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경향신문 언론사 이미지

[도재기의 천년향기](14)경천사지 십층석탑-고려·원나라 ‘융합의 미’…타향살이 100년, 언제 개성 땅 밟을까

경향신문
원문보기

[도재기의 천년향기](14)경천사지 십층석탑-고려·원나라 ‘융합의 미’…타향살이 100년, 언제 개성 땅 밟을까

속보
"온라인스캠 프린스그룹 천즈, 캄보디아서 체포돼 中송환"

1348년에 조성…화강암 아닌 대리석, 홀수층 아닌 짝수층 이채

섬세한 조각에 목조건축 형상화…양국 문화·기술 등 어우러져

1907년 일본 대신 탐욕에 반출…국제 비판 여론에 1918년 반환

40여년 방치, 1959년 경복궁에 ‘날림 복원’…1995년 다시 해체

10년 보존처리 후 국립중앙박물관에…분단에 막혀 ‘고향’ 못 가


문화유산은 한 민족이나 국가 구성원의 정체성, 자긍심을 상징한다. 한번 훼손되면 원형복원이 거의 불가능한 게 또한 문화유산이다. 시대와 지역을 넘어 저마다 소중하게 보존·관리·연구하는 이유다. 그러다 보니 역설적으로 파괴나 약탈, 훼손의 주요 대상이 된다. 정복자로선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정복대상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아주 효과적인 수단인 것이다. 이집트 신전 앞에 있던 ‘오벨리스크’들이 이탈리아·프랑스·미국·터키 등으로 흩어져 있는 것도,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조각 ‘파르테논 마블스’(엘긴 마블스)와 이집트의 ‘로제타 스톤’ ‘스핑크스의 수염’이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세계 곳곳의 진귀한 문화재들이 루브르박물관에 전시 중인 것도 마찬가지다. 제국주의의 희생물이자, 식민지배의 산물이며, 문화재 수난과 약탈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루브르박물관, 영국박물관이 진짜 프랑스, 영국의 박물관이냐’는 조소 섞인 물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세계 문화재 수난사에서 한국도 빠지지 않는다. 특히 일제강점기 당시 이 땅의 문화유산은 처참하게 훼손됐다. 전국의 옛 무덤들을 도굴해 유물을 챙기는가 하면, 경복궁의 ‘자선당’ 같은 건축물, 조형미가 빼어난 석탑이나 승탑(부도)마저 통째로 뜯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을 들어서면 우뚝 선 석탑이 관람객을 맞는다. 독특한 조형미와 화려한 조각들, 아파트 4층 높이 규모가 압권인 ‘경천사지 십층석탑’(국보 86호)이다. 자연 속 장엄한 산사가 아니라 박물관 실내에 있다는 게 좀 생뚱맞다. 석탑의 가치를 살펴보고, 박물관에 서 있는 사연을 찾아가면 일제강점기 한국 문화재들의 아픈 수난사로 연결된다.


■ 전통·외래 조화, 낯설지만 아름다워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고려 말 충목왕 때인 1348년 3월에 조성됐다. 조성 시기·경위를 알 수 있는 것은 1층 몸돌(탑신석)에 명문이 있어서다. 명문에 따르면, 석탑 발원자는 당시 친원나라 세력으로 권세를 누린 강용, 고룡봉 등이다. 원나라 황실과 고려 왕실의 번창과 국태민안, 중생의 성불을 기원하며 세웠다. 원래는 지금의 개성 인근인 경기도 개풍군 부소산 자락의 경천사(敬天寺)에 서 있었다.

이 석탑은 언뜻 봐도 우리가 아는 전통적·전형적 석탑들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경주 불국사 다보탑처럼 특이하고 독특하다. 우선 재료가 화강암인 기존 석탑과 달리 대리석이다. 대리석 특성상 색감이 화강암보다 뽀얗고, 질감도 더 매끈하다. 강도는 물러 화강암보다 조각 표현이 수월하다. 현존하는 석조유물 중 대리석이 재료인 석탑, 불상은 극히 드물다.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2호·조선),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 124호·고려),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225호·조선),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보물 488호·고려) 등이 있을 뿐이다.

