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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4 (화)

이슈 박항서의 베트남

[줌인] 박항서 매직, 2002년 히딩크 리더십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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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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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너희는 잘 싸웠다. 당당히 고개를 들어라.”

지난 27일 오후 9시. 박항서(61) 베트남 23세 이하(U-23) 대표팀 감독은 고개 숙이고 눈물을 흘리는 선수들을 일일이 끌어안으며 말했다. 말은 통역을 거쳤지만 진심을 그대로 마음에 전달됐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이날 중국 창저우 올림픽 스포츠 센터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결승에서 우즈베키스탄에 1-2로 패해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베트남은 폭설이 쏟아지는 불리한 환경에서 연장 후반전까지 대등한 승부를 펼쳤다. 연장 후반 종료 직전 통한의 결승골을 허용해 아쉽게 우승을 놓쳤다. 눈이 한껏 내린 경기장 환경, 전반전 눈과 구별되지 않은 우즈베키스탄 대표팀의 하얀색 유니폼 등 어려움을 딛고 보여준 투지는 아시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미국 폭스스포츠는 “베트남은 이번 대회의 진정한 우승팀이다”며 “동남아시아 국가도 축구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얻은 것이 가장 큰 수확이다”고 평가했다.

박항서 감독은 지난 9월29일 베트남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완전히 바꿔놓은 ‘매직’을 보여줬다. 베트남은 각종 연령별 AFC 주최 대회에서 처음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박항서 감독은 부임하자마자 “베트남 대표팀을 동남아 정상, 아시아 정상으로 만들겠다”고 장담했다. 곧바로 경기력으로 자신의 말을 지켰다. 감독으로서 첫 시험대였던 이번 대회에서 기적을 일궈냈다.

박항서 감독은 팀을 맡자마자 두 가지 원칙을 분명히 했다. 하나는 ‘단점 보다 장점 찾기’, 또 하나는 ‘프로의식 심기’였다.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선수들을 처음 본 뒤 체력이 약할 것이라는 편견을 버렸다. 순발력과 민첩성이 좋은 그들의 장점을 최대한 살렸다. 베트남 선수들은 어느 팀보다 많이 뛰었다. 90분 내내 펼쳐진 압박에 상대팀은 혀를 내둘렀다.

박항서 감독은 선수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소통했다. 한편으로는 엄격했다. 팀 미팅이나 식사 도중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만약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리면 가차없이 벌금을 물게 했다. 제대로 된 프로 생활을 경험한 적 없는 선수들은 처음에 잘 적응하지 못했지만 이내 박항서 감독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박항서 감독이 세운 팀운영 원칙은 한일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과 닮았다. 히딩크 감독도 세계 축구 변방이었던 한국을 맡으면서 ‘소통’과 함께 ‘원칙’을 강조했다. 경기력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관행은 과감히 깨버렸다.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의 히딩크’로 비유되는 게 단지 성적 만이 아닌 이유다. 그가 히딩크로부터 학습한 노하우를 제대로 적용했기 때문이다.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국민 영웅’으로 자리매김했다. 전 다이 꽝 베트남 국가주석은 박항서 감독에게 노동훈장을 수여하기로 했다. 베트남 정부가 외국인에게 훈장을 내리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당시 우리 국민이 히딩크 감독에게 보여준 사랑과 관심이 베트남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과 결승전 당시 베트남 시내 곳곳에서 수십만 명이 거리응원전을 벌였다. 베트남 대표팀이 귀국한 28일에는 성대한 축하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박항서 감독은 결승전을 마친 뒤 “우리 선수들 모두 최선을 다했다. 이번 대회 내내 그들은 훌륭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며 “미래에는 베트남 축구가 아시아 레벨에서 더 많은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또 “나는 이번 대회에서 성공했다고 느끼지 않는다. 어떤 감독도 패배한 뒤 성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박항서 감독은 2002년 한일 월드컵 한국축구국가대표팀을 맡은 거스 히딩크의 신화를 베트남에서 쓰고 있다. 박 감독은 당시 코치로서 거스 히딩크 감독을 도와 한국월드컵 ‘4강 신화’를 도왔다. 한국 축구와 문화가 익숙하지 않았던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 사이에서 소통의 가교 역할을 맡았던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 한일 월드컵 폴란드전에서 선제골을 넣은 황선홍이 벤치로 달려가 히딩크 감독이 아닌 박항서 코치를 끌어안은 장면은 그에 대한 선수들의 신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보여준 대표적인 예다.

한일 월드컵 이후 지도자 인생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월드컵을 통해 지도력을 인정받은 박항서 감독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대표팀 감독에 선임됐다. 하지만 아시안게임 준결승전에서 이란에 패한 뒤 부임 석 달 만에 경질되는 아픔을 겪었다. 경남FC·전남드래곤즈·상주상무 등의 사령탑을 맡았다. 팀들 모두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지만 마무리가 좋지 못했다. 성적 부진에 구단과의 갈등이 겹치면서 쓸쓸히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박항서 감독은 창원시청을 이끌던 도중 지난해 10월 갑작스레 베트남축구협회로부터 대표팀 감독 제의를 받았다. 일주일을 고민한 끝에 수락했고 베트남행 비행기를 탔다.

박항서 감독은 최고 대우로 베트남에 입성했다. 계약기간 2년 이상이었고 동남아시아 대표팀 감독 가운데 최고 대우였다. 대표팀 성적에 따라 계약기간이 연장될 수 있고 인센티브도 받을 수 있었다.

이제 그의 앞에는 따라붙던 물음표는 사라졌다. 베트남은 축구 실력은 떨어지지만 팬들의 열정 만큼은 세계 으뜸이다. 베트남 축구팬들은 인지도가 떨어지는 박항서 감독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던 생각을 모두 버렸다.

히딩크 감독은 2002년 한일월드컵 16강에 진출한 뒤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박항서 감독도 여전히 배가 고프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박항서 감독의 매직이 어디까지 뻗어 갈지 아시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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