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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이슈 불법촬영 등 젠더 폭력

이건 '정준영 몰카' 사건...피해자 대신 가해자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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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인터넷 포털 검색어 1위는 ‘정준영 동영상’이었다. 이날 이른바 ‘지라시’에는 여성 연예인 이름이 여럿 돌아다녔다. 어느 지라시에는 마치 동영상을 본 것처럼 상세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참다 못한 여성 연예인 소속사가 "허위 정보를 퍼뜨리면 법적 대응하겠다"고 발표했다. 11일 밤 ‘가수 정준영, 승리 등이 단체 채팅방에서 성관계 영상을 공유했다’는 이른바 ‘정준영 몰카 사건’이 보도된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은 때의 일이다.

◇20년 전, 피해자만 손가락질 받았다
20년 전인 1999년 5월, 당시 29세였던 탤런트 ㅇ씨가 TV 뉴스에 나왔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해 죄송하다" "이제부터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살려고 한다"고 했다. 당시 비디오 가격이 수십만원을 호가했다는 이른바 ‘O양 비디오’ 사건 주인공이 방송에 나와 한 말은 "죄송하다"였다.

그는 "지금으로선 여자로서 내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런 말도 했다. "정말로 좋아하고 사랑했던 여자와의 테이프였다면 없앴어야 했다" "책임을 묻고 싶다."

연예계를 떠난 것은 여성이었다. ‘그 남자’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책임을 묻는 사람도 없었다. 당시 경찰은 음란물 유통법 적용을 고민하다 "남성이 비디오를 고의로 유통시키지 않았다"며 "두 사람을 무혐의 처분했다"고 밝혔다. 당시 경찰력은 남성은 물론 피해자 여성까지 처분 고려 대상으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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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인 1999년 5월 MBC 뉴스데스크에 나온 몰카 피해자 연예인. /MBC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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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비디오’가 여럿 나왔다. 2000년 ‘B양 비디오’, 2002년 ‘L양 비디오’ 등이다. 비디오를 찍어 유포한 사람을 비난하는 소리는 ‘여자 처신’을 문제삼는 소리에 묻혔다. L양, B양 같은 여성 연예인만 광고출연이 끊기고 방송출연이 어려워졌다.

‘L양 비디오 사건’은 배우를 장악하려고 매니저가 비디오를 찍어 협박한 사건이었다. 그 매니저는 비디오 촬영및 유포에 대한 처벌 대신 ‘공갈및 협박’ 혐의로만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나마 L씨가 기자회견에서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눈물을 흘린 덕분이었다.
◇20년 만에 ‘가해자’ 이름으로 불린 성관계 영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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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정준영, 승리, 이 모 씨 등 연예인과 연예기획자 등이 카카오톡 단체카톡방에서 성관계 영상과 사진을 공유해왔다는 자료가 나왔다. 한 변호사가 휴대전화 포렌식 자료를 국민권익위에 제보했고, SBS 방송에도 알렸다.

이 변호사가 어던 경로로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자료를 받았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제보자가 사설 포렌식 업체 직원인지, 정말로 100% 믿을만한 것인지도 수사당국의 조사를 좀 봐야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행위는 다른 의미로 ‘의미’를 갖는다.

대중들이 ‘OO양 동영상’이라고 소비하기 전, 남성 변호사가 문제를 끌고 나왔다. 그는 "자료를 보고 경악했다"고 했다. 남성 가해자 이름이 먼저 밝혀지면서 일단은 "영상에 나온 여자는 누구?"식으로 ‘저급한 정보전’이 벌어지는 걸 피할 수 있었다.

사건은 피해자 이름이 아니라 가해자 이름을 붙여 ‘정준영 몰카’라고 호명됐다. 형사 처벌 대상인 몰카 영상이 유포되면서, 가해자 이름이 붙은 건 처음이다.

물론 가해자가 무명씨가 아닌 ‘정준영’이라는 유명인이었기에 그의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대중의 호기심은 결국 ‘피해자’ 탐색에 나설 것이다. 수사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12일부터 벌써 피해 여성들 이름이 떠돈다. "정준영 동영상 속 연예인 1.누구 2.누구.."식 리스트다.

20년 전부터 ‘O양 비디오’ ‘ㅇㅇㅇ 비디오’ 대신 ‘함성욱 비디오’로 불렀어야 했다. 이번 사건은 확실하게 ‘정준영 몰카 사건’이다. 20년 만에 평범한 원칙이 겨우 세워졌다. 이걸 또 허물 건가.

[박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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