. 성당과 담을 같이하는 셈인데 출입구는 반대편 골목이다. 이 아파트가 회자되기 시작한 건 아파트 덕후들 덕분이다. 우리나라 아파트 건축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1층에는 상가가, 2층부터는 주거 공간이 들어선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 복합 아파트가 이곳이라고 소개한다. 서울특별시가 중림동을 도시 재생 사업 대상 지역으로 선정하면서 성요셉아파트 인근에 변화의 바람이 분 것도 한몫했다.

건축가 황두진의 저서인 『가장 도시적인 삶』에 이 아파트가 요즘 아파트와는 여러모로 다른 이유들이 나와 있다. 첫째, 우리가 집을 볼 때 우선시하는 남향이 아니라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북향 아파트라는 점이다. 이는 준공 당시 발주자인 약현성당 측에서 가능하면 성당이 덜 보이게 해달라고 했다는데, 복도의 창문이 유난히 높게 자리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둘째는 경사지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요즘 아파트 단지를 개발할 때 첫 작업은 지면을 평평하게 하는 것인데, 이 아파트는 기존의 경사진 땅을 따라 100여 m를 길게 지어 올렸다. 국토의 70%가 산인 나라에서 이처럼 경사지를 잘 이용해서 지형에 순응한 건축이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예전에는 1층이 방앗간, 청과상, 생선 가게 등 생필품 가게로 즐비했던 이곳에 요즘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젊은 사장님들의 로스팅 카페와 아이디어 좋은 크리에이터들의 공방 등이 하나둘 생기는 중인데, 기존 상가와의 조화를 고려해 튀지 않는 모습으로 서서히 상가 분위기를 바꾸고 있다. 게다가 아파트 입구 쪽 맞은편 중림창고가 서울시의 도심 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복합 문화 공간으로 새단장하면서 아파트 앞 골목에 도시 재생이나 건물 리뉴얼, 창업 등에 관심을 가진 의식 있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점점 늘고 있다.

▶문화 콘텐츠 체험 공간, 어반스페이스오디세이USO


중림동 언덕은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 김기찬이 30년 넘게 찍어 온 골목 사진의 촬영 장소로 지금까지 1970년대 우리네 삶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50년의 세월도 비껴간 듯한 이 언덕에 요즘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변화의 시작은 중림창고였다. 40여 년 전에 불법으로 지어 창고로 쓰이던 곳을 서울시가 사들여 서울 도시재생 사회적협동조합과 함께 ‘서울로7017 주변 도시재생 사업’을 위한 앵커 시설 중 하나로 리뉴얼한 것. 저층 주택이 많은 주변에 위화감을 주지 않기 위해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해서 좁고 긴 지형에 맞춰 45m 길이의 기차 같은 형태로 건물을 새로 지었다.

2019년에 완공된 이 중림창고의 운영을 남성지 『아레나ARENA』의 전 편집장 박지호 씨가 수장인 USO가 맡았다는 게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USO는 ‘도시(Urban)를 기반으로 공간(Space)을 캔버스 삼아 각종 콘텐츠를 여행(Odyssey)한다’는 콘셉트의 문화 콘텐츠 집단이다. 서울의 옛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중림동에서 ‘박지호의 심야살롱’ 같은 양질의 세션 프로그램과 공간에 구현한 감도 높은 전시를 통해, 도시적이며 세련된 감각을 지닌 다양한 체험형 콘텐츠를 스페이스 매거진 형태로 펼쳐 나갈 예정이다. 또한 도시인들의 미의식을 자극하고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콘텐츠 큐레이션 플랫폼 ‘도시서점’을 통해 서울을 테마로 한 다양한 제품들을 개발하고 있다.

4월 오픈을 목표로 준비 중인 이곳에는 지나던 주민들이 들어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소식을 듣고 일부러 찾아온 이들이 서점에서 느긋하게 책도 구경하며 중림동의 사랑방으로, 지역 주민과 관람객들의 소통 공간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글과 사진 신혜연(헤이컴 대표, 콘텐츠 기획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21호 (20.03.24)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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