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기 첫 대회 출전한 황우겸씨
개성에서 예선, 동대문서 본선… 글러브 뚫려 눈 맞고 기절한 적도
첫 선수 출신 아나운서로도 유명
"고교 야구가 프로 발전 원동력"
강산이 일곱 번 변하는 70년. 올해로 70회를 맞는 청룡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의 70년 전 모습은 어땠을까.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열린 1회 대회 때 인천 동산중학교(현 동산고) 야구부 멤버로 참가한 황우겸(86)씨는 "장비도 경기장도 형편없었지만 야구에 청춘을 불태우는 모습은 지금과 다를 것 없다"고 했다. 그는 경기도 예선을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학교와 치렀다. 그 당시 개성은 경기도였다. 고등학교 없이 중학교가 6년제였던 시절, 3학년(현재 중3)이던 그는 1회부터 4회(1949년) 대회까지 동산중 3루수로 출전했다.
70년 전 청룡기 첫 대회에 동산중 야구부로 출전해 4년 연속 뛰었던 황우겸씨. /남강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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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씨는 "야구가 정말 재밌었다. 그게 전부다"라고 했다. 원래 유도부였던 그는 야구부 창설 때 '어깨가 튼튼해 보인다'는 감독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했다. 당시 고교에서 야구하는 팀이 드물어 연습경기는 주로 미군과 했다. 미군은 경기가 끝나면 쌓아두었던 낡은 배트와 글러브, 공을 주기도 했다. 그는 "가끔 우리가 시합에서 이기면 장비를 주지 않는 경우도 있어서 일부러 지기도 했다"면서 "낡은 글러브가 끊어져 날아오는 공에 눈을 맞고 기절한 적도 있다"고 했다. 야구부는 등·하교 때도 유니폼을 입었다. 어깨에 짊어진 배트에 책가방을 걸고 다니면 사람들이 "야구부다, 야구부"라고 속삭였다.
본선 대회가 열렸던 동대문야구장 관중석은 좌석도 없는 황무지 언덕으로 그는 기억하고 있다. 그래도 관중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인천, 심지어는 부산에서 종일 기차 타고 온 가족과 친구, 동문들이 응원했다. 그는 "3루 수비를 볼 때면 관중 속에서 물병과 모래주머니가 날아왔다"며 "삼진 하나, 도루 하나에도 온 국민이 울고 웃던 시절"이라고 했다. 그는 "모든 것이 미흡했던 그 시절에 고교 야구에 관심과 사랑이 쏟아진 건 황무지에서 꽃이 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도 했다.
좌석도 없이 간이 울타리 하나 치고 언덕에 앉아서 보았던 그 무렵의 관중석. /조선일보 DB |
그는 1951년 KBS에 아나운서로 입사해 국내 최초의 '선수 출신 야구 아나운서'로 각광받았다. 그가 야구를 중계하던 시절, 동산고 후배들은 1955~1957년 청룡기에서 3년 연속 우승했다. 그러자 "동산중 출신이 편파 중계를 해서 동산고가 계속 우승한다"는 항의가 방송국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유일한 야구 전문 아나운서였던 그의 목소리에 국민은 귀를 기울였다. 그는 "화장실에 갈 수가 없어 중계석에서 소변을 봤다"며 "하루는 '출산 중인 아내의 생명이 위험하니 태아와 산모 중에 선택하라'는 쪽지가 중계석으로 왔지만, 차마 현장을 떠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첫 아이를 그렇게 떠나보냈다고 한다.
"고교 야구가 발전해야 프로야구도 더 발전합니다." 황우겸씨는 "어린 선수들이 꿈을 키우며 뛰는 고교선수권대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임경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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