탑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조각들도 색다르다. 일반적 석탑은 불상이나 나한, 불교 상징물을 새기더라도 숫자가 적고 간결하지만 이 석탑은 전체가 조각들로 빼곡하다. 담백한 일반 석탑과 달리 섬세한 조각들로 화려하게 느껴질 정도다. 조각 내용은 층수에 따라 다르다. 기단부에는 불법 수호자인 사자나 용을 비롯해 연꽃, 나한상 등이 있다. <서유기> 내용이 형상화되기도 했다. 1층부터 4층까지의 몸돌 각 면, 즉 16면에는 부처가 설법하는 불회(佛會) 장면이 중심이다. 각 불회 위에는 작은 현판 모양에 ‘화엄회’ 등 불회의 이름도 있다. 5~10층까지는 부처가 선정에 든 모습을 중심으로 한 불상 조각들이 섬세하다.


탑에 불교 관련 조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세히 보면 목조건축물을 형상화했다. 기둥과 공포·난간·현판이 표현된 데다, 지붕돌(옥개석)도 정밀하게 기와지붕으로 새겨졌다. 고려시대 목조건축이나 목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자, 당시 목조건축물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이 석탑 감상에서 조각들을 빼놓을 수 없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특이성은 평면도에서 더 두드러진다. 대부분의 석탑은 기단부에서 상륜부까지 사각형 형태지만 이 석탑은 3단의 기단부는 물론 3층까지의 평면이 한자의 ‘亞’(아)자 모양이다. 이런 형식은 원나라 때 성행한 몽골·티베트계 불교인 라마교의 불탑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4~10층까지의 평면은 전통 석탑처럼 사각형이다. 고려 전통과 원나라 외래문화의 융합인 셈이다.

탑의 층수도 익숙하지 않다. 전통 석탑은 3층, 5층, 9층 등 홀수층인데 이 탑은 10층으로 짝수층이다. 탑이 홀수층인 것은 불교의 교리·사상에 근거했다기보다 고대 동양의 우주관인 음양오행사상에 따른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때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 석탑을 ‘11층 석탑’, 또는 층수 표시 없이 ‘다층 석탑’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주류적 견해는 현재 모습이 10층이고, 일제강점기 당시 사진 속에서도 10층으로 확인된다는 점에서 ‘10층 석탑’이란 것이다. 일부 전문가는 세부적으로 볼 때 기단부가 3층, 몸돌부가 7층으로 결국 석탑의 바탕은 홀수층이란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특히 경천사가 화엄종 사찰이었기에 10층 석탑을 조성했다는 주장도 유력하다. <화엄경>에서는 숫자 ‘十’(10)을 ‘화엄의 완성’이나 ‘완전한 수’로 여긴다는 점에서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재료나 구조, 조각, 양식 등 여러 측면에서 전통적 요소와 외래적 요소가 하나로 어우러졌다. 실제 옛 문헌에는 원나라 장인이 석탑 조성에 참여했다는 기록도 있어 당시 이 석탑은 고려와 원나라의 문화, 장인들의 석공기술, 양국 불교가 융합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문화는 결국 서로 다른 것이 몸을 섞어 발전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낯설게 다가오면서도 아름답고 편안함이 느껴지는 것도 전통과 외래문화의 조화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아름다움은 110여년 뒤 조선 세조 때인 1465년에 ‘원각사지 십층석탑’으로 거듭난다.


■ 일제 강점·남북 분단의 상처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그 독특함, 아름다움만큼이나 큰 수난을 겪었다. 원래 자리가 아니라 중앙박물관 로비에 서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550여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1907년 무참하게 해체된다. 그리곤 일본으로 가야 했다. 대한제국 황태자(이후 순종)의 결혼식(1907년 1월)에 일본국왕 특사로 참석한 궁내대신 다나카 미츠아키(田中光顯)가 탐을 냈기 때문이다. 당시 대한매일신보, 워싱턴포스트, 재팬 크로니클 같은 언론의 기사를 종합하면, 다나카는 그해 3월7~9일 사이 석탑을 해체했다. 주민들이 반발하자 무장경찰 등 200여명을 동원해 막았다. 그는 해체한 석탑을 10여대의 달구지에 실어 개성역으로 운반한 뒤 일본으로 가져갔다. 제국주의자들이 약소국에서 벌인 전형적인 문화재 불법 약탈이다.

