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2 (금)

이슈 우리들의 문화재 이야기

美서 또 돌아온 국새… 고종은 왜 어보를 99개나 만들었을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쇠락한 왕권·정통성 강화하려 어보를 끊임없이 제작한 고종

대부분 6·25전쟁 겪으며 사라져… 오늘부터 고궁박물관서 공개

조선왕실에서 어보(御寶)를 가장 많이 만든 왕은 누구일까. 정답은 고종. 재위 기간 무려 99점의 어보를 제작했다. 국새가 대내외 각종 공문서에 사용한 도장이라면, 어보는 왕과 왕비의 덕을 기리거나 사후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만든 의례용 도장. 서준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어보를 계속 만든다는 건 그만큼 시대 상황이 안 좋았다는 뜻"이라며 "고종은 쇠락한 왕권을 강화하고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어보를 끊임없이 제작했다.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신정왕후(효명세자빈·1808~1890)에게는 1년에 한 점 이상 어보를 만들어 바쳤다"고 했다. 반면 세종의 어보는 아들 문종이 시호를 올려 제작한 '세종시호금보(世宗諡號金寶)' 한 점뿐이다.

고종은 국새도 20여 점 만들었다. 1882년 고종은 청나라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 외교를 하겠다며 새 국새 3점을 만들라고 명한다. 각각 '대군주보(大君主寶)' '대조선국대군주보(大朝鮮國大君主寶)' '대조선대군주보(大朝鮮大君主寶)'란 이름이 붙었다. 새 도장을 법률·칙령·관료 임명 등 여러 공문서에 찍었지만, 나라가 망하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조선일보

1882년 고종이 제작한 국새 ‘대군주보’(왼쪽). 몸체 뒷부분에 미국인 이름이 적혀 훼손된 상태(오른쪽)로 돌아왔다. /문화재청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라졌던 국새와 어보가 또 미국에서 돌아왔다. 문화재청은 "고종이 자주 외교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만든 '대군주보'와 1740년 영조가 선왕 효종을 기려 만든 '효종어보'를 지난해 12월 재미교포 사업가 이대수씨로부터 기증받았다"며 19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실물을 공개했다. 대군주보는 높이 7.9㎝, 길이 12.7㎝이며 은에 도금을 했다. 몸체 뒷부분에 'WB. Tom'이라는 서양 이름이 새겨져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국새가 미국에 유출됐을 때 손에 넣은 사람이 자신의 소장품임을 알리려 이름을 새긴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조선시대 국새와 어보는 모두 412점이 제작됐으나 73점은 여전히 행방불명 상태다. 해방 이후 9차례에 걸쳐 국새 7점과 어보 9점이 미국에서 돌아왔다. 서준 학예사는 "분실된 국새·어보 대부분이 6·25전쟁 때 사라졌기 때문"이라며 "혼란을 틈타 미군이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대수씨는 대군주보와 효종어보를 1990년대 후반 경매를 통해 구입했으나 도난 문화재라는 걸 알고 기증을 결심했다고 한다. 문화재청은 "그동안 국새나 어보는 한·미 당국의 압수 같은 강제적 방식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엔 소유자 스스로 기증을 결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했다. 문화재청은 20일부터 3월 8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두 점을 일반에 공개한다.





[허윤희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