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보수당 내각에 자주 반기, '노딜 브렉시트' 못하게 방어
트럼프 英의회 연설도 무산시켜
존 버커우 영국 하원의장이 21일(현지 시각) 런던 의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날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EU와의 브렉시트 합의안 표결을 거부해 ‘노딜 브렉시트’ 가능성에 제동을 걸었다. /AP 연합뉴스 |
오는 31일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단행하려는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의 시도가 사실상 무산됐다. 영국 하원은 22일(현지 시각) 브렉시트 이행 법률을 집중 심리해 사흘 만에 처리하는 '신속처리 계획안(programme motion)'을 찬성 308표, 반대 322표로 부결했다. 존슨 총리가 31일 브렉시트를 시행하려면 서둘러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졸속 처리할 수 없다는 반대 의견을 넘지 못했다.
존슨 총리는 지난 7월 말 취임 이후 브렉시트를 향해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렸다. EU와 구체적인 합의 없이 결별하는 '노딜'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으로 영국 사회에 '브렉시트 공포감'을 고조했다. 하지만 브렉시트 정국의 주요 고비마다 존슨의 폭주에 제동을 건 인물이 있다. 입법부 수장인 존 버커우 하원 의장이다. 보수당 출신으로 2009년 의장에 오른 버커우는 친정인 존슨 내각에 번번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존슨이 EU와 만들어온 브렉시트 합의안을 지난 19일 의회 표결에 부치지도 못한 것도 버커우 때문이었다. 버커우는 브렉시트를 구체적으로 이행하는 법률을 먼저 통과시킨 뒤 마지막에 합의안을 통과시켜야 '노딜'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무소속 올리버 레트윈 의원의 주장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였다. 레트윈의 수정안이 의회를 통과하면서 존슨은 합의안을 표결에 부치지도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존슨은 합의안 통과가 가능할 정도의 의석을 확보했다고 판단하고 21일 의회 표결을 재시도했다. 이 역시 버커우에게 막혔다. "똑같은 법안을 이틀 만에 다시 다룰 수 없다"는 의사 운영 원칙을 들었다. 존슨은 할 수 없이 브렉시트 이행 법률을 먼저 통과시키기로 방침을 바꿔 '사흘 내 초단기 심의' 계획안을 상정했다. 버커우는 22일 이 계획안을 표결에 부쳤지만, 이번엔 의원들이 '졸속 심의'를 거부했다.
존슨에 대한 견제용으로 의회가 마련한 '노딜 방지법'도 사실상 버커우의 손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존슨은 9월 초 5주간 의회를 정회(停會)하겠다고 발표했다. 의회의 브렉시트 논의 자체를 차단하기 위해 아예 의회 문을 닫는 '꼼수'를 부린 것이다. 버커우는 의사 일정을 임시로 늘렸고, 임시 일정 기간에 '브렉시트 합의안이 의회를 통과하지 못하면 EU에 연기해달라는 서한을 총리가 보내야 한다'는 노딜 방지법이 만들어졌다. 존슨은 줄곧 "EU에 연기를 요청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결국 '노딜 방지법'을 준수해 지난 19일 연기 요청 편지를 보내야 했다.
버커우는 정파를 떠나 의정을 이끌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친정인 보수당에서는 버커우에게 불만을 품고 퇴임하는 하원 의장에게 귀족 작위를 주는 관례를 없애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버커우는 230년 만에 귀족 작위를 못 받는 하원 의장이 될 처지에 놓였다. 반면 지난달 버커우가 10월 31일 의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밝혔을 때 야당 의원들은 기립 박수를 쳤다.
버커우는 의회정치의 발원지인 영국 하원의 자존심을 지키려 애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6월 영국 방문 때 의회 연설을 추진했지만 거부했다. 그는 "(트럼프의) 인종주의와 성차별이 우리의 가치와 맞지 않는다"고 했다. 버커우는 2015년 시진핑 중국 주석이 영국 의회에서 연설했을 때는 면전에서 "중국이 도덕적 영감을 주는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버커우는 최초의 유대계 영국 하원 의장이다. 조부모가 루마니아에서 영국으로 이주했고, 그의 아버지는 택시 기사였다. 작가 마이클 디컨은 텔레그래프 기고문에서 "임기 막바지인 버커우가 마지막까지 원칙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파리=손진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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