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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LGU+컵 자네티와 명승부, 마지막 4점 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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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찍어치기 샷 시범을 보이고 있는 허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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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생애 첫 전국대회 우승을 한 허정한은 이듬해 9월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당구국가대표 선발전을 맞이한다. 고 김경률이 그해 안탈리아월드컵 우승으로 자동출전이 확정된 가운데 허정한은 절친 최성원과 남은 한 자리를 놓고 격돌하게 된다.

허정한은 최성원에게 국내외 랭킹포인트가 뒤져 최종선발전 5경기 중 4경기를 이겨야 하는 어려운 상황. 하지만 그의 ‘태극마크’에 대한 갈망은 강했다. 세 번째 경기만 내주며 4경기 모두 승리, 결국 국가대표가 됐다.

“태릉선수촌 빙상경기장 안에 테이블을 놓고 며칠에 걸쳐 경기를 치렀는데, 이상하게 집중이 잘 됐어요. 공이 원하는 대로 맞고 굴렀습니다. 너무 기뻤고 동시에 국가대표로서의 책임감도 느껴졌습니다.”

▲‘태극마크’의 묵직한 무게감

허정한은 아시안게임이 자신 있었다. 대회가 열리는 11월이 다가오자 언론에선 그를 김경률과 함께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았다. 16강까지는 순조로웠다. 하지만 8강에서 예상외 복병을 만났다. 베트남의 라이 데 빈이었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던 이 선수에게 허정한은 35:40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베트남 선수의 변칙적인 시간끌기 등 심리전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어요. 핑계처럼 들리겠지만, 살다살다 그런 테이블을 처음 봤습니다. 선수라면 테이블 상태에 적응해야 하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테이블은 정도가 심했어요. 예상한 각도보다 볼이 한 포인트나 짧게 떨어지더라니까요. 알고보니 포켓볼 테이블 제조사에서 만든 제품이더라고요.”

메달 획득이 가장 확실시되던 3쿠션팀의 조기탈락에 한국 당구선수단은 동요했다. 기대를 모았던 남자 포켓9볼 정영화는 준결승, 여자 포켓9볼 차유람은 8강에서 탈락했다. 그나마 김가영이 은메달을 따내 선수단의 체면을 세웠다. 이 경험을 통해 허정한은 태극마크의 무게감을 체험했다.

“당구는 개인전 느낌이 강한 종목이에요. 그런데 아시안게임은 달랐어요. 제 패배가 한국의 패배로 연결됐습니다. 월드컵, 세계선수권 출전 경험은 있었지만, 국가대표로서의 경험은 전무했던 거죠. 이 뼈아픈 교훈이 자양분이 돼 세계팀3쿠션선수권에서 좋은 성적으로 이어졌나봐요.”

허정한은 동료들에게 ‘편한 선수’로 통한다. 항상 상대방의 얘기에 귀기울이고, 상대가 싫어할 만한 언행은 삼가는 성격 덕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팀플레이가 중요한 세계팀3쿠션선수권에서 유독 입상 경험이 잦다. 2013년 동메달, 2014년 은메달, 2015년 은메달 등 3회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다녀오면서 ‘팀 플레이’에 신경 쓰게 됐어요. 내가 아닌 국가를 대표해서 싸워야 하는데, 남이 내게 맞추기보단 제가 먼저 맞추는 게 편하더라고요. 설령 상대가 실수하더라도 다독여주고, 또 저도 의지를 하고요. 세계팀3쿠션선수권 금메달요? 욕심은 나죠. 성원이(최성원 선수)가 올 3월 우승하는 거 보고 솔직히 부러웠어요. 저도 당구선수잖아요. 하하”

▲한국 5번째 월드컵 챔피언 “국내용 꼬리표 뗐죠”

고 김경률, 최성원, 강동궁, 조재호 등. 허정한은 2016년 말까지 그의 친한 동료들이 월드컵 트로피를 드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던 2016년 12월, 꿈에 그리던 우승컵을 들게 됐다. 그의 37번째 월드컵 출전인 ‘2016 이집트 후루가다월드컵’ 정상에 선 것. 결승 상대는 ‘세계 4대천왕’ 딕 야스퍼스.

“야스퍼스요? 강한 상대죠. 아마 토너먼트 중간에 만났다면 힘겹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결승에서 만나니 오히려 덤덤했어요. 사실 8강까진 엄청 떨렸거든요. 제 집중도도 마침 결승전에 맞춰서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편한 마음으로 경기를 했고, 결국 40:29로 제가 이겼죠.”

