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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히기에 실패해 부스러진 추두부를 쓸어 넣고 끓인 추두부버섯탕. 두부에 꼬리나 머리만 감춘 미꾸라지들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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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릴 고향조차 없는 두 남자의 해후
시에 흐르는 시간을 나는 지켜보고 있었다. 시를 쓴 박기영(58) 시인의 충북 옥천 집에서 지난 4월 29일 열린 ‘옻순잔치’의 한쪽 풍경이다. 주인공은 평안도 맹산 포수 출신의 아들 박 시인과 암사동 ‘동신면가(서울 강동구 올림픽로 803/전화 02-481-8892)’ 박영수(64) 사장이다. 그때 무향민이라는 말을 박 사장에게서 처음 들었다. 피란지 대전에서 태어나 동두천에서 자라고 서울에 사는 그는 자랄 때 이사 가는 곳마다 아버지에게 “여기는 네 고향이 아니다. 네 고향은 니북이다”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포개져 고향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가슴에 응어리졌다. 사전에는 없는 이 말을 월남민 2세들은 더러 쓰는 듯하다. (▷[이택희의 맛따라기] ‘위험한 유혹’ 옻순, 15가지 요리 즐긴 잔치…내년을 기약하며 http://news.joins.com/article/21543756 ▷선육후면(先肉後麵)…떡갈비·평양막국수가 찰떡궁합 ‘동신면가’ http://news.joins.com/article/2089016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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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0일 페이스북에 실패했다고 알린 추두부 만들기 중간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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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추두부. 순두부의 염도와 온도 때문에 두부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 한쪽으로 몰려있는 미꾸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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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두부를 만들기 위해 식히고 간수를 걸러내려고 따로 담아둔 순두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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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두부에 넣을 씨알 잔 미꾸라지. 자연산이 아니라 양식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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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를 걸러낸 콩즙을 끓이는 동안 바닥이 눌지 않도록 나무주걱으로 계속 젓고 있는 안보경씨. 안씨는 추두부·꿩두부 재현 작업에 참여하기 위해 경기도 안산에서 오전 5시에 출발해 충북 옥천에 왔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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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두부에 들어갈 꿩고기를 잘게 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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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진 꿩고기에 소금을 뿌렸다. 소금은 간수처럼 작용해 끓는 콩즙이 고기에 잘 엉겨 붙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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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즙이 끓자 박기영 시인이 다져서 소금 뿌려둔 꿩고기를 솥에 넣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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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즙에서 건져낸 꿩고기 덩이. |
가마솥에서는 꿩두부 만들 두유를 새로 끓이고 있었다. 두유가 끓자 박 시인은 생으로 다져 소금을 친 꿩고기 살을 흩뿌렸다. 고기에 뿌린 소금은 간수처럼 작용해 꿩고기에 순두부가 엉기게 하려는 것이다. 소금 자루에서 흘러나온 물이 간수이기 때문이다. 소금이 귀한 평안도 산간 오지에서는 소금에서 나오는 간수가 없으면 붉나무(일명 소금나무) 줄기·열매 우린 물을 간수로 이용하기도 하고, 짠지를 다져 두유에 풀어 순두부가 엉기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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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두부에 넣기 위해 꿩 뼈와 자투리 고기를 다져 압력솥에 8시간 곤 뒤 뼈가 바스러지도록 물렀는지 확인하는 박기영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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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에 넣을 꿩 뼈 다짐, 다져서 소금 뿌려둔 꿩고기와 비지밥에 넣으려고 씻어서 잘게 썰어둔 신김치(왼쪽부터 시계방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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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인 콩즙을 두부로 굳히기 위해 간수를 질러가며 솥에서 다른 그릇으로 퍼 옮기는 동안 다져서 곤 꿩 뼈를 섞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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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두부를 굳히려고 틀에 퍼 담았다. 