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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 (화)

이슈 [연재] 스포츠서울 '김현기의 축구수첩'

[김현기의 축구수첩]누구나 한 번쯤 미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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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원이 1994년 6월18일 미국 댈러스 코튼볼 경기장에서 열린 미국 월드컵 한국-스페인전에서 후반 종료 직전 2-2 동점골을 넣은 뒤 기뻐하고 있다. 스포츠서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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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김현기기자]1994년 6월18일은 토요일이었다. 고교 1학년이었던 필자는 2교시 때 기술 수업을 위해 별도로 마련된 기술실에 이동했다. 선생님이 “오늘은 수업하는 날이 아니지?”라며 기술실에 있던 텔레비전을 켰다. 미국 월드컵 1차전 한국-스페인전 전반전이 막 시작되고 있었고, 가슴 졸이며 선수들의 활약상을 지켜봤다. 스페인이 유럽 정상권의 강호였지만 필자 기억으로 우리 선수들이 전반에 꽤 잘했다. 골 찬스도 있었는데 상대 골키퍼(스페인엔 안토니 수비사레타라는 세계적인 수문장이 있었지만 한국전엔 경고누적으로 산티아고 카니자레스가 나왔던 것까지 기억난다!)의 선방으로 무산돼 모두가 아쉬워했다.

사건은 후반과 겹치는 3교시 영어시간에 터졌다. 스페인전을 위해 학교 근처에 사는 친구가 텔레비전과 안테나까지 갖고 왔지만 수업밖에 모르는 영어 선생님이 무서워 “축구 보자”는 말도 못 꺼낸 것이다. 더운 초여름, 옆 반에선 ‘아~’하는 탄식과 ‘와~’하는 함성이 크게 울렸지만 영어 선생님은 영문도 모른 채 “왜 이렇게 시끄러워? 창문 꽉 닫아”를 외쳤다. 그야말로 찜통이 된 교실에서 불쌍하게 책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런데 교실 맨 뒤에서 몰래 라디오를 듣던 친구가 서정원의 2-2 동점골이 터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야~”라고 함성을 내지른 것이 화근이었다. 월드컵이란 대회가 있는지, 한국이 경기하는지도 모르는 나이 지긋하신 영어 선생님은 “왜 수업 중 소리를 지르냐”며 ‘1990년대 방식’으로 체벌하고는 교실을 떠났다. 4교시 국어 선생님이 자초지종을 듣고는 “불쌍하다”며 마침 흘러나온 하이라이트를 보게 하는 것으로 그 날 학교 일정이 마무리됐다.

며칠 뒤 한국-볼리비아전도 잊을 수 없다. 수능 모의고사 보는 날이었는데 학교에서 한국-볼리비아전을 시청하고 바로 시험에 임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숱한 찬스를 날린 공격수 황선홍이 고1 학생들의 원성을 산 것은 당연했다. 대한축구협회장까지 지낸 조중연 당시 해설위원의 “우리가 볼리비아를 너무 크게 봤어요~”란 외침도 아직 생생하다.

24년 전 얘기를 꺼낸 이유는 21일 대한축구협회가 페이스북과 유투브, 슛포러브 홈페이지 등을 통해 공개한 12분 짜리 웹드라마 ‘누구나 한 번쯤 미쳤었다’ 1편 때문이다. 협회는 두 골을 내준 뒤 후반 40분 이후 홍명보와 서정원의 연속골로 비기는 등 월드컵 명승부 중 하나로 꼽히는 한국-스페인전 관련 드라마를 소개했다. 박지성과 홍명보, 서정원 등 한국 축구의 레전드들이 카메오로 출연한 이 드라마에는 필자처럼 당시 고교생이었던 학생들이 스페인전을 시청하기 위해 애쓴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가슴에 더 와 닿았다. 한국 축구의 ‘응답하라 1994’ 버전이라고나 할까. 이런 드라마는 당시 상황을 얼마나 똑같이 녹아내는가가 중요한데 선생님들의 체벌이 다소 약하다(?)는 것을 빼고는 월드컵 시청이 얼마나 간절했고, 힘들었는가를 훌륭히 재연했다는 생각이다.

한국 축구가 어느 덧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해 내달 태극전사들의 러시아행을 앞두고 있다. 월드컵 열기가 확 가라앉았고, 21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사상 첫 야외 출정식 분위기도 미지근했다. ‘월드컵 진출을 당했다’는 말이 나올 만큼 부진에 부진을 거듭하면서 신뢰를 잃어버린 대표팀과 축구인들의 책임이 크다. 월드컵이 아니어도 세상에 재밌는 일이 많아졌다. 하지만 스마트폰도 없고 HD 텔레비전도 없었던 1990년대 월드컵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교실에 모이고, 호프집에 모이고, 친구집에 모였던 일들을 생각하면 ‘소비자’인 국민들과 팬들도 월드컵의 가치를 어느 새 놓치고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전으로 난리통이 된 시리아 국민들이 지난 해 본선도 아닌 아시아 최종예선 호주와 플레이오프 때 하나가 돼 광장에서 응원한 것을 보면 월드컵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의 힘은 여전히 대단하다. 기회가 된다면 ‘누구나 한 번쯤 미쳤었다’ 1편, 그리고 2002 한·일 월드컵을 소재로 한 2편을 꼭 보길 바란다. 한국-스페인전으로부터 정확히 24년 뒤인 2018년 6월18일 벌어지는 한국-스웨덴전을 손꼽아 기다릴 사람들이 많아질 것 같다.
축구팀장 silva@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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