석탑 강탈 사실은 외국 언론인들의 적극적인 비판 기사, 기고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특히 영국인 베델과 고종의 외교 자문관이던 헐버트 등은 대한매일신보(Korea Daily News)와 일본에서 발행되던 재팬 크로니클, 미국 언론 등에 문화재 약탈의 부당성, 야만성을 제기했다. 미국 주재 일본대사가 당시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다나카에게 씌워진 오명이 결국 일본에 대한 비우호적 여론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우려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국제적으로 비판여론이 확산되자 일제는 결국 조선총독부가 나서 반환을 압박했고, 1918년 석탑은 다시 돌아왔다. 경천사가 아니라 경복궁의 전각을 허물어내고 들어선 총독부가 있는 경복궁으로다.


돌아오긴 했으나 석탑의 운명은 기구했다. 일제강점기 아래에서 석탑의 보존·관리에 관심을 기울인 이는 적었고, 이미 훼손된 석탑을 다시 세우는 일도 만만찮았다. 결국 해체된 채 경복궁 회랑 한쪽에 무려 40여년 동안 방치됐다. 1959년에야 다시 세워졌지만 시멘트를 곳곳에 바르는 등 복원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였다. 부실하고 허술하게 세워진 석탑이 온전하게 보존될 수는 없다. 비바람에 마모되고 시멘트가 떨어져 나갔다. 새똥이 쌓이면서 대리석은 제 색감을 잃고 흉물스럽게 변했다. 구조적 안정성마저 위험하게 되면서 보존처리가 시급해졌다.

결국 석탑은 1995년 또 해체됐다. 석탑의 보존처리를 맡은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당시 석탑의 상태를 ‘응급실에 실려온 중환자’로 표현할 정도였다. 보존처리는 10년이나 걸렸다. 그리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지금의 자리에 들어설 때 함께 세워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물론 원래 자리인 개성 경천사로 가지 못한 것은 짐작하다시피 남북 분단 때문이다. 석탑은 수난을 겪는 사이 상륜부의 원형이 훼손돼 상륜부를 온전하게 복원할 수 없었다. 분명히 있었을 탑 내부의 사리장엄 내용물이 어떠했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수난사를 간략하게 살펴봤지만, 일제강점기 한국 문화재의 수난은 상상을 초월한다. ‘자선당’ ‘북관대첩비’ ‘양산 부부총 출토품 일괄’ ‘평양 율리사지 팔각오층석탑’ ‘이천향교 오층석탑’ ‘가야시대 금관’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숭례문’과 ‘돈의문’ ‘광화문’, 수많은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회화와 공예 명품, 고서적…. 십수권, 아니 수십권의 책으로 정리해도 수난사 정리가 모자랄 판이다. 1965년 한일협정에 따라 한국은 4479점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돌아온(외교문서상으로는 ‘인도’) 유물은 1432점에 불과했다. 지금도 ‘오구라 컬렉션’ ‘오쿠라 컬렉션’ 등 많은 유물에 대한 반환운동이 벌어지는 이유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통계를 보면, 올 4월 현재 공식확인된 국외의 한국문화재는 모두 17만2316점. 이 중 42%인 7만4742점이 일본에 있다. 물론 이들 문화재가 모두 불법유출된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는 약탈로 의심된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이야기하다 보니 자연스레 일제강점기 문화재 수난사가 언급된다. 8·15 광복절을 앞둬서인지 우리의 자긍심이자 자존심인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새삼 되새김질해본다.

<도재기 문화에디터 jaekee@kyunghyang.com>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카카오 친구맺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