꿩고기 덩어리가 두어 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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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판에서 자른 두부 몇 모를 덜어내자 잘라진 단면에서 꿩고기와 꿩 뼈 조각이 많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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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두부 한 모를 들어올리자 꿩고기와 꿩 뼈 조각이 군데군데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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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고기와 꿩 뼈 조각이 섞인 꿩두부 한 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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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놓은 꿩고기. 흔히 생치(生雉)라고 한다. 가슴살이 발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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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치를 발골한 상태. 살은 다져 생으로 끓는 콩즙에 넣고, 뼈와 자투리 살은 다져서 압력솥에 고아 씹을 수 있도록 익혀 순두부 엉길 때 섞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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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의 다리뼈만 빼고 잔뼈와 자투리 살을 칼로 다졌다. |
간수 빼 식힌 순두부에 찬물·미꾸라지 풀어
꿩두부가 끝나고 가마솥에 찬물을 반쯤 채웠다. 비닐 자루에 담아둔 순두부는 촘촘한 망사 자루로 옮겨 순물을 거른 다음 자루에 찬물을 뿌려 씻었다. 그걸 가마솥 물에 풀었다. 미꾸라지도 풀었다. 미꾸라지 떼는 환경이 낯선지 몇 마리만 정찰하듯 돌아다니고 나머지는 떨어진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불을 지피고 솥뚜껑을 닫았다. 아궁이에 장작을 가득 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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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수를 거르려고 순두부를 망사 자루에 붓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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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러진 간수와 순두부 덩어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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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도를 낮추면서 간수도 빠지도록 순두부에 찬물을 뿌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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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수 빼고 찬물 샤워를 마친 순두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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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수 뺀 순두부에 미꾸라지를 넣고 다시 끓이기 위해 가마솥에 찬물을 반쯤 채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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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꾸라지가 들어갈 수 있게 간수 빼고 차게 식힌 순두부를 찬물 가마솥에 다시 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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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수 빼고 식힌 순두부를 찬물에 풀어 놓고 살아있는 미꾸라지도 함께 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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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수 빼고 식힌 순두부에 미꾸라지를 쏟아붓자 낯선 환경 때문인지 한두 마리만 돌아다니고 나머지는 처음 떨어진 자리에 모여 있다. |
“진흙과 모래가 섞인 계류에서 잡은 미꾸라지를 물 담은 항아리에 넣어두면 머금었던 진흙을 토해낸다. 하루 세 번 물을 갈아주며 5~6일 계속한다. 이 미꾸라지 50~60마리와 두부 몇 모를 물과 함께 솥에 넣고 불을 때면 물이 점점 뜨거워지면 미꾸라지들이 열을 피해 두부 속으로 촘촘히 끼어 들어간다. 불을 계속 때면 물이 끓어 미꾸라지가 익는다. 이것을 썰면 미꾸라지가 사이사이 박혀있다. 두부를 참기름으로 지져서 먼저 끓이고, 메밀가루와 계란을 풀어 넣고 저어가며 섞어준다. 재료가 어울리게 탕을 끓이면 맛이 아주 좋다. 이 탕이 요즘 서울의 반인들 사이에 성행한다(取溪泥沙水間鰍魚 多取投甕水中 吐泥土 經五六日 而每日三換水 視其無泥後 ?以豆腐數大塊 灌水鼎中 列置水內 仍取鰍魚五六十尾 放鼎水中 擧火鼎底 則水漸暖 衆鰍鑽入豆腐 以避其熱 燃柴不斷 則水沸鰍烹 取出切片 則鰍箇箇挾其間 煎於香油 而腐片先滾 喬麥粉 ?卵煎之拌調 和物料作湯 味極旨? 此湯 今京中泮人盛行)”고 설명했다. 반인(泮人)은 조선 시대 대대로 성균관에 딸려있던 사람들로 주로 도살이나 푸줏간 일을 생업으로 삼았다.
추두부 만드는 방법 옛 기록에도 두 갈래
이용기가 1924년 지은 한국 음식 책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서도 추두부탕을 ‘별추탕(別?湯)’이라 소개하고 요리 방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여기는 추두부 만드는 방법이 다르다.
