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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화)

이슈 양승태와 '사법농단'

첫 사법농단 판결 무죄 배경엔 “언론 보도·검사 추궁에 위축돼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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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사건으로 기소된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53)에게 13일 1심 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배경에는 ‘검찰 조서’에 대한 엄격한 판단이 있었다. 법원은 사법농단 사건에 대한 국민적 관심 및 언론 보도와 검사의 추궁 때문에 압박을 받는 상태에서 유 전 연구관이 어쩔 수 없이 허위 진술을 했다며 이 진술을 담은 조서는 증거로 쓸 수 없다고 했다.

25년을 법관으로 재직하며 형사사법절차에 해박한 유 전 연구관의 진술을 아예 증거에서 배제하는 게 맞느냐는 반박도 나온다. 검찰은 항소하겠다면서 재판부의 이 부분 판단이 잘못됐다고 짚었다.

■“압박 속 피의자 진술 증거로 못 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8부(재판장 박남천)가 유 전 연구관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결문을 분석해보면, 재판부는 여러군데서 검찰 조서를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형사재판에서 유죄의 증거로 사용하려면 적법 절차에 따라 수집되는 등 자격(증거능력)을 갖춰야 한다.

재판부는 우선 유 전 연구관의 검찰 피의자신문조서 내용 일부를 증거로 쓸 수 없다고 했다. 유 전 연구관의 피의자신문조서에는 유 전 연구관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측근 박채윤씨 소송 관련 정보가 담긴 ‘사안요약’ 문건을 임 전 차장 요청에 따라 재판연구관에게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진술한 내용이 담겨있다. 유 전 연구관은 재판에 와서는 자신은 문건 작성에 관여하지 않았다며 이 진술을 부인했다.

형사소송법은 특별히 신빙할 만한 상태(특신상태)에서 진술했다는 점이 확인되면 피의자신문조서를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재판부는 유 전 연구관이 법관 출신인데다가 조사 과정에 변호인이 참여했으며 휴식 시간을 보장받았고, 조서를 읽고 서명한 뒤 이의제기도 하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같은 사실만으로는 유 전 연구관 진술이 공판중심주의 내지 실질적 직접심리주의에 대한 예외(특신상태)로 평가할 수 있는 정도로 허위개입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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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 13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법원 청사에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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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그렇게 보는 근거로 사법농단 사건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언론 보도, 검사의 집요한 추궁 등을 들었다.

재판부는 “(유 전 연구관에 대한) 피의자신문 당시 대법원의 청와대와의 재판거래 의혹에 국민적 관심이 집중돼있어 연일 많은 기사가 보도되고 있었다”며 “법원 관계자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 청구가 수차 기각돼 사법부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했다”고 했다. 재판부는 “다수의 취재기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포토라인을 통과해 공개소환에 응한 유 전 연구관으로서는 조사 당시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위축된 상태였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재판부는 “사안요약 문건에 기억이 없다는 진술에 대해 검사가 집중 추궁하자 즉석에서 일일이 적절하게 반박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유 전 연구관이) 결국 검사 질문에 포함된 전제사실에 부합하는 듯한 진술을 해줌으로써 조사에서 벗어나려고 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했다.

재판부는 언론에서 사안요약 문건이 청와대로 유출됐다고 보도해 유 전 연구관이 이를 기정사실로 착각한 상태에서 진술했을 수 있고, 검찰의 집요한 추궁이 피의자신문조서에는 기재되지 않았다고도 했다. 재판부는 “(유 전 연구관이) 다수의 압수수색 영장 청구와 비난성 보도 및 공개소환 등으로 심리적으로 매우 위축된 상태에서 오도될 수 있는 정보들에 영향을 받고, 암시적이고 반복적인 질문에 유도돼 사실과 다르게 진술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재판부는 피의사실 공표와 공개소환 등 검찰 수사가 ‘총체적 위법’이라 공소 자체를 기각해야 한다는 유 전 연구관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검찰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판단하는 데 엄격한 잣대를 적용했다. 검찰 피의자신문조서를 진술의 신빙성 차원이 아니라 증거능력 차원에서 배척한 것은 이례적이다. 고위 법관 출신으로 수사 절차와 법리를 잘 알고 있는 유 전 연구관이 언론 보도와 검사 추궁에 허위 진술했다는 재판부 판단에 수긍하기 어렵다는 반응도 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검찰 조사 때 심리적 위축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법원이 스스로 법원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을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독 이 사건에서 엄격하게 봤다는 의심은 지울 수 없다”이라고 했다.

