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감독이 지난 17일 국회의사당에서 본지와 만나 인터뷰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다워기자 |
[스포츠서울 정다워기자] 박항서(59)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은 이미 많은 것을 이뤘다.
박 감독이 베트남의 국민 영웅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신문과 방송, 인터넷을 보면 박 감독이 베트남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상세하게 알 수 있다. 박 감독의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현지인들에게 환영 받은 관광객 이야기도 이제 식상한 에피소드다. 불과 1년 사이 그는 ‘인생 역전’을 이뤘다. 그가 베트남행 비행기를 탈 때까지만 해도 박 감독의 성공을 기대하거나 예상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과 비관적인 전망이 더 많을 정도였다.
박 감독의 베트남은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 챔피언십과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두 대회에서 각각 결승, 준결승에 오르며 아시아 축구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박 감독과 베트남의 계약은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다. 베트남축구협회에서는 일찌감치 재계약 준비를 하고 있다. 박 감독 입장에선 부담이 크다. 지난 1년 동안 믿을 수 없는 성과를 올렸기 때문에 남은 1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대중의 눈이 높아진 만큼 더 큰 성과를 이뤄야 한다. 우려스러운 게 사실이다. 민족의 명절 추석을 앞두고 본지와 만난 박 감독은 “꼭 해피엔딩이 아니어도 괜찮다”라며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추락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걸까?
‘2018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동메달 결정전 베트남과 UAE의 경기가 1일 인도네시아 보고르 파칸사리 스타디움에서 열렸다.베트남 팬들이 박항서 감독 사진을 들고 응원하고 있다. 2018. 9. 1.보고르(인도네시아) |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
◇ “모두가 알아보지만 불편하지 않다.”
아시안게임 이후 박 감독은 핵심 관계자들과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서 “내 자신이 너무 교만해진 것 같다”며 사과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박 감독은 베트남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가림막이 없는 식당에선 밥을 먹기조차 힘들다. 박 감독을 알아보고 ‘셀카’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한 명 건너 한 사람이 아는 척을 해 편하게 걸어다닐 수도 없다. 당사자 입장에선 귀찮을 법도 하다. 그렇다고 그가 사과할 만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주변에선 마스크나 모자를 쓰라고 권하지만 정작 박 감독은 “그게 더 불편하다. 나는 베트남에서 정말 상상도 못할 사랑을 받고 있다. 그 분들은 내게 사진만 찍어달라 그러지 다른 것을 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 정도는 별 일이 아니다. 보답하는 마음에서라도 편하게 다니면서 대중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지난 아시안게임 기간 중에는 박 감독을 사칭한 SNS 계정이 등장해 베트남 내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예민한 시기라 언짢을 수도 있었지만 박 감독은 당시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웃으며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해명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그런 것을 상상이나 했겠나. 기분 나쁠 일이 아니다. 관심을 많이 주시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그때도 큰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뭐라고 그런 일까지 생기는지 모르겠지만 베트남에 온 뒤 벌어진 모든 일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흥민아, 나 작전지시하는데....비켜줄래‘2018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4강전 한국-베트남의 경기가 29일 인도네시아 보고르 파칸사리 스타디움에서 열렸다.베트남 박항서 감독이 작전지시를 하던 중 옆의 손흥민에게 친근감을 표현하고 있다. 2018. 8. 29.보고르(인도네시아) |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
◇ 신화의 핵심, 진정성과 성실함
베트남 내에서 박 감독은 영웅을 넘어 신화적인 존재로 거듭나고 있다. 베트남의 많은 사람들이 아시안게임에서 박 감독을 지지하는 걸개를 들고 나왔다. 박 감독의 일화가 시험 문제에 등장하고 온라인에서는 그를 비판하는 일이 금기시 될 정도라고 하니 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박 감독은 성공의 비결을 ‘행운’으로 꼽았다. 그는 “운이 좋았다. 일이 되려면 원래 다 잘 되는데 내가 베트남에 간 이후의 상황이 딱 그렇다”며 겸손하게 말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박 감독은 진정성을 갖고 선수들에게 접근했다. 외국인 지도자라 처음에는 선수들도 망설였지만 박 감독의 태도를 보며 마음의 문을 열었다. 박 감독은 “내가 베트남어를 할 수 없어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 아버지 같은 사람이라 선수들도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스킨십은 만국공통언어다. 일부러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거나 장난을 친다. 선수들과 가까워진 비결”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아시안게임에서 그가 선수들의 치료를 직접 담당하는 모습이 선수 SNS에 올라와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성실함도 그의 무기다. 박 감독은 이영진 수석코치, 배명호 피지컬 코치와 함께 팀으로 일한다. 그가 꼽은 ‘팀 박항서’의 힘은 성실함에서 나온다. 베트남은 아직 체계적인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아 훈련 프로그램이나 식단 등에 구멍이 많다. 박 감독은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히 챙겼다. 팀 닥터와 논의해 식사 메뉴를 챙기고 선수들의 근력, 체지방 상태를 확인해 운동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밤낮 없이 일하는 모습을 보며 베트남축구협회는 물론 선수들까지 감동했다는 후문이다. 박 감독은 “특별히 내가 잘난 게 없다. 이 코치와도 늘 이야기한다. 우리는 성실함으로 어필해야 한다. 그 무기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우린 옆모습이 닮았다‘2018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4강전 한국-베트남의 경기가 29일 인도네시아 보고르 파칸사리 스타디움에서 열렸다.경기 전 박항서 감독과 김학범 감독이 인사를 하고 있다. 2018. 8. 29.보고르(인도네시아) |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
◇ “해피엔딩 꿈꾸냐고? 아니어도 괜찮다!”
오르막이 있으면 언젠가는 내리막을 만난다. 지금은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지만 박 감독은 자신이 계속 하늘 위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1959년생인 그는 우리나이로 60세다. 이순(耳順). 귀가 순해져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하게 되는 나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결말이 무조건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박 감독은 “많은 사람들이 두렵지 않냐고 묻는다. 결말이 궁금하지 않냐고 묻기도 한다. 물론 나도 궁금하다. 해피엔딩이라면 좋겠다. 이왕이면 아름답게 내려 오는 게 좋겠지. 나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하지만 그런 것에 일희일비할 나이는 아니지 않나. 꼭 해피엔딩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당장 오늘 내가 해야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 다음 목표가 있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여유는 없다. 오늘도, 내일도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고 싶은 생각뿐이”이라고 털어놨다.
베트남은 11~12월 동남아시아의 월드컵이라 불리는 스즈키컵에 출전한다. 베트남의 목표는 당연히 우승이다. 올해 열린 두 번의 대회에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기 때문에 베트남의 눈은 이미 높아질대로 높아져 있다. 박 감독도 부담이 있는 게 사실이다. 박 감독은 “사람들의 기대가 크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 당연히 부담이 있다. 오죽하면 아시안게임이 끝나면 좀 쉴 수 있을줄 알았는데 끝나니까 스즈키컵 생각부터 나더라.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승하고 싶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다. 잘 준비해서 해봐야 하지 않겠나”라며 선전을 다짐했다.
weo@sportsseoul.com
[기사제보 news@sportsseoul.com]
Copyright ⓒ 스포츠서울&sportsseoul.com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