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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인의 페르시아 산책](4) 바위에 새긴 불멸의 욕망 ‘마애부조’를 찾아서 - ‘불로불사’ 꿈꾸던 황제는 회색빛 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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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인의 페르시아 산책](4) 바위에 새긴 불멸의 욕망 ‘마애부조’를 찾아서 - ‘불로불사’ 꿈꾸던 황제는 회색빛 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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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왕권을 받았다는 다리우스도, 로마를 무참히 짓밟은 샤푸르도…결국엔 ‘인간’
신의 자리에 오른 황제가 신과 다른 점은 죽음의 유무가 아닐까. 황제는 필멸이요, 신은 불멸이다. 황제는 의심이 많았을 것이다. 스스로 신격화했으나, 그가 신이 아니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만일에 대비해 영혼이나 천당 같은 ‘불멸성 보장 보험’에 기대보기도 한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불멸은 없을까. 그는 세월의 풍화 작용을 견뎌낼 기념비적 유산(legacy)을 남기기로 한다. 기원전 522년. 다리우스(성경이름 ‘다리오’) 황제는 사람 손이 닿지 않는 높은 절벽의 바위에 ‘내가 누구인지를’ 돋을새김했다. 유한한 삶을 바위의 불로불사 속에 새겨넣었다. 그것은 유통기한이 긴 기억이 될 것이었다.

비시툰 입구의 헤라클레스상(像).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페르시아인은 헤라클레스를 좋아했고, 현대 이란인은 지금도 고대 올림픽 종목인 레슬링을 좋아한다.

비시툰 입구의 헤라클레스상(像).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페르시아인은 헤라클레스를 좋아했고, 현대 이란인은 지금도 고대 올림픽 종목인 레슬링을 좋아한다.

■헬로, 헤라클레스

드넓은 평원을 지나다 보면 우뚝 서 있는 산이 나타난다. 이란 북서부 케르만샤 인근의 비시툰(신의 거처)이다. 대장정에 지친 대상과 병사들의 쉼터였을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대동맥, 미래의 비단길인 ‘왕의 길’ 길목이기 때문이다. 깎아지른 수직 절벽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그 중간 높이에 절벽을 칠판 삼은 비문이 있다.

차에서 내리면 헤라클레스가 제일 먼저 반겨준다. 배부른 달마처럼 편한 자세다. 그리스 문화의 영향이다. 페르시아인은 헤라클레스를 좋아했고, 지금도 이란인은 레슬링을 좋아한다.

모퉁이를 돌면서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공사 중’. 나무 성벽 같은 것이 다리우스 비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곳으로 오르는 계단도 폐쇄됐다. 이란에서는 너무 많은 유적이 공사 중인데, 공사 기간은 부지하세월이다.

나크시에로스탐에 있는 마애부조. 로마 황제가 페르시아 황제 샤푸르 1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나크시에로스탐에 있는 마애부조. 로마 황제가 페르시아 황제 샤푸르 1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비시툰 비문, 고대문자 해독의 꽃

고대 페르시아 제국 시절의 비문들 가운데 비시툰 비문은 ‘고대문자 해독의 꽃이자 여왕’이다. 가장 긴 1만8900개의 단어로 구성됐다.

다리우스는 천하를 평정한 일화를 글과 그림으로 보여준다. 왼발로는 왕을 사칭했던 가짜 왕을 지르밟고 있다. 그 뒤로 반란을 일으켰던 8명의 호족들을 포승줄로 묶어 굴비 두름처럼 한 줄로 세워놓았다.


가장 중요한 삽화는 다리우스가 아후라 마즈다에게 왕권을 상징하는 링을 받는 장면이다. 다리우스는 적장자가 아니라 권력투쟁으로 대권을 잡은 방계 혈통 출신의 왕족이다. 신으로부터 권력을 하사받았다는 ‘자소서’를 통해 정통성에 대한 약점을 보완하고 싶었던 게다.

다리우스는 이 이야기를 세 종류의 문자(엘람어·바빌로니아어·고대페르시아어)로 적었다. 그 이전의 어떤 나라에서도 자신들의 언어가 아닌 것을 비문에 새긴 적이 없었다.

