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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이진숙의 휴먼 갤러리](9)그의 예술 시작과 끝엔 ‘중용’…우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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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갈라테이아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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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언제나 직진

다빈치·미켈란젤로 장점 뽑아낸

라파엘로 때 르네상스 화풍 최고조

‘갈라테이아의 승리’서 볼 수 있듯

당시 아름다움, 균형·조화가 핵심


귀여운 괴물 돌고래 두 마리가 이끄는 조개 마차를 타고 요정 갈라테이아가 바다를 행진한다. 청량하고 맑은 대기를 가르며 내닫는 갈라테이아의 붉은 옷자락이 깃발처럼 휘날린다. 강릉 바닷가에 사는 나는 바다의 무한한 에너지를 잘 알고 있다. 영원히 반복하는 운동 속에서 단 한번도 똑같은 물결을 허용하지 않는 바다가 품고 있는 그 젊은 에너지를 말이다. 그리고 영원히 젊은 바다에 사랑의 에너지가 더해져 볼 때마다 가슴이 뛰는 그림이 바로 라파엘로의 ‘갈라테이아의 승리’이다.

저토록 행복한 표정으로 그녀가 달려가는 그곳에는 연인 아키스가 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랑이 그녀의 행진을 방해하려고 한다.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는 한눈에 갈라테이아를 보고 반해버렸다. 갈라테이아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쪽에는 폴리페모스를 그린 다른 그림이 걸려 있다.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가 그린 폴리페모스는 갈라테이아를 위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있다. 거인의 사랑노래에 맞춰 갈라테이아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듯 사랑의 신들은 사방에서 일제히 그녀를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그림의 제목은 ‘갈라테이아의 승리’가 아니던가. 다른 유혹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행진하는 그녀에게는 사랑을 위한 직진뿐이다.

사실 원래 신화의 내용은 이와 사뭇 달랐다. 자신의 애절한 구애를 거절하고 아키스와 사랑의 밀회를 나누는 갈라테이아를 본 폴리페모스는 질투에 사로잡힌 나머지 아키스를 죽여버린다. 갈라테이아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신들은 아키스의 피가 흐른 자리에 강물이 솟아나게 했다. 그리스신화는 피와 눈물로 뒤덮인 비극적인 격정치정극이었다. 이 주제를 가지고 신플라톤주의자 폴리치아노가 쓴 시에서 영감을 받았던 라파엘로는 신화의 비극성을 깨끗이 제거했다. 신플라톤주의적 관점에서 정신적인 사랑은 언제나 육체적인 사랑을 넘어서 승리하는 법이고, 유혹은 단지 흩어지는 바람과 같은 것일 뿐이다. 사건의 비극성 여부와 상관없이 갈라테이아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에 관해 갈라테이아는 승리했다.

이 그림은 갈라테이아의 사랑의 승리일 뿐 아니라 라파엘로의 승리이기도 하다. 르네상스의 3대 거장 중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혁신적인 천재들이라면 라파엘로는 두 거장들의 장점만을 뽑아낸 종합의 천재이다. 그의 이름과 함께 르네상스 화풍은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그래서 19세기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는 “라파엘로는 우아함, 아름다움, 조화다”라고 딱 잘라서 말했다.

라파엘로가 이 작품에서 이룬 것은 대칭과 역동성의 조화이다. 그림의 모든 인물들은 가운데의 갈라테이아를 중심으로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왼편의 천사는 오른편 천사와, 중앙의 천사는 화면 하단 천사와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갈라테이아 주변을 돌고 있는 요정들을 얼싸안은 해신들도 마찬가지로 완전한 대칭이다. 고둥피리를 부는 해신들의 모습은 정확하게 뒤집어진 양면 같다. 이런 대칭적인 배치는 르네상스적인 아름다움의 핵심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조화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칫 엄격한 대칭은 자연스러움과 생동감을 저해할 수 있다. 그러나 라파엘로의 작품은 정적인 대칭을 넘어서 생동하는 운동감 속에 있는 조화에 도달했다고 평가받는다. 각 대칭되는 인물군들이 갈라테이아라는 수직축을 중심으로 사선으로 배치되어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한 운동감을 갖는 것이다. 직진하는 갈라테이아와 회전하는 해신들의 역동적인 리듬이 내뿜는 안정적이면서도 생기발랄한 에너지, 양립할 수 없었던 것의 양립과 조화로 가득 찬 그림이다.

