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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깊이보기]하메네이와 이스라엘,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기묘한 조합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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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깊이보기]하메네이와 이스라엘,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기묘한 조합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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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왜이렇게 집착하니?”

이스라엘이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를 향해 이렇게 쏘아붙였다. 하메네이가 트위터에서 이스라엘을 ‘암’에 비유하며 비난하자 반격한 것이다.

■하메네이가 할리우드 영화를 만났을 때

“나한테 왜이렇게 집착하니(Why are you so obessed with me)?”는 2004년 할리우드 개봉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 Mean Girls>에 나오는 유명 대사다. 서양 대중문화에서 가장 인기있는 ‘밈(meme·인터넷 유행)’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대사이기도 하다.

하메네이가 지난 3일(현지시간) 이스라엘을 맹비난하면서 사건은 시작됐다. 하메네이는 이날 트위터에서 “팔레스타인은 우리 신앙의 핵심 문제”라고 운을 뗀 뒤 “이스라엘은 반드시 제거돼야 할 서아시아의 암”이라고 독설을 날렸다.

미국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이 다음날 트위터에서 여기에 반응했다. 독설 대신 저 유명한 영화 대사가 나오는 ‘움짤(짧은 동영상 그림파일)’로 답신했다. 이스라엘 대사관의 반격 트윗은 8일 현재까지 리트윗 3만2000회, 좋아요 9만5000회를 기록하며 인기를 끌었다. 하메네이의 원본 트윗은 리트윗 4600회, 좋아요 1만1000회에 그쳤다. 워싱턴포스트는 하메네이와 이스라엘의 설전에 대해 “이란의 가장 오래된 수사학적 무기에 맞서 이스라엘 대사관은 가장 강력한 밈으로 대응했다”고 평가했는데,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이 완승을 거둔 셈이다.



워싱턴포스트의 평가대로 이란에서 ‘암’이라는 표현은 그 역사가 깊다. 초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1979년 이슬람혁명 직후 쿠르드 반군세력을 암에 비유했다. 1980년대 들어서도 그는 적대세력을 암에 비유하기를 즐겼다. 주로 이스라엘을 겨냥할 때가 많았다. 호메이니의 이 수사법은 2000년대 들어 이란 대중사회에도 유행했다. 2006년 테헤란 시위에 나선 학생 수백 명이 “이스라엘은 지역의 암”이라고 외친 것이 그 사례다. 호메이니의 뒤를 이은 하메네이도 이번 트윗 때처럼 여러차례 이스라엘을 암에 비유했다.

하지만 이 유서 깊은 수사학적 무기가 소셜미디어 무대에서는 별 힘을 쓰지 못했다. 2004년 개봉 이후부터 수많은 인터넷 유행을 낳았던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대사 한마디가 훨씬 더 화제가 됐다. “이스라엘, 인터넷에서는 당신이 이겼다” “외교의 새 시대가 열렸다. 앞으로는 누가 더 재미있는 밈을 올리느냐로 전쟁의 승패가 갈릴 것” 같은 반응이 이어졌다.

■밈(meme), 외교무대 새 무기로 떠오르다


하메네이와 이스라엘 사이에서 벌어진 이번 해프닝은 소셜미디어 시대 외교전의 새 단면이기도 하다. 미국 NBC뉴스는 지난 4월 “각국 정부가 국제 외교에서 밈을 무기화하고 있다”면서 “국제적 이슈가 터졌을 때 자기 입장을 강화하고, 상대 신뢰도를 깎아내리는 도구로 밈을 활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누가 더 재미있는 밈을 올리느냐로 전쟁 승패가 갈릴 것’이라는 한 네티즌의 평가를 그저 농담만은 아닌 시대가 된 셈이다.

러시아는 ‘밈 외교전’에서 독보적인 나라로 꼽힌다. 2016년 12월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대선 개입을 이유로 러시아 외교관 35명을 추방하자, 영국 주재 러시아 대사관은 “냉전 시대의 데자뷔”라고 비난 트윗을 날렸다. 새끼오리 사진을 함께 올렸고, 사진 위에는 ‘레임(LAME)’이라고 적었다. 퇴임을 앞둔 오바마를 향해 ‘레임덕’이라고 조롱한 것이다.