그때 기분이 어땠을까.

“기쁜건 당연한거고, 묘했어요. 홀가분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네요. ‘국내용’ ‘우승할 때 됐다’는 소리를 귀가 따가울 정도로 많이 들었거든요. 그런 짐들을 벗고, 가슴에 맺혔던 한이 다 가라앉는 느낌이었어요. 희열을 표출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어요. 이건 우승 해봐야 알아요. 하하.”

허정한은 작년에 이어 올해 7월에도 월드컵 우승에 가깝게 다가선 바 있다. ‘2017 포르투월드컵’ 8강에서 다니엘 산체스(스페인)를 꺾고 4강에 오른 것.

당시 응우옌 꾸억 응우옌(베트남)과의 준결승을 앞둔 그에게 기자는 준결승을 넘어 결승에 대한 각오까지 물었다. 하지만 그는 4강에서 패하며 공동 3위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혹시나 경기에 앞서 각오를 전한 후 부담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하던 기자에게 허정한은 “다음부턴 경기 끝나고 소감과 각오를 전해야겠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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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U+컵" 예선 두번째 경기에서 자네티와 "명 무승부" 경기를 펼친 후 악수를 나누고 있는 허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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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U+컵 ‘명 무승부’ “마지막 4점, 떨리지 않았다”

선수들이 가장 긴장하는 대회는 뭘까. 예상보다 많은 선수들이 ‘LGU+컵’을 꼽았다. 높은 상금뿐만 아니라 세계 최정상급 선수들과의 대결로 선수들에겐 ‘꿈의 무대’로 불린다. 허정한도 그랬다.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지난 두 번의 대회에선 전부 예탈(예선 탈락)했는데, 이번엔 잘하고 싶다”고 했다.

지난 8일 끝난 ‘2017 LGU+컵 3쿠션 마스터스’에서 허정한은 결승 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대회 통틀어 손꼽히는 ‘역대급 명 무승부’ 경기를 연출했다. D조 예선 2일차 경기에서 이 대회 챔피언 마르코 자네티(이탈리아)와 네 번의 동점까지 가는 접전을 펼친 것. 17이닝 36:40으로 뒤진 채 후구공격을 시작한 그는 내리 4점을 성공하며 극적인 40:40 동점을 만들었다.

“남은 4점 칠 때, 특별히 긴장하진 않았어요. 2적구가 다 쿠션에 붙어 있어서 그걸 어떻게 공략할지만 머릿속에 있었죠. 운 좋게 다 들어가 다행히 동점이 됐어요. 아쉽지 않나고요? 물론 아쉽긴 하죠. 하지만 같은 조 선수들이 워낙 잘쳤어요. 하하.”

하기야 그 조는 ‘죽음의 조’였다. 허정한과 자네티 외에 최성원, 야스퍼스가 속했다.

▲애버리지의 법칙 “반드시 제 애버리지를 찾아간다”

‘LGU+컵’ 자네티와의 대결에서 드러났듯이 허정한은 수세에 몰려도 절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지난 6월 ‘양구 국토정중앙배’ 결승도 그의 경기 스타일이 잘 드러난 한판이었다. 당시 그는 대회 결승에서 조재호에게 34:9로 전반전을 뒤졌지만, 후반에 13점을 따내며 마음 놓고있던 조재호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선수들만 아는 ‘애버리지의 법칙’이 있어요. 아무리 높은 애버리지를 내도, 언젠간 자신의 평균 애버리지를 찾아온다는 말이에요. 양구에서 재호가 전반에 5.666이란 애버리지를 냈지만, 후반엔 컨디션이 나빠질 수도 있는거죠. 저는 지고 있더라도 이 법칙을 믿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선수들간의 경기에선 10점 한 번만 터져주면 금세 경기를 뒤집을 수 있어요.”

이어 허정한은 멘탈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경기 중 혹은 슬럼프에도 흔들리지 않은 정신력이 선수에게 꼭 필요하지만, 멘탈관리는 선수들의 해결안되는 숙제”라고 했다.

