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20일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한국당을 제외한 여야4당의 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법 강행 처리와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파기를 저지하겠다는 것이다. 황 대표는 이날 "목숨을 걸겠다"고도 했다. 정치 입문 9개월만에 삭발에 이어 단식 투쟁에 들어간 황 대표에 대해 당내에선 제1야당 대표로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총선을 5개월 남겨둔 상황에서 보수대통합과 당내 인적 쇄신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보다 대여(對與) 투쟁을 통해 국면을 전환하려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20일 오후 청와대 앞에서 국정 대전환을 촉구하는 단식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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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 "지소미아 파기, 공수처법·선거법 개정 목숨 걸고 막겠다"
황 대표는 이날 단식 농성에 들어가기 앞서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입장문을 발표하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지소미아 파기 철회,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포기,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 철회를 요구한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가 종료를 결정한 지소미아는 극적인 입장 변화가 없으면 23일 0시를 기해 파기된다. 또 더불어민주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한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 설치법안의 국회 본회의 부의를 조만간 강행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한국당 의석 수는 과반에 턱없이 부족한 108석. 민주당이 범여권 야당 3곳과 연대해 밀어붙일 경우 국회 내에서 한국당이 이를 막을 뾰족한 방법은 없는 상황이다. 황 대표가 단식 농성 카드를 뽑아든 것은, 이런 현실적 제약 속에서 돌파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란 게 황 대표 측근들의 설명이다.
실제로 황 대표는 한두달 전까지만 해도 주변에 "단식 투쟁을 해서라도 선거법·공수처법 강행처리를 막을 수 있다면 하겠다"면서도 실제 단식에 들어가는 것에는 신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달 들어 주변에서 "문 정권의 독주를 제1야당 대표답게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는 건의가 많이 들어왔고, 황 대표도 "정치 생명을 걸겠다"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개천절이었던 지난달 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정부 규탄 집회에 수십만의 대규모 군중이 집결한 것도 황 대표에게 "반드시 지소미아 파기와 선거법·공수처법 처리를 막으라"는 압박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복합 도전 맞은 黃, 돌파구 만들 수 있을까
그러나 황 대표를 둘러싼 정치 환경은 대여 투쟁만으로 해결하기 쉽지 않은 복잡한 상황이다. 황 대표는 지난 6일 보수 대통합 추진을 전격 선언했지만 통합 대상으로 꼽은 유승민 의원 등은 황 대표 측의 협의체 구성 요구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 사이 황 대표가 여의도연구원장으로 임명한 김세연 의원은 한국당을 "존재 자체가 민폐인 좀비 정당"이라 비판하며 황 대표의 퇴진을 포함한 인적 쇄신을 요구하고 나왔다.
황 대표도 평소 "모든 것을 다 바꾸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그러나 그를 당 대표로 밀어올린 당내 다수파인 친박계는 무조건적인 용퇴 요구에 반발하고 있다. 이럴 경우 당 대표의 정치력으로 이들을 설득하거나, 끝내 납득하지 않으면 결별을 각오하고 정면돌파하는 게 정치권에서는 정석(定石)으로 꼽힌다. 그러나 황 대표 참모그룹의 한 인사는 "황 대표가 정석을 몰라서가 아니라 당내 세력 기반이 견고하지 않다보니 결단이 쉽지 않은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 때문에 황 대표의 단식 돌입을 두고 진영 내부에서 밀려오는 리더십에 대한 도전을 우회 돌파하기 위해 대여 투쟁 카드를 뽑아든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한국당의 한 중진 의원은 "조국 전 장관 사태 때처럼 지소미아·선거법·공수처법을 매개로 대여 투쟁 전선을 침으로써 복잡한 진영 내부의 혼란을 봉합할 시간을 벌자는 뜻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른 한 의원은 "황 대표가 정치적 준비가 덜된 상황에서 보수 통합 추진을 선언해 야권 내 주도권을 오히려 유 의원 측에 내주고 당내 쇄신 요구까지 불거져나오는 등 리더십의 약화를 자초한 측면도 있다"고 했다.
황 대표가 지난 9월 삭발에 이어 감행한 단식 투쟁이 의도한 성과를 낼 수 있을지를 두고는 정치권의 의견이 엇갈린다. 황 대표 단식을 찬성하는 쪽에서는 "눈앞에 다가온 지소미아 파기가 현실화돼 후폭풍이 가시화할 경우 현 정권에 대한 여론의 역풍이 불 공산이 크다"며 "지소미아 종료가 극적으로 유예 또는 철회될 경우에도 황 대표로선 단식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선거법·공수처법 처리 문제도 범여권 성향 야당 내부는 물론 민주당 안에서도 지역구 의원들을 중심으로 반발 기류가 있어 황 대표가 승부수를 던진 것이란 말도 나온다. 한국당의 한 의원은 "보수 개혁을 주장해온 바른정당계에서 대여 투쟁을 위해 아스팔트에 제대로 나선 적이 있느냐"며 "황 대표가 이번 단식 투쟁을 통해 야권 내 지도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반면 한국당 내 일각에선 황 대표 단식 농성이 불기피한 선택이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는 우려 목소리도 나온다. 한 수도권 중진 의원은 통화에서 "국가적 중대사인 지소미아, 선거법·공수처법 문제를 명분 삼아 단식 투쟁에 나선 심정은 헤아릴 수 있다"면서도 "다만 좁게는 한국당 내부 혁신, 넓게는 보수 진영 재편 요구에 대한 비전을 내놓지 못한다면 국면 회피용 단식이란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당내 일부에서는 황 대표의 삭발 때는 조국 전 장관과 그 가족의 비리 의혹이 겉잡을 수 없이 불거지면서 투쟁에 동조하는 여론이 꽤 있었지만 이번 단식 농성은 사정이 좀 다르다는 말도 나왔다. 한 한국당 관계자는 "조국 사태 때는 전선이 구체적이고 분명했지만 황 대표가 단식의 명분으로 삼은 지소미아나 선거법·공수처법은 그 중요성에 비해 일반 국민들이 심각성에 둔감한 느낌도 있다"면서 "황 대표가 단식을 통해 민심을 돌린다면 성공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정치적 모험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김보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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