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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희의 밥그릇이다 - 밥그릇에 담긴 밥벌이 이야기] 뜨끈한 국밥, 봄처럼 훈훈하게 내 속을 데워

조선일보 강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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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희의 밥그릇이다 - 밥그릇에 담긴 밥벌이 이야기] 뜨끈한 국밥, 봄처럼 훈훈하게 내 속을 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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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모든 국은 어쩐지/ 괜히 슬프다/ 왜 슬프냐 하면/ 모른다 무조건/ 슬프다

김영승, '슬픈 국' 중에서.

바닷바람 가득한 해운대 뒷골목, 버스 종점 옆 시장 골목에 들어서면 할머니 얼굴을 내붙인 국밥집이 즐비하다. 이곳을 알게 된 건 이 동네에서 강의가 있는 날이면 국밥 먹을 생각에 신이 난다며, 자기소개를 하다 말고 맛집 소개에 열을 올리던 어떤 강사 덕분이다. 검은 비닐봉지에 꽁꽁 싸맨 국밥을 '테이크아웃'해 가는 재미로 강의하러 온다는 그의 말에 솔깃하여, 나 홀로 쭈뼛대며 들어선 식당 내부는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는 국물의 훈기와 구수한 냄새가 그득했다.

혼자 온 손님이 민망할세라 살갑게 말을 걸어주는 아주머니에게 소고기국밥을 주문했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테이블을 차지한 일행들 사이에 나 홀로 점심족(族)이 드문드문 섞여 있다. 그 가운데 산만 한 덩치의 그가 있었다. 혼자 앉은 그의 옆 의자에 검은색 서류가방과 함께 회사 로고가 박힌 쇼핑백에 판촉물인 듯한 자질구레한 꾸러미들이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다. 흠, 제약회사 영업사원이구먼. 순간 파악해버린 그의 직업에서 느껴지는 반가운 동지 의식. 영업사원은 아니었지만 나 역시 약을 만들고 파는 회사에서 천금 같은 청춘 십여 년을 보낸 터였다.

그와 내 테이블에 거의 동시에 국밥이 도착했다. 아담한 '스뎅' 쟁반 위에는 넘치도록 퍼 담은 뜨끈한 국밥 한 그릇, 반찬 그릇 두 개와 생뚱맞은 요구르트 한 병이 놓여 있다. 수북이 담긴 콩나물과 나박나박 썰어 넣은 무 사이로 제법 튼실한 소고기 고명마저 푸짐한, 진짜배기 시장 국밥이다. 제대로 토렴하여 국물과 혼연일체가 된 밥 한술을 떴다. 크아, 이 맛이지! 보기에도 얼큰한 빨간 국물은 생각보다 담백하고 시원하다. 각각의 재료가 이질감 없이 한데 어울리도록 충분히 오래, 넉넉하게 끓인 덕분이다. 과연 한 번도 못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는 사람은 없다는 마성의 국물이다. 허겁지겁 테이블 위에 놓인 반찬통에서 깍두기와 마늘종 무침을 덜어내는데, 옆자리 영업사원은 국밥에 아직 손도 대지 않은 눈치다. 아니 이 황홀한 비주얼을 보고도? 호기심이 동하여 슬쩍 바라본 그의 옆얼굴이 생각보다 앳되다.

가까이서 보니 덩치만 크지 순둥이 같은 옆얼굴에 학생이 처음 정장을 해 입은 듯 어색한 양복 차림이 영락없는 신입 사원이다. 아, 그렇구나. 영업사원이 이 시간에 점심을 혼자 먹는다는 뜻은, 고객인 의사들과 만날 수 있는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인 점심 미팅을 공쳤다는 의미다. 풀 죽은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영업맨 동료 한 명이 들려주던 국밥집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그날도 별 소득 없이 회사에 들어가기 뭐해 일부러 늦은 점심시간에 회사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외진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테이블 너머 등을 돌리고 앉은 낯익은 신입의 모습이 눈에 띄더란다. 알은척을 하려고 그의 등 뒤에 다가선 순간, 유난히 넓은 그의 어깨가 흔들리는 것을 눈치채고 말았다. 입사 6개월 차, 유난히 숫기 없고 순해 터진 데다 말주변도 없어 어떻게 영업직을 지원했나 싶던 그는 고객과 지점장에게 이래저래 깨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터였다. 이런….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목에 우겨 넣듯 국밥을 밀어 넣고 있는 거였다. 선배였던 그는 다 큰 남자가 흘리는 눈물을 차마 알은척할 수 없어 조용히 그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날 이후 국밥만 보면 서툴고 서러웠던 초짜 시절이 생각난다고 했다.

내 옆의 이 청년도 그런 날 중에 어떤, 고단한 날을 보내고 있는 걸까. 풀 죽은 그의 모습에 괜스레 내 맘도 짠해졌다. '얼른, 국밥 한술 들어봐요.' 맘속으로 조용히 말을 걸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밥이라도 맛있게 먹어야지.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멍하니 있던 그가 아직 따끈한 국밥을 한술 뜨더니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뜨겁고도 시원한 국밥은 말 없이 어깨를 두드려주는 선배처럼 고단하고 서글픈 맘까지 훈훈하게 채워줄 것만 같다.


탕반(湯飯)의 민족인 우리에게, 밥과 국을 따로 퍼담을 것도 없이 한데 말아 후다닥 먹어 치우는 국밥은 역사 깊은 패스트푸드이자, 일하는 자를 위한 가장 든든한 응원군이기도 하다. 귀한 쇠고기를 맘껏 먹을 수는 없지만, 남은 고기와 뼈를 푹 고아낸 국물에 무와 콩나물, 고사리 같은 각종 채소를 넣고 밥을 말아 넣은 국밥은 고단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의 헛헛한 속을 든든하고 훈훈하게 채워주었다. 그래서일까? 정신없는 한 주의 시작, '마음의 점을 찍는다'는 점심(點心)의 여유를 누리기도 버거운 월요일이면 회사 앞 국밥집은 유난히 문전성시를 이뤘다.

다행히 긴 연휴의 끝은 차가운 겨울바람도 함께 몰고 가버린 듯하다. 아직 무거운 코트를 벗을 수는 없지만, 간간이 내리는 가랑비에 부쩍 봄기운이 느껴지는 주말이 왔다. 앞서 슬픈 국을 노래한 김영승 시인은 위로처럼 이렇게 덧붙였다.

고깃국은…./ 봄이다. 고깃국이.

이런 계절엔 그저 뜨끈한 국밥이다. 뜨끈한 국물의 위로와 함께, 고깃국에 담긴 시인의 봄도 만나면 좋겠다.

강종희 작가는 PR 컨설팅기업 에델만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뉴스위크’ 기자를 거쳐 다시 브랜드·기업 PR로 10여년이 넘는 경력을 쌓았다. 현재는 커뮤니케이션 관련 강의와 컨설팅을 하고 있으며 최근 ‘어이없게도 국수’란 책을 펴냈다.

[강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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