“두부를 만들 때 (※굳히려고) 큰 보자기에 싸면서 진흙 토해낸 미꾸라지를 넣고 두부와 함께 싸서 눌러놓는다. 이것을 굵게 썰어 위와 같이 만든 국(※업진·사태 국물에 밀가루 풀고 두부·고비·표고·송이버섯과 삶은 곱창·양을 썰어 넣은)에 넣고 휘저어가며 끓여 먹는다. 모르는 사람은 두부와 미꾸라지를 찬물에 넣고 불을 때면 미꾸라지가 차거운 두부 속으로 뚫고 들어간다고 하지만, 물이 더우면 미꾸라지는 이미 죽기 때문에 두부 속에 들어갈 수가 있으리요. 참 웃으운 일이다. 또는 미꾸라지를 삶아서 얼망에 걸러내어 그 물에 밀가루를 풀고 여러 가지 재료를 위와 같이 넣어 끓여 먹기도 한다. 이것은 담백하다. 미꾸라지가 눈이 말똥말똥하면 먹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먹는 조리방법이다.”
최영년(1856∼1935)이 1925년에 놀이와 명절 풍속을 정리해 묶은 『해동죽지(海東竹枝)』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과 비슷하게 설명한다. “황해도 연백 지역에서는 상강 무렵에 두부를 만들 때 두부가 다 엉겨서 굳어지기 전에 미꾸라지를 넣어 두부모를 단단하게 만든 후 난들난들하게 썰어서 생강과 산초 가루와 밀가루를 풀어 익혀 먹으면 그 맛이 퍽이나 감활(甘滑; 달보드레)하다”고 했다.
‘난들난들’은 사전에 없는 말인데 아마도 납작하고 낭창낭창하다는 말인 듯하다. 경상도 지역 아리랑에 ‘호박잎만 난들난들 날 속였네’라는 가사가 자주 나타난다. 시인 서정주(1915~2000)는 ‘미당 세계여행기’에서 마사지 받은 얘기를 하며 ‘인류사회에서 가장 난들난들할 것인 태국 젊은 색시’라는 표현을 했다(경향신문 1979년 5월 4일 자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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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히기 위해 두부 틀에 퍼 담은 순두부. 순두부 덩어리 속으로 들어간 미꾸라지는 몇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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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를 굳히면서 물을 빼기 위해 동치미 통을 올려놓고 누르고 있다. |
『글로벌시대의 음식과 문화』(우문호 외. 학문사. 2006)라는 책은 추두부탕을 설명하면서 “지금은 충남 금산 지역에 이 습속이 남아있다”고 했다. 내 고향이 금산이다. 집안 14대가 내리 살았고, 나도 스무 살 되던 해까지 살았다. 그런데 금산에서 추두부 만드는 걸 본 적이 없다. 얘기를 들은 적은 있다. 그 말을 믿고 추수가 끝난 논에 나가 미꾸라지를 잡아다가 추두부를 시도해봤다. 오래전 두 번을 했는데 다 실패했다. 미꾸라지가 두부 속으로 들어갈 기미 없이 익어버렸다. 두부는 비린내가 나서 먹을 수 없었다.
금산군 남일면 초현리 태생으로 금산군청 문화공보관광과장·기획감사실장을 거쳐 충청남도 농수산국장을 했던 박범인(58)씨에게 금산에 그런 습속이 남아있는지 문의했다. 그도 “말은 들었지만 하는 걸 본 적은 없다”고 했다. 박 전 국장이 추어탕 마을인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에서 추어탕 집을 오래 운영한 사람에게 전화해 물어보니 같은 얘기를 했다고 전했다. “말은 들었지만 추두부 만드는 걸 본 적은 없다. 연두부를 이용해 두 번 시도해 봤는데 미꾸라지가 두부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서 실패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금산 지역에 추두부 습속이 남아 있다는 얘기나 이규경의 기록은 확인을 거친 내용이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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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힌 추두부는 입자의 결착이 성글고 보기에도 일반 두부와 질감이 다르다. 미꾸라지는 겉으로 드러난 게 많은데 발상지인 중국의 산둥에서 추두부 만드는 걸 여러 번 봤다는 참석자 안미란씨는 그곳에서는 미꾸라지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만들었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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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두부 한 모. 의욕이 앞서는 아마추어들끼리 만들다 보니 자른 선이 반듯하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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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두부를 자른 단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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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두부 한 점. 옛 기록에는 저걸 참기름에 지져서 탕에 넣는다고 했다. |
“두부협회 연구원 시절 방송국에서 추두부탕을 해보자고 해 하루 전 두부와 실한 미꾸라지로 리허설을 해보았다. 솥에 물·두부·미꾸라지를 넣고 불을 붙였다. 미꾸라지들은 괴로워하다 두부에 들어가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물이 너무 급히 뜨거워져서일까. 다시 서서히 물을 데웠다. 이번에는 미꾸라지들이 서서히 죽었을 뿐이다. PD에게 미꾸라지가 안 들어간다고 전화를 했다. 자연산이 아니라서 그럴까, 염전 간수가 아닌 황산칼슘을 써서 그럴까. 이런저런 말을 나누다가 생각해낸 것이 미꾸라지가 파고들 수 있도록 두부를 부드럽게 만들고 구멍도 내주자는 것이었다. 그것도 실패였다. 미꾸라지들은 죽기 바빴을 뿐이다. 우리는 미꾸라지가 두부에 파고드는 부분은 너무 잔인한 장면이라는 이유를 달아 생략하고 추두부탕 요리법 촬영을 마쳤다.” 이어진 글을 보면 이때 추두부는 삶은 미꾸라지를 순두부에 섞어서 굳히는 방법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보통 삶은 미꾸라지 순두부에 섞어 굳혀