■ 혁신의 대중화

연인 마르가리타 루티 그린 작품

다빈치 그림에서 조명 방향 바꿔

‘모나리자’의 불편함·애매함 없애

‘모두를 유혹’ 불필요한 오해 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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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베일을 쓴 여자’와 ‘라 포르나리나’는 그가 지닌 능력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두 그림의 모델은 라파엘로의 연인 마르가리타 루티(Margarita Luti)다. 그림의 제목으로 쓴 ‘라 포르나리나’는 ‘제빵사의 딸’이라는 뜻으로 그녀의 별명이었다. 별명이 암시하듯 그녀는 신분이 높지 않은 여인이었지만, ‘베일을 쓴 여자’에서는 매우 고귀한 여인으로 그려졌다.

얼굴은 관람객을 정면으로 보지 않고 살짝 왼쪽으로, 몸은 그보다 더 틀어진 채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포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마셜 맥루한이 말한 미디어의 마사지 기능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모나리자’를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자세는 우아한 여인의 자세라는 무의식이 형성되어, 누구든 포즈가 비슷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급의 고귀한 여인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라파엘로는 ‘모나리자’가 불러일으키는 불편함과 애매함을 친절하게 제거해 주었다. ‘모나리자’는 스푸마토 기법을 혁신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에서 흐릿한 눈썹과 두툼한 턱을 가져 불필요한 외모 논란에 빠지기도 했다. 반면 ‘베일을 쓴 여자’는 선명한 눈썹과 날렵한 턱선을 가진, 윤곽이 또렷한 미인이다. 이것은 다빈치의 그림에서 딱 한 가지를 바꾸면서 생긴 효과다. 바로 조명의 방향이다. ‘모나리자’가 빛이 왼쪽에서 비춰져 상대적으로 길게 그려지는 오른편 턱 쪽에 두툼한 그림자가 생겼다면, ‘베일을 쓴 여자’에서는 오른쪽에 빛을 설정함으로써 어두운 그늘은 왼쪽으로 짧게, 오른쪽 턱선은 시원하게 뻗어 보이도록 묘사되었다.

또 배경을 제거하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어 내실(內室)의 여자라는 느낌이 강화되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모습은 마치 진정한 사랑을 맹세하는 포즈로, 미소를 짓고 있어서 ‘베일을 쓴 여자’의 웃음은 오직 한 사람만을 겨냥한 정숙한 웃음처럼 보인다. ‘모나리자’의 이해할 수 없는 웃음을 이해할 수 있는 웃음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몇 년 뒤에 ‘베일을 쓴 여자’가 베일을 벗었고 상의까지 벗었지만, 그녀는 음란하다고 비난을 받지 않았다. 착용한 팔찌에는 ‘우르비노의 라파엘로’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즉 그녀의 따뜻한 웃음이 향하는 곳이 명확하기 때문에 ‘모나리자’ 앞에 섰을 때처럼 이 여자가 나를 유혹하려고 웃는다는 불필요한 오해를 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녀가 쓰고 있는 터번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터번은 그녀가 동방의 여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그녀의 신분만이 아니라 애인인 라파엘로의 신분도 확증해준다. 라파엘로는 1509년 바티칸 교황의 서명실에 ‘아테네 학당’을 그리면서 자신을 마케도니아의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의 화가 아펠레스로 그렸다.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아름다운 애첩 캄파스페(Campaspe)가 있었다.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던 아펠레스는 그만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애첩과 화가를 모두 아꼈던 알렉산더 대왕은 두 사람의 사랑을 존중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라파엘로가 아펠레스라면 그녀는 아펠레스와 알렉산더 대왕의 사랑을 동시에 받은 미녀 캄파스페일 것이다. 16세기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마케도니아는 동방이니 터번은 자연스러운 소품이었다. 그러니까 라 포르나리나의 고혹적인 미소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유혹이 아니라 라파엘로라는 천재화가가 사랑하는 뮤즈의 미소라는 분명한 출처가 있어 안도감을 준다. 통용되는 상식에 근거한 안정감이 바로 라파엘로가 도달한 대중성의 핵심이었다.