미국 대선 개입, 러시아 해커 논란, 가짜뉴스 유포 논란 등 서구에서 러시아를 향한 비난이 일 때마다 각국 주재 러시아 대사관은 온갖 밈을 활용해 상대를 조롱했다. 지난 3월 러시아가 영국 런던에서 전직 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 부녀를 독살하려 했다는 의혹이 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영국은 러시아가 암살 배후에 있다며 맹비난했다. 보리스 존슨 외무장관 등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나치의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하기도 했다. 3월22일 존슨이 스크리팔 암살 시도 사건을 설명하러 의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한 하원의원이 “푸틴은 히틀러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이용한 것처럼 (러시아 월드컵을) 이용할 것”이라며 “영국은 월드컵을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슨은 이에 동의하며 “푸틴이 자유롭고 공정한 절차로 당선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영국 주재 러시아 대사관이 트위터로 이에 반격했다. 1938년 5월 베를린에서 열린 영국과 독일의 축구 친선전 영상을 올렸다. 이날 영국 대표팀 선수들은 경기 시작 전 10만 독일 관중 앞에서 나치식 경례를 올렸다. ‘유화 정책’에 열심이던 영국 네빌 체임벌린 정권이 히틀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이같은 지시를 내렸다. 러시아 대사관은 영상과 함께 “존슨은 러시아 월드컵을 히틀러의 올림픽에 비유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적었다.


스크리팔 독살 관련 영국 정부가 러시아 외교관들을 대거 추방하자 이번에는 몰타 주재 러시아 대사관이 나섰다. 1987년 방영된 영국 TV 드라마의 한 장면을 트위터에 올렸다. 주몰타 대사관이 올린 드라마 영상의 대사는 이랬다. “소련 외교관을 76명 정도 추방하는게 어때? 언론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고 싶을 때 우리(영국 정부)가 늘 해왔던 방식이지.” 대사관 측은 영상과 함께 “1987년 영국 드라마 대본이 2018년 현실이 됐다”고 적었다.

■‘밈 외교전’ 어디로 가나

대중 여론은 외교 분쟁에 작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유머로 무장한 밈은 소셜미디어에서 손쉽게 확산되며 선전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여론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오바마 정부 시절 국무부 디지털 전략 부차관보로 일했던 모이라 웰란은 미국 온라인매체 옵저버 인터뷰에서 “밈을 활용하는 것은 그저 좋아요나 리트윗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성공적인 외교를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는 “오늘날 소셜미디어에는 더이상 기성뉴스를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영화 대사로 하메네이를 조롱한 이스라엘의 트윗은 성공적이었다. 소셜미디어에서 이어진 호의적인 반응들이 그 근거다.

지난 몇 달 동안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 시위 유혈 진압으로 거센 비난을 받았다. 옵저버는 이스라엘 정부와 군부가 “우리는 계속되는 위협에 시달리는 나라”라는 서사로 가자 유혈 진압을 정당화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끊임없는 위협과 맞서는데 다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도식을 세우려 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나온 트윗이 “나한테 왜이렇게 집착하니”였다. 이스라엘은 ‘암’이며 ‘제거되야 할 대상’이라고 위협하는 이란은 이런 서사를 만들어내는 상대역에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하메네이는 이란 강경파의 상징적인 인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이란 핵협정 탈퇴 선언 이후 핵개발 재개를 시사하기도 했다.

NBC뉴스는 4월 “밈의 외교무기화”를 보도하면서 밈과 조롱을 앞세운 디지털 외교가 각국의 공공 신뢰를 허물어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웰란도 옵저버 인터뷰에서 “밈 외교는 각국 정부를 바보스럽게 보이게 하는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사태를 희화화하는 밈 외교가 현상을 왜곡하고, 본말을 전도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퀸카로 살아남는 법> 트윗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스라엘이 끊임없는 외부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는 서사를 선전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진실을 교묘히 감추고 있다고 옵저버는 비판했다. 이스라엘의 실탄 사격에 목숨을 잃은 가자 시위대는 이란이 아니라는 것이다. 옵저버는 “가자 시위대는 농축 우라늄을 보유하지 않았다. 아니 최소한의 총기류도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비판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밈 외교전’은 앞으로 더 확대될 전망이다. 지난해 4월 포린폴리시 보도에 따르면, 소셜미디어 전문가로 유명한 미국인 사업가 제프 기에시아는 2015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전략커뮤니케이션센터가 발행하는 군사안보 학술지에 “밈 전쟁을 받아들일 때가 됐다”고 적었다. 그는 “밈 전쟁은 비용이 많이 들지도 않고, 가능성도 충분하다”면서 “크렘린은 이미 밈 전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왜 그것을 시도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포린폴리시는 2011년 미국 국방부 방위고득연구계획국(DARPA)에서 밈을 군사적 선전에 이용하는 연구에 자금을 지원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미국 등 나토 회원국들이 러시아처럼 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애쓰고 있다면서 “아직까지 성과는 처참하지만, 시도 자체가 의미있다”고 적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그의 트위터 마법을 나토 동맹국들에 전수할 지도 모른다”는 조롱 섞인 ‘기대’를 남기기도 했다.

밈 외교전의 부작용을 지적한 웰란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밈을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트윗에 쏟아진 관심을 봐라. 그들은 충분히 목표를 달성했다고 생각한다”면서 “밈이 외교 정책을 추진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심진용 기자 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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