각개격파로는 어느 하나 해독할 수 없었던 고대 언어들이 서로를 비추면서 봉인을 해제했다. 서양인은 그때까지 성경과 그리스·로마의 역사책을 통해 페르시아 역사를 썼다. 이제 페르시아 황제가 그의 육성을 원음으로 들려주기 시작했다.


사산 왕조 조각예술의 보고인 타게보스탄의 비문 앞에서 석공이 ‘아찔한’ 망치질을 하고 있다. 머리 위 마애부조는 ‘제왕 서임식’ 같다. 조로아스터교의 신으로부터 왕권을 상징하는 링을 건네받고 있다.

사산 왕조 조각예술의 보고인 타게보스탄의 비문 앞에서 석공이 ‘아찔한’ 망치질을 하고 있다. 머리 위 마애부조는 ‘제왕 서임식’ 같다. 조로아스터교의 신으로부터 왕권을 상징하는 링을 건네받고 있다.

■죽은 자들의 도시, 나크시에로스탐

페르세폴리스 인근 나크시에로스탐(로스탐의 그림)은 그리스인들이 ‘네크로폴리스’(죽은 자들의 도시)라고 부르는 곳이다. 다리우스·크세르크세스·아르타크세르크세스 등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왕 4명의 무덤이기 때문이다.

돌산을 병풍처럼 깎은 뒤 높은 곳에 굴을 파서 왕의 가족묘로 삼은 바위 속 무덤이다. 독수리가 다 뜯어먹고 남은 왕의 뼈를 모아 넣었으리라. 새들은 여전히 무덤 속을 드나들며 지저귀고 있었다.

그 왕들의 제국은 훗날 알렉산더에게 망한다. 선조들의 제국을 계승한 사산 왕조(AD226~651)는 다리우스 왕의 무덤 왼쪽 아래에 선조들의 영웅담을 8점의 마애부조로 새겨놓았다. 이곳의 부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아르다시르 1세의 서임식’이다. 왕과 신(아후라 마즈다)이 각각 말을 타고 있다. 왕은 신과 대등한 자세로 선물을 받는다.


■타게보스탄, 사산 왕조 조각예술의 보고

케르만샤 시내에 타게보스탄(아치의 파라다이스)이 있다. 바위 비문의 전성시대였던 사산 왕조의 조각예술은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비시툰에서 30㎞ 거리다. 자동차로 ‘왕의 길’을 달리면 잠깐인데, 고대 페르시아에서 AD6세기의 중세 페르시아에 도착하는 것이다.

석굴 안에 새긴 ‘제왕 서임식’이 인상적이다. 중앙의 왕과 양옆 신들이 모두 정면을 향하고 있다. 아후라 마즈다와 아나히타 여신이 각각 왕관을 왕에게 건네고 있다. 석굴 양쪽 벽에는 왕이 멧돼지와 사슴을 사냥하는 장면이 새겨졌다. 코끼리를 탄 사람들이 왕 쪽으로 멧돼지를 몰아준다. 왕은 배에서 멧돼지에게 활을 겨눈다. 왕 주변의 작은 배에서 악사들이 연주하고 있다.

왕을 알현할 땐 바닥에 입을 맞추고, 손수건이나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다가 왕의 허락이 떨어지면 말했다. 알현이 끝나면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로마황제를 사육한 비샤푸르의 부조

페르세폴리스와 수사를 육로로 가게 된다면, 알보르즈 산맥을 넘다가 비샤푸르(샤푸르가 만든 도시)를 들러보시라.

사산 왕조의 제2대 왕인 샤푸르 1세(재위 241~272)는 로마에게 3전3승을 거둔 ‘로마 킬러’였다. 그는 로마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를 죽였다. 다음 황제 필리푸스가 평화조약을 구걸하자 전쟁 배상금으로 50만 황금 동전을 청구했다. 이어 에데사(지금의 터키 남부) 전투에서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생포했다. 이란인 가이드에 따르면, 샤푸르는 1년에 한 번 신도시를 방문했다. 로마 황제는 페르시아 황제가 말에서 내릴 때 엎드려 자신의 등을 밟고 내려오도록 했다고 한다.