■ 스프레차투라: 중용의 아름다움

라파엘로 그림은 ‘무기교의 기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우아함은

그의 창작 원리이자 삶의 태도

중용을 잃은 순간 세상을 떠났다


앵그르는 라파엘로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그를 평생 숭배했다. “라파엘로의 작품은 아주 쉽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고 신의 작품이 그렇듯 그 안의 모든 것이 마치 의지의 순수한 결과 같다”는 말을 몇 번이고 남겼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라파엘로의 아름다움은 르네상스 미술의 핵심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고려를 거쳐 태어난 것이다. 앵그르가 말한 “아주 쉽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이라는 표현은 일종의 ‘무기교의 기교’라고 할 수 있는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를 의미할 것이다. 이는 발데사르 카스틸리오네의 책 <궁정인>(1528)에 등장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권력자의 룰에 관해서 다루었다면, 카스틸리오네의 <궁정인>은 권력자의 주변에 있는 조신의 룰을 다룬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통용되는 냉혹한 정치 세계였다. 이 현실정치의 세계에서 궁정인은 “군주가 잘못된 길로 들어설 경우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진실된 조언을 해야 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직접 통치는 하지 않았지만 군주들에게 현명한 조언을 할 수 있었던 탁월한 궁중인이라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어리석고 한계를 가진 개인인 군주가 오류를 범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기 위해 궁중인은 중요한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이때 이상적인 궁정인의 최고 덕목은 우아함(Grazzia)이다. 그런데 우아함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 우아함은 과도한 허식, 즉 인위적인 아페타치오네(affettazione)가 아니라 스프레차투라여야 한다고 한다. 우리말로 쉽게 옮겨지지 않는 스프레차투라는 정교하게 연출되어서 꾸민 티가 전혀 나지 않는 일종의 ‘무기교의 기교’이다. 반복을 통해 훈련해서 몸에 배어 원래부터 그랬던 듯이 우러나오는 우아함이다.

라파엘로는 카스틸리오네와 교류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515년 라파엘로는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라파엘로가 그린 초상화에서 카스틸리오네 역시 ‘모나리자’와 같은 우아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지위가 높지만 지위를 내세우지 않고, 화려한 기물 따위로 자신의 부를 과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고급스러운 질감과 톤 다운된 차분한 색감이 화면 전체를 격조 있게 만들어준다. 그림 속의 그는 신중하고 부드러운 호의를 가지고 관람객을 바라본다. 이것은 바로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의 기본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우아함에 도달하기 위한 궁정인의 조건은 신체적인 강건함, 준수한 외모,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학식, 세련되고 재미있는 대화술 등이었다. 우아함을 위한 내적인 조화는 기본적으로 중용에 근거한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태도는 당파로 분열되어 걸핏하면 칼질을 해대는 무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생존전략의 하나이기도 했다. 라파엘로가 혁신과 대중성을 융합할 수 있었던 것도 둘 사이의 중용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파엘로에게 중용은 그를 종합의 천재로 만든 창작의 원리이자, 한때 삶의 중요한 원리이기도 했다.

라파엘로에 이르러서 예술 자체만 아름다워진 것이 아니었다. 예술가의 삶도 아름다워졌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라파엘로는 보기 드물게 ‘아라밸’(Art & Life Balance)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는 미켈란젤로처럼 예술을 위해서 일상을 포기하고, 세상과 불화하는 우울하고 고뇌에 찬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최상의 영혼”에 “우아, 겸손, 외모, 뛰어난 인격”을 갖추었다는 평판이 따라다녔다. 그러나 아트와 라이프의 밸런스가 무너진 순간, 중용의 아름다움이 사라진 순간 그는 세상을 떠났다.

라파엘로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대단한 사랑꾼이었다. 아고스티노 치기의 저택에 ‘갈라테이아의 승리’를 그릴 무렵 그는 작업 도중 곧잘 사라지곤 했다. 알고 보니 애인 때문에 자주 자리를 비우는 것이었다. 결국 작업이 꾸준히 이어지길 바랐던 아고스티노 치기는 라파엘로의 애인인 마르가리타 루티의 거처를 작업실 근처에 마련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12년간 뜨겁게 사랑했고, 라파엘로는 승승장구했다. 바사리는 라파엘로가 루티와 너무 많은 사랑을 나누다가 그만 기력이 쇠해졌고, 올바른 치료를 받지 못해서 죽게 되었다고 <르네상스 예술가 평전>에서 말했다.

너무 많은 사랑, 균형을 잃은 사랑이 결국 젊은 라파엘로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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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파르네지나 : 라파엘로가 그린 프레스코화 ‘갈라테이아의 승리’는 로마의 아름다운 저택 빌라 파르네지나의 벽을 장식하고 있다. 당시 대부호였던 아고스티노 치기가 저택을 짓고 그림을 의뢰한 이곳에는 라파엘로 외에도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등 여러 작가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 필자 이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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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여행을 하며 트레차코프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들에 큰 감명을 받아 미술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모스크바의 러시아 국립인문대학 미술사학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롤리타는 없다 1, 2> <시대를 훔친 미술> <위대한 미술책> 등 저서가 있다.


<이진숙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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