추두부를 실제 파는 음식점들도 있다. 그런 곳은 대개 두부를 굳히려고 순두부를 틀에 퍼 담을 때 삶은 미꾸라지를 켜켜이 넣고 누르는 방식으로 하는 거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추두부를 만드는 것과 살아있는 미꾸라지가 두부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무엇이 다를까. 박 시인은 “미꾸라지가 마지막에 살려고 용쓸 때 몸 안의 생체방어물질을 죄다 분비하는데, 그게 두부에 섞여 사람 몸에 좋다. 특히 남자들 정력에 좋다”고 했다. 언론인 고 이규태(1933~2006)씨도 “추두부탕은 미꾸라지가 죽을 힘을 내는 그 기운을 두부에 흡수시킨 기(氣)의 음식”이라고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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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에서 물이 끓기 시작할 무렵 뚜껑을 열어보니 미꾸라지 몇 마리는 떠있고 대부분은 어디로 숨어 보이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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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에 장작을 가득 쟁이고 빠르게 온도를 높였다. 추두부는 절반의 성공에 그쳤는데 화력이 지나치게 셌던 게 문제라는 지적이 현장에서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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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참석자 임미란씨가 추두부와 꿩두부를 집에 가지고 가서 샤부샤부를 해 먹었다며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추두부는 데친 배추로 감쌌고, 꿩두부는 데친 쪽파로 동였다. 그는 중국에서 관광안내 일을 하면서 추두부 만드는 현장을 여러 차례 보고 직접 먹어봤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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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굳어지지 않은 추두부를 꿩육수에 넣고 느타리·표고·밤나무버섯과 씻은 김치를 넣어 끓인 추두부버섯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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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접시에 덜어놓은 추두부버섯탕. 만드는 과정은 ‘캠핑요리’ 수준이었으나 맛은 시원하고 오묘했다. |
배부른 사정 아랑곳하지 않고 비지밥이 뒤따라 나왔다. 지난 4월 ‘옻순잔치’ 때 처음 만나 바로 호형호제를 하고, 둘이 손잡고 크게 울며 가까워진 평안도 정주 출신 실향민의 아들 박 사장을 대접하는 특식이었다. 두부 만들고 남은 비지로 지은 밥이 아니다. 콩즙 거르지 않은 되비지를 밥솥 바닥에 깔고, 15분 불린 쌀을 안친 다음 콩나물·시래기·신김치(씻어서)·돼지고기를 차례로 올려 지었다. 생명태 살을 넣어도 좋다고 한다. 밥물은 보통 밥의 절반만 넣어야 한다. 포장마차 아주머니의 양념간장 솜씨도 좋았다. 조선간장과 시판 양조간장을 반반 섞은 간장에 다진 파·청양고추와 들기름·고춧가루·참깨를 섞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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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즙을 거르지 않은 되비지와 쌀을 섞어 지은 평안도식 비지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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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밥에는 돼지고기·신김치(쌋어서)·콩나물·시래기 등이 들어간다. 명태 살을 넣어도 좋다고 한다. 주황색 포장마차 안에서 사진을 찍어 밥에 붉은 빛이 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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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밥에는 쌀보다 나물이 많다. 옛 사람들은 양을 불려 먹으려고 그렇게 했겠지만 요즘 눈으로 보면 건강식이다. |
박 시인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원주와 함양 마천 등지를 떠돌다가 대구에서 학교에 다니고, 서울과 캐나다에서 몇 년씩 살다가 지금은 충북 옥천에 깃들여 지낸다. 전국에서 제주도·전라도 빼놓고는 다 살아봤다 할 정도다. 아버지는 평안도 맹산군 포수 출신인데, 일제강점기 포수는 특혜받은 사람이다. 일제는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놀라 1907년 9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했다. 이에 반발한 포수들은 의병을 조직해 일제에 대항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항일무장투쟁 대첩으로 꼽히는 봉오동·청산리전투를 이끈 홍범도(1868~1943) 장군이다.
