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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돼지 전염병이 아시아를 습격했다. 백신도 치료약도 없다.
1921년 아프리카 케냐에서 처음 발견된 아프리카돼지열병(ASF·African Swine Fever)은 아시아에선 낯선 전염병이다. 돼지가 걸렸다 하면 20여 일 만에 거의 100% 죽는다. 지난해 8월 중국 북부 랴오닝성을 시작으로 중국 전역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처음 당하는 몹쓸 병이라 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겨우 7개월 사이 홍콩을 포함한 중국을 완전히 오염시켰다. 올해에는 국경을 넘어 몽골과 베트남, 캄보디아에 이어 북한까지 거침없이 뚫고 들어갔다. 베트남에선 2~4월 석 달 만에 200건 이상 발병이 확인됐다.
“중국 다음은 타이와 한국”
“중국은 이미 아프리카돼지열병을 토착 전염병으로 안고 살아가는 나라가 됐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그 충격은 세계 양돈 산업의 대격변을 예고한다. 중국은 지금까지 9억~10억 마리에 이르는 전세계 돼지의 절반을 공급해왔다. 돼지고기를 압도적으로 많이 소비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미국 농무부는 “중국 사육 돼지가 올해 말 3억5천 마리로 1억 마리 이상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본다. 실제로 사육 두수가 줄면서 중국에서 수입하는 돼지 사료와 약품량은 아프리카돼지열병 발병 후 각각 20%, 30% 격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유럽 선물시장의 돼지고깃값은 최근 두어 달 사이 20% 이상 치솟았다.
“아시아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 발생 가능성이 가장 큰 다음 나라는 타이와 한국이다.” 최근 한국을 찾은 세계동물보건기구(OIE) ASF표준연구소의 호세 마누엘 산체스 비스카이노 소장이 경고했다. 가장 위험한 바이러스 전파 매개체는 “북한에서 내려오는 야생 멧돼지”다.
산체스 소장의 경고 며칠 뒤인 5월31일, 북한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 1건 발병을 공식 확인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중국 접경지역인 자강도 우시군의 협동농장에서 돼지 99마리 중 77마리가 폐사했고 나머지 22마리는 도살 처분했다는 내용이었다. 6월5일 <노동신문>엔 ‘아프리돼지열병의 위험성과 전파를 막기 위한 방도’라는 기사가 실렸다.
북한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해 보인다. 북한의 검역 사정에 밝은 관계자는 “아프리카돼지열병이 5월 말 1건 발생했다고 보고했지만, 석 달 전인 2월에 이미 발생했고 평안남도나 개성까지 퍼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현지 소식통의 말을 전했다. 신의주와 함경남도, 평안북도 구성시, 평안남도 등에서 살림집 돼지가 열병에 죽거나 소독약을 뿌리는 모습이 포착됐다는 일부 보도도 있었다. 산체스 소장을 비롯한 국내외 전문가들 또한 “북한으로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가 서너 달 전에 침투했고 이미 비무장지대까지 내려왔을 것”이라는 관측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보자.
첫 번째 질문, 우리는 아프리카돼지열병을 국경과 휴전선 바깥에서 막아낼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구멍이 많아 현실적으로 막아내기는 매우 어렵다.” 국내외 전문가의 의견을 종합하면 대략 이런 결론으로 모인다. 큰 구멍은 셋이다.
산체스 소장이 걱정한 북한 멧돼지가 첫 번째 위험 요소다. 구제역과 달리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가 공기나 호흡으로 전파되지 않는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사람의 몸에 묻어 전파된 사례도 없다. 도드람양돈농협의 정현규 동물병원장은 “아프리카돼지열병은 피에 묻은 바이러스로 전파된다는 점에서 전파 경로가 뚜렷하고, 구제역보다 오히려 통제가 쉽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에서 감염된 야생 멧돼지가 접경지대를 넘어오는 것을 막을 방도는 쉽지 않다. 돼지 농장으로 기어 들어온 멧돼지의 똥을 통해 전파되거나, 멧돼지와 농장 돼지가 싸우다 피를 흘리기도 한다. 농림축산식품부 쪽은 “철책이 멧돼지를 어느 정도 막아줄 것”을 기대하지만 전문가들 의견은 분분하다. 멧돼지가 강인해서 철책 아래를 파고들 수 있고, 무엇보다 강이나 바다에서 헤엄을 잘 친다는 점 때문에 걱정한다.
일찌감치 아프리카돼지열병을 겪었던 유럽에서도 방역의 가장 큰 적은 야생 멧돼지였다. 그래서 유럽 돼지 농장에선 이중 펜스(울타리)를 설치하는 것이 상식으로 굳어졌다. 전국 4천 개가 넘는 우리나라의 돼지 농가 중 펜스 1개를 설치한 농장도 겨우 64개에 불과하다. 산체스 소장은 “이중 펜스 설치”를 거듭거듭 강조했다.