“저도 아직 멘탈 관리에 대한 정답을 찾지 못했어요. 정신적인 멘토를 찾거나, 심리전문가와의 상담도 좋은 방법이에요. 저는 멘토는 아니지만 마음을 터놓을 사람은 있죠. 오성규 선수입니다. 제가 다섯살 어린데 투정부리면 받아주는 사이에요. 저도 후배들에게 이처럼 조언자 혹은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역할을 해주고 싶어요.”

이어 그는 본인만의 경기 운영법을 공개했다.

“경기가 잘 풀릴 때보다 생각대로 안 될 때 극복하는 게 참 힘들어요. 저는 그럴 때 자리에 앉아 상대를 신경쓰지 않고 최대한 경기에만 집중하려고 합니다. ‘할 수 있다’고 자기최면도 하고, 심호흡도 하죠. 근데, 정답은 없더라구요. 더 솔직하게 말하면 저도 그 정답을 배우고 싶습니다. 하하”

▲“인터벌 길면 힘들어…조명우 S급으로 성장할 것”

상대가 누구든 본인 페이스를 가져가는 허정한도 까다로운 선수가 있다고 했다. 인터벌이 긴 선수다. 상대방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갈 공산이 크단다.

“저는 좋은 샷이 나올 땐 거침없이 쳐대야 하는데, 인터벌 긴 선수와 붙으면 그게 쉽게 안 되더라고요. 또 어린 선수들과의 경기도 부담이 되죠. 다행히 저는 아직 명우(조명우)나 행직이(김행직) 등 어린 선수들과의 경기가 적었어요. 최성원‧이충복 선수는 많이 만났죠. 하하.”

이어 허정한은 조명우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

“명우 나이 때 그런 애버리지를 가진 선수는 역대 한 명도 없었어요. A급을 넘어 S급 선수로 올라갈 가능성이 한국 선수 중 가장 크다고 봐요. 명우에게 기술적인 조언은 의미없는 것 같고, 한 가지 충고하자면 ‘자만심을 갖지’말라는 거예요. 당구선수를 떠나 외부에 비쳐지는 모습이 중요하다는 거죠. 선배로서 명우가 올바른 인성을 갖춘 선수가 돼 당구계 스타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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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당구인생"에 대한 포부를 밝힌 허정한이 테이블 위에 큐와 공을 올려놓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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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딸들, 밝게 자랐으면…당구선수 원하면 시켜”

당구에 관한 진진한 이야기를 하던 허정한은 가족, 특히 두 딸의 이야기에 활짝 웃었다. 그는 2010년 여성 당구선수 정문영 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후 첫째 딸 서진(7살), 민성(3살)양이 차례로 세상에 나왔다. 두 딸 모두 아빠‧엄마를 닮아 조용하고 순한 성격이란다.

“아빠가 유명 당구선수인지 알아요. 제가 TV에 나오면 엄마가 얘기해 주거든요. 서진이 유치원버스 운전기사님이 제가 서진이 아빠인걸 알고 크게 놀라기도 했대요. 하하.”

그런 가족에게 한마디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얼굴을 손으로 덮으며 대답을 꺼렸다. 살가운 말이 낯설고 어렵단다. “아내한테는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 하는 거 고맙고, 아이들은 속 썩이지 않아서 고맙고... 더 이상은 쑥스러워서 못하겠네요” 겨우 꺼낸 한마디였다.

“가족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했으면 해요. 아내와도 지금처럼 잘 지냈으면 하고요. 나중에 아이들이 건강하고 곱게 자라 남에게 피해 주지않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여기에 더해 이해심 많고, 긍정적인 면이 많은 밝은 사람으로 자라준다면 더 바랄 것도 없고요. 당구선수든 뭐든 본인들이 원하는 게 있으면 뒷바라지는 해 줄 것입니다. 공부는 아이들이 하고싶으면 하는 거고요.”

3시간에 가까운 인터뷰 말미에 기자는 허정한에게 예전 기사 하나를 보여줬다. 2006년 그가 했던 인터뷰였다. 그는 당시 “한국당구 대부가 되겠다. 먼 훗날 한국당구의 큰 힘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지금의 허정한은 “그 꿈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했다.

“당구선수를 그만두더라도 한국 당구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왕 큐를 들었으니, 당구로 인생을 끝내고 싶어요. 그게 제 가장 큰 목표입니다. 나아가 60, 70세가 되도 큐들고 게임을 즐기는 ‘영원한 당구인’이 되고 싶습니다.”

[MK빌리어드뉴스 이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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