민간의 총기 소지를 금한 일제는 포수 허가제를 시행했다. 군별로 1~2명의 포수만 허가했다. 일제와 어떻게든 친하지 않고는 포수가 될 수 없었다. 일제가 패망한 뒤 맹산 포수의 집 뒤에 광복 직후 월북한 소설가 벽초 홍명희(1888~1968)가 살았다. 당시 소련 군정 사령관이 벽초를 자주 찾아왔다. 그 지역의 유력자이자 유일한 포수도 같이 어울렸다고 한다. 벽초는 북한 정권 수립 후 1948년 내각 부수상이 됐다. 그런 연줄로 맹산 포수의 북쪽 7남매 중 큰아들은 유격대·정치공작 요원 양성 군사교육기관인 강동정치학원(존속기간 1948년 1월 1일~1950년 6월 25일)에 들어갔다. 제대할 때는 상좌(북한군 연대장급)까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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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산간에서는 붉은 갓으로 동치미를 담갔다고 한다. 갓 물이 우러나 국물이 자주색이다. 왼쪽은 꿩육수를 만들어 평안도식으로 담갔고, 오른쪽은 일반 소금물로 담근 동치미다. |
일제의 특혜를 받은 아버지는 아들의 앞날에 걸림돌이 될까 걱정해 남으로 몸을 감췄다. 큰아들은 북에서 순조롭게 장교로 성장했다. 연좌제가 작동하던 1960~70년대 아버지는 그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김일성이보다 더 나쁜 놈”이라는 욕을 만들어 입에 달고 살았다. 반공에 목숨 건 사람들이 볼 때는 “때려잡자 김일성”보다 훨씬 날카로운 표현이다. 처자식 건사해야 하는 가장의 처절한 위장이자 보호색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당신의 몸과 마음의 실향(失鄕)이 아들에게 남긴 유산은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무향(無鄕)의 떠돌이 삶이었다.
아버지는 평안도 낭림산맥을 헤매며 짐승을 쫓을 때 배운 포수 음식과 수렵으로 남쪽 생활을 영위했다. 남에서 얻은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거들어야 했다. 그게 싫었다. 그 때문에 불화가 깊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서야 불화가 풀리더니 이내 그리움으로 가슴에 똬리를 틀었다. 미워하면서 닮는다고, 그토록 싫어하던 아버지의 일과 음식이 자기 일로 다가왔다. 직접 해보거나 먹어본 것, 어깨너머로 본 것, 말로만 들은 음식들이 아우성이 되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재현과 복원이 절체절명의 의무로 가슴에 자리 잡았다. 실제로 여러 가지를 해봤다. 절필했던 그는 지난해 그런 사연들을 시로 써서 25년 만에 시집 『맹산식당 옻순비빔밥』을 냈다. (▷[이택희의 맛따라기] 명태밥·토끼반대기·옻순비빔밥…시 읽으며 나누는 잊혀진 음식들 http://news.joins.com/article/2092410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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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두부를 시식하면서 고향 음식 얘기를 나누는 평안도 원적의 ‘무향민’ 박영수 사장과 박기영 시인(왼쪽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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