“유럽선 멧돼지 막으려 이중 펜스”
방역의 두 번째 구멍은 공항과 항만이다. 그중 중국과 왕래가 잦은 항만을 더 경계해야 한다. 수많은 여행객이 갖고 들어오는 돈육(돼지고기)제품이나 배 안에서 먹다 남긴 음식물 속의 돼지고기 유통을 100%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들어오는 여행객의 물품을 엑스레이나 탐지견으로 검사하지만, 지금 인력과 예산으로는 전수조사가 불가능하다. ASF표준연구소에 따르면, 돈육제품 속 적혈구에 붙은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는 냉장 상태에서 110일, 냉동 상태에서는 1천 일, 섭씨 4도 혈액 속에서는 18개월까지 살아 있다 한다. 지난 4월 일본에서는 중국에서 가져온 소시지에서 살아 있는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가 검출되기도 했다.
대형 급식소의 남은 음식물을 가져와 사료 대신 먹이는 관행도 우려를 낳는다. 섭씨 80도 이상에서 30분 이상 충분히 살균해야 하나 현실적으로 잘 지켜지지 않는다. 고기 속 바이러스가 돼지 몸속에 들어가서 활개치게 된다. 환경부는 남은 음식물 급여를 일부 제한하는 방안을 추진하지만, 카라 같은 동물보호단체와 한국한돈협회 등에서는 남은 음식물 먹이는 관행을 전면 금지할 것을 요구한다.
이 밖에 우리 돼지 농장에서 일하는 대다수 노동자가 이주민이라는 점도 위험 요소다. 불법 상태로 일하는 상당수 이주노동자가 감염국의 돈육제품을 들여오는 등 방역 통제의 사각지대에 놓일 수 있다. 감염국에서 들어오는 이주노동자들은 최소 5일 이상 다른 곳에 머무르다가 농장에 들어가도록 해야 하나, 개별 농장에서 이를 지키기란 쉽지 않다.
2010년 경북 안동에서 시작한 구제역 사태를 돌아보게 된다. 당시 350만 마리의 소와 돼지를 도살했고 무려 3조원의 예산을 공중으로 날려보냈다. 처음 겪는 대규모 구제역이어서, 훈련된 방역 인력도 대규모 도살 처분 경험도 없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했다.
“도살 처분·매몰 매뉴얼 구제역과 달라”
두 번째 ‘현실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방역망이 뚫릴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병했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중국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산체스 소장은 “스페인은 1960년 아프리카 앙골라를 거쳐 들어온 아프리카돼지열병을 1995년에야 종식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무려 35년이나 걸렸지만, 백신과 치료제 없이 충실한 방역만으로도 박멸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산체스 소장은 “조기 발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최초 발병이나 두 번째나 세 번째 발병 때 확인만 된다면,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피를 통한 전파 메커니즘이 단순하고 뚜렷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의 대표 증상은 돼지의 열이 41도까지 오르고, 오한이 들어 여러 마리가 부둥켜안듯이 한 덩어리로 지내는 것이다.
정부가 아프리카돼지열병의 표준 매뉴얼을 따로 마련해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도살 처분·매몰 방식이 구제역 때와는 달라야 한다. 구제역 때처럼 도살한 돼지의 피를 처리하면 파리를 통한 바이러스의 대규모 확산을 자초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훈련된 방역 인력이 충분치 않다. 인력을 훈련하고 매뉴얼을 보완할 전문가는 더더욱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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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돼지열병의 역사
1921 케냐 →1957 유럽 →2018 중국
아프리카돼지열병은 1921년 아프리카 케냐에서 처음 발견됐다.
1957년 앙골라에서 포르투갈 리스본에 입항한 선박을 통해 처음 유럽으로 유입됐다. 선원들이 배 안에서 먹다 버린 음식물 속 돼지고기에 바이러스가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 바이러스가 돌고 돌아 농장 돼지들한테 전파됐다.
1960년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가 두 번째로 유럽에 유입됐다. 1957년과 똑같은 양태였다. 이때 들어온 바이러스는 포르투갈 국경을 넘었다. 1960년 스페인을 시작으로 프랑스·이탈리아·몰타·벨기에·네덜란드로 퍼졌다. 쿠바와 브라질·도미니카공화국·아이티 등 중남미로도 전파됐다.
2007년엔 아프리카 동부에서 유럽의 발칸으로 바이러스가 전파됐다. 역시 배를 통해 들어온 음식물 속 돼지고기가 매개체였다. 이후 바이러스는 동유럽 국가들과 러시아 전역으로 퍼졌다. 야생 멧돼지가 가장 유력한 매개체였다. 러시아에선 아프리카돼지열병이 토착 전염병으로 뿌리내렸다.
산체스 소장은 2014년 논문에서 “4~5년 뒤 중국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병할 것”을 정확히 예측했다. 중국은 러시아 돼지고기를 수입하고 아프리카 동부와 교역량이 엄청나기 때문에 바이러스 유입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주목하지 않았고, 정확히 4년 뒤 침투한 낯선 바이러스에 중국 전역이 점령됐다.
아프리카 30개국 이상, 유럽은 동부를 중심으로 17개국에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전파됐다. 아시아에선 중국에서 시작한 바이러스가 겨우 1년 만에 5개국으로 확산됐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전세계 돼지의 75%를 사육하는 나라들을 감염시킨 것이다. 1970년대에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들어온 중남미에는 최근 수년 동안 발병 사례가 나타나지 않았다.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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