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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이슈 강제징용 피해자와 소송

강제징용부터 배상까지...열일곱 소년은 아흔넷 할아버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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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한국 재판 21년…재상고심만 5년 8개월 걸려
4명 중 3명은 作故…이춘식씨 "혼자여서 눈물난다"

조선일보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일본기업이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을 내린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실에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씨가 승소 후 소감을 말하고 있다./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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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이춘식(94)씨는 당시 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의 가마이시 제철소에 끌려갔다. 식민지 조선에 살던 열일곱살 이씨는 강제징용돼 임금을 한 차례도 받지 못하고 3년여간 노역을 했다. 고(故) 여운택·신천수·김규수씨도 처지는 같았다. 이들은 당시를 "살아돌아오는 것만 해도 다행인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국가총동원법과 징용령을 바탕으로 한국인들을 노역에 동원했다. 일본 정부는 정부 직속기구로 철강통제회를 꾸렸고, 이 단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던 일본제철은 우리나라에서 노무자를 적극적으로 확충하기로 하고 정부와 협력해 노무자를 동원했다. 일본의 제철소에서 훈련을 받으면 기술을 익힐 수 있고 이후 한국에서 기술자로 취직할 수 있다는 광고도 했다. 일제는 전쟁 물자를 대는 데 노동력이 필요했다. 보국대에 지원하는 한국인들도 있었지만 시당국의 지시로 일본으로 끌려가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기술 배우고 돈 벌기 위해 떠난 일본에서 마주한 제철소 현실은 기대와는 달랐다. 이씨는 제철소에서 코오크스를 용광로에 넣고, 용광로에서 철이 나오면 다시 가마에 넣는 등의 일을 했다. 먼지가 심해 어려운 일이었다. 용광로에서 나오는 불순물에 걸려 넘어졌다가 배에 상처를 입고 3개월간 입원하기도 했다.

노역에 종사하는 동안 첫 6개월은 외출이 금지됐다. 일본 헌병들은 보름에 한 번씩 와서 인원을 점검했고, 일을 나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꾀를 부린다며 발길질을 했다. 손에 들어오는 돈은 없었다. 제철소 측으로부터 임금을 저금해준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이씨는 1944년 징병돼 군사 훈련을 마친 후 일본 고베에 있는 부대에 배치돼 미군포로감시원으로 일하다가 해방 후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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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일본으로 강제 징용된 충청남도 홍성 지역 젊은이들./조선DB(사진 제공=홍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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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이 지나서야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희망이 생겼다. 1991년 일본의 한 교수가 발표한 보고서가 시발점이었다. 도쿄 고마자와 대학 고시오 다다시 교수는 ‘연행 조선인 미불금 공탁보고서’를 한국의 강제징용 피해자 단체에 전달했다. 이 자료에는 당시 징용한국인 노무자의 명단과 이들이 받았던 급료, 고용일자, 해고사유, 개인별 미불임금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고시오 교수는 보고서에서 ‘일본 후생성이 종전직후 조선인 단체들의 배상요구를 막기위해 법무성의 전신인 사법성과 협의해, 임금과 퇴직금 적립금을 일괄 공탁토록 기업체에 지시했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 한국인 노무자 상당수가 45년 8월 해방직전까지 일본제철에 근무한 것으로 조사됐다. 국내 강제징용 피해자 모임 단체는 "생존자와 유족들을 찾아내 공탁금의 현시가 환불을 요구하는 소송을 공동으로 제기하겠다"고 했다. 일본 내 시민사회도 이들의 소송을 도왔다.

1997년 여운택·신천수씨는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현해탄 넘어 일본에서 시작된 법정 다툼이 21년이나 걸릴지는 그때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달에 한 번씩 일본에서 거리 시위를 하는 등 여론에도 호소하기도 했다.

일본에서의 소송은 1심부터 패소했다. "구일본제철의 채무를 신일본제철이 승계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을 한반도와 원고들에게 적용하는 게 유효하다는 것도 근거가 됐다. 이 판결은 항소심 법원인 오사카고등재판소를 거쳐 2003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이춘식씨는 일본에서 패소판결이 확정된 지 2년 뒤 여운택·신천수씨와 힘을 모았다. 고(故) 김규식씨도 함께였다. 일본 시민단체 ‘일본제철 징용공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도 이들을 도왔다. 이들은 2005년 서울중앙지법에 같은 취지의 소송을 냈다. 1심과 항소심은 일본 법원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일본 법원의 판결이 한국에서도 효력을 미치고, 구일본제철을 계승한 신일본제철에게 배상 책임이 없다는 취지의 판결이었다. 또 개개인별 손해배상 청구권은 있지만 배상 시효가 지났다고 봤다.

이 판결은 2012년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대법원 1부(당시 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환송했다. 여씨 등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고, 시효도 지나지 않았다는 판단이다. 또 일본 법원의 판결은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은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우리 헌법의 핵심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어서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봤다.

파기환송심도 대법원 판결 취지대로 배상 책임을 인정해 신일철주금이 여씨 등 4명에게 각각 1억원씩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에 신일철주금이 불복하며 대법원이 다시 사건을 심리했다. 그러나 신일철주금의 상고로 2013년 8월 사건을 접수한 대법원은 5년 넘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여기에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이 재판을 매개로 외교부와 거래를 했다는 정황이 최근 검찰 조사에서 밝혀지기도 했다.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오후 여씨 등 4명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재상고심에서 신일철주금이 여씨 등에게 각 1억원씩 배상하도록 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피해자 4명이 최종 승소하면서, 2005년 한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후 13년 만, 1997년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후 21년 만에 강제징용 피해에 대한 배상을 받게 됐다. 징용에 끌려간 지 70여년 만이다. 그 동안 네 할아버지 중 세 명은 죽고 이 세상에 없다.

이씨는 이날 대법원 선고 이후 이렇게 말했다. "오늘 법원에 나와 보니 나 혼자였다. 같이 있으면 엄청 기뻤을 것인데 나 혼자여서 눈물이 나오네."

[김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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