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내가 일하는 국립수목원은 서울보다 좀 더 북쪽인지라 이미 은행나무 빛깔이 더할 수 없이 곱다. 수목원의 많은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최고의 가을 단풍빛깔들이 있는데 은행나무가 가지는 노란단풍의 의미는 언제나 조금 다른 각별함으로 다가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시간이 주는 경외감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은행나무에게는 언제나 시간이 묶여져 있다.
은행나무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풍경은, 시간을 한참 거슬러 고등학교로 돌아간다. 교정에는 여러 친구들이 팔을 벌려 감싸야 할 만큼 굵게 자란 은행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가 노랗게 물드는 가을이 되면 짧은 단발머리에 허리를 졸라맨 교복을 입고 있던 열일곱 살 여고생들은 교정에 나와, 단짝과 손을 잡고 사진을 찍고, 은행잎을 주워 책 갈피 갈피 끼워 놓으며 이어령 선생님의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라는 수필집을 읽곤 하였다.
다음으로 내 마음에 남는, 매년 늦은 가을이면 찾아가고 싶은 단풍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67호인 강원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의 은행나무이다. 천연기념물에 대한 책을 쓰느라 전국의 오래되고 큰 나무들을 모두 찾아다닌 경험이 있는데 그 많은 나무들 가운데 나이도, 키도, 사연도 최고인 나무가 (은행나무로 치면 천황목이라는 별명을 가진) 용문사 은행나무다. 이상하게도 내게는 이 나무가 마음에 깊게 심겨졌다. 수백 년을 한자리에 살면서 웅장하고 아름답게 가지를 펼쳐내 드리운 큰 그늘 아래 서면, 세상사에 잡다한 번뇌 정도는 내려놓아도 좋다 싶을 만큼 그 존재 자체로 위안이 된다.
은행나무에게는 언제나 따라다니는 질문이 있다. ‘은행나무는 침엽수인가?’ 겉씨식물이니 침엽수이며, 은행나무의 잎맥을 잘 살펴보면 두 갈래씩 갈라진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붙은 것이라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침엽수냐 활엽수냐는 인위적 분류라고 생각하고 구태여 넓은 잎을 가졌는데 왜 침엽수로 구분해야 하는가 의문을 가진 적도 있다.
은행나무를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있는데 ‘은행나무는 자생식물인가?’이다. 우리나라엔 전국에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지만 사실 모두 심은 나무들이고, 절로 자라는 자생지는 없다. 공룡이 살던 시대부터 살았던, 그래서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부르는 은행나무의 유일한 자생지는 중국 저장성의 양쯔강 하류 천목산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자생식물이 아니라는 견해이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자생식물을 오래전부터 이 땅에 살았던 식물이라고 정의한다면, 현재는 자생지가 없어도 한반도에서 은행나무의 화석이 발견되니 아주 먼먼 옛날에는 은행나무가 이 땅에 살았다고 할 것이다. 시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조금 길고 조금 넓게 생각해보면,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는 부분은 많아진다’고 은행나무는 가을마다 밝고 아름답게 물들어가며 말하고 있는 듯싶다. 혹시 풀어내지 못한 마음의 문제들이, 마음의 짐들이 있다면, 가을이 가기 전에 은행나무와의 만남을 권한다.
<이유미 |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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