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덕춘이 1956년 골프월드컵 출전 당시 스윙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KPGA |
지금으로부터 86년 전인 1932년.
16세 어린 소년이 경성골프클럽(서울CC)을 찾아간다. 캐디 마스터 조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은 조카가 캐디 마스터실 보조역을 제안해 골프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 소년이 바로 대한민국 1호 프로골퍼 故 연덕춘(1916~2004)이다. 어깨 너머로 남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다가 골프에 흥미를 느낄 즈음 일본인 프로에게 골프채를 선물 받아 프로골퍼의 꿈을 키웠다.
당시 일본인 프로가 일본으로 돌아가자 "이제는 조선인 헤드프로를 앉히자"는 여론이 일었다. 이미 남다른 기량을 과시했던 연덕춘은 테스트를 가볍게 통과해 일본 골프유학의 대상자로 선정됐고, 1934년 12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인접한 가나가와현 후지시와골프장에서 본격적으로 골프수업을 받았다. 1933년 일본오픈 챔프 나카무라 가네키치(일본)가 스승이다.
1935년 2월에는 일본 관동골프연맹으로부터 프로 자격을 획득한다. 한국 최초의 프로골퍼 탄생사다. 경성컨트리클럽 소속 프로로 근무하던 1941년 일본오픈을 제패한 게 하이라이트다. 한국인 최초의 '일본의 내셔널타이틀' 우승이다. 1936년 故 손기정(1912~2002)이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수상한 것과 함께 한국 체육사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1942년 일본프로골프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기량이 만개했지만 태평양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등으로 골프대회가 사라지면서 더 이상 프로골퍼의 길을 걸을 수 없게 됐다. 연덕춘은 그러자 전쟁으로 폐허가 된 코스 복원에 앞장섰고, 코스설계가로도 활동했다. 1956년 잉글랜드 런던에서 열린 골프월드컵에 출전해 개인전 28위에 올랐다는 게 놀랍다.
1958년 국내 최초의 프로골프대회 KPGA선수권 초대 챔프에 등극한 뒤 한국프로골프협회 2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후배 양성에 주력했다. 당연히 1968년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창립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KPGA는 연덕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80년부터 가장 낮은 평균타수를 기록한 선수에게 주는 최저평균타수상을 '덕춘상'으로 명명해 시상하고 있다.
KPGA 미디어팀장 zec9@kpg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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