궁터에는 잡초와 키 작은 들꽃이 무성했다. 주춧돌이 일부 남았을 뿐이다. 돌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저수조다. 산맥의 눈 녹은 물을 끌어들인 것이다. 꼭대기에 있는 동물의 입에서 물이 떨어져내렸을 것이었다. 저수조 돌담 사이사이에는 야생화 몇 포기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로마 황제는 왜 자살하지 않았을까. 1년에 한 번 ‘디딤돌로서의 치욕’만 참아내면 나머지 세월엔 황제 노릇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자신의 삶 자체가 전쟁포로로 잡혀온 로마인에게 희망이기 때문이었을까. 자신의 저항이 전쟁포로로 잡혀온 다른 로마인에게 불이익을 줄지도 모른다는 판단 때문이었을까.

샤푸르는 비샤푸르의 강 양쪽 바위에 6개의 부조를 만들었다. 왼쪽 기슭 부조에서는 3명의 로마 황제를 한 화면에 배치해 승리의 기쁨을 극대화했다. 그게 ‘샤푸르의 승리’다.

궁터 맞은편에 부조가 있다. 역시나 ‘공사 중’이었다. 철제 파이프가 암벽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암벽으로 물이 흘러내리면서 암벽이 그을린 듯 검었고, 그림도 많이 문드러진 듯했다.

■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승자도 패자도 결국엔 다 죽을 운명인 것을.

바위인들 영원할까. 모래를 몰고 다니는 바람은 영원한 것일까. 오늘의 바람은 어제의 바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미래에는 삶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기가 불가능할 것 같다. 잊힐 권리가 없다면 후회스러운 말조차 인터넷 공간에서 원치 않는 영생을 할 게 아닌가.

■언어 아닌 암호로 접근하니…‘비시툰 비문’ 봉인이 하나씩 풀려

동방의 고대 언어를 연구한 유럽 학자들은 대개 ‘동방인=야만인’임을 증명하고 싶었던 오리엔탈리스트들이었다. ‘유럽인’이라는 자의식 자체가 고대 그리스 때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각성된 터였다.

1621년 처음으로 쐐기문자 탁본을 뜬 이후, 그 쐐기문자들이 한 종류가 아니라 세 종류라는 사실을 알아내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19세기 초 쐐기문자가 알파벳이 아닌 음절문자라는 것이 드러났다.

고대 페르시아어 문자. 다리우스는 자신의 비문을 위해 이 문자를 만들었다.

고대 페르시아어 문자. 다리우스는 자신의 비문을 위해 이 문자를 만들었다.

연구자들은 비문에 왕의 이름과 왕을 칭하는 ‘왕 중 왕’이란 관용구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다리우스’ ‘크세르크세스’ 같은 이름이 제일 먼저 판독됐다.

1830년대에 영국 군인이 다리우스의 비시툰 비문을 발견했다. 그는 절벽을 기어올라 로프에 매달려 탁본을 떴다. 10여년간의 연구 끝에 암호와 수수께끼 같은 언어들을 일부 해독했다고 한다.

비시툰 비문의 언어를 해독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바빌로니아어와 엘람어가 각각 ‘고립어’이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중엽에 고대 페르시아어가 거의 읽혔다. 이를 토대로 다른 문자들의 음가(音價)를 하나씩 확보해나갔다. 언어학이 아니라 암호학의 방법론으로 문자의 소리를 밝혀냈다.

쐐기문자 판독은 수메르어(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언어) 판독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26세기쯤 수메르인들이 점토판에 썼던 세계 최초의 영웅서사시 ‘길가메시 이야기’는 그 이전까지 지렁이 글씨의 집합에 불과했다.

‘많이 보던’ 삽화들이 나타났다. 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의 창조, 여자의 유혹과 성, 신만이 갖고 있던 지혜의 습득, 대홍수로 인간을 절멸시키려는 신의 계획, 대홍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

구약의 말씀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일까. 오리엔탈리스트들이 ‘닫혀라 참깨’라는 주문을 외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페르시아 제국이 당시 글자·문명·문화를 한자리에 모아놓은 덕분이었다.





■필자 김중식

1990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하고, 1993년 첫 시집 <황금빛 모서리>를 냈다. 최근 3년 반 동안 주이란 한국대사관 문화홍보관으로 근무했다. 이란 재임 중 페르시아 신화와 문화 관련 답사기행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글·사진 김중식 시인 uuyouu@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