■“2015후2204는 되고 2204는 안된다”

재판부가 이 사건에서 참고인인 이수진·맹현무 판사의 검찰 조서에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대목도 있다.

재판부는 검찰이 유 전 연구관의 변호사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면서 유 전 연구관 컴퓨터에 박채윤씨 소송의 사건번호인 ‘2015후2204’나 ‘15후2204’가 아니라 ‘2204’를 넣어 검색한 뒤 모니터 화면을 촬영한 사진이 위법 수집 증거라고 했다.

법원이 당시 발부한 압수수색 영장에 ‘2204’도 검색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지 않아 영장주의 위반이라는 것이다. 또 재판부는 영장에 기재된 혐의는 박씨 소송 관련인데 검찰이 사진을 유 전 연구관의 재판연구관 검토보고서 유출 혐의를 입증하는 증거로 제출한 것도 문제라고 했다. 재판부는 “수사기관의 자의적인 강제처분에 대한 법관의 사법적 통제를 무시하는 행위”라며 “절차 위반행위가 중대해 적법절차의 실질적인 내용을 침해하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했다. 검찰은 법원이 압수수색 영장에 ‘2015후2204’나 ‘15후2204’를 검색하라고 기재한 것은 사건번호를 검색하라는 차원에서 예시를 든 것일 뿐이고, 검찰의 포렌식 프로그램 기능상 ‘2204’를 검색 단어에서 빼면 수색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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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1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시민사회 각계 원로들이 사법농단 해결과 사법적폐 청산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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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나아가 이 사진을 기반으로 한 이·맹 판사의 진술, 즉 ‘2차적 증거’까지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검찰이 이·맹 판사를 참고인으로 조사하면서 사진 자체나 사진에 들어있는 정보를 활용했다는 게 이유다. 맹 판사나 법원행정처가 제출한 자료 등도 같은 이유로 모두 증거에서 배제됐다.

검찰은 사진 촬영이 위법할지라도 검사가 유 전 연구관 사무실에서 유출된 재판연구관 검토보고서를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수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 이 진술들의 증거능력이 부인되면 사법농단 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이 어려워진다고도 했다.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검찰이 제출한 여러 증거들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유 전 연구관은 무죄가 나왔다.

전체 112쪽 분량의 유 전 연구관 판결문 중 유 전 연구관 행위가 사실로 인정되는지, 범죄가 성립되는지 등 실체 판단 관련 내용은 38쪽에 불과하다. 재판부는 61쪽에 걸쳐 검찰 수사에 절차적 위법이 있는지를 따졌다. 이 재판부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 차장 사건도 심리하고 있다. 주심이 유 전 연구관 사건은 심판 판사이고, 양 전 대법원장 사건은 이원식 판사다.

유 전 연구관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공모해 대법원 재판연구관에게 박근혜 전 대통령 측근 박채윤씨 소송 관련 정보를 정리해 문건으로 만들게 하고, 이 문건을 청와대로 유출한 혐의(직권남용·공무상 비밀누설)를 받았다. 판사를 그만두면서 대법원 재판연구관 검토보고서를 갖고 나온 혐의(절도·개인정보보호법 및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와 대법원에 근무할 때 취급했던 숙명학원 사건을 퇴직 후 변호사로서 수임한 혐의(변호사법 위반)도 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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