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우 문화재자료연구소장과 함께한 정동길 답사
서울 정동처럼 좁은 지역에 밀집된 역사의 현장을 간직한 곳도 드물다. 덕수궁과 경희궁 사이에 있는 정동 거리를 걷다보면 한 순간도 역사의 숨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디를 가든 조선 500년과 근대 100년 동안 이 거리를 누빈 임금과 신료들의 한탄과 음모, 병사들의 잰 발걸음 소리, 민초들의 놀란 눈, 개항기 이후 불쑥 나타난 서양인들의 얼굴을 만나게 된다.
정동이라는 지명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묘 정릉(貞陵)을 이곳에 조성한 것에서 비롯됐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본부가 주둔했다. 하지만 정동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개화기 때부터다. 19세기말 개항과 동시에 외국인을 가장 먼저 맞이한 곳이 바로 정동이다. 한국을 무대로 외교 각축을 벌이던 미국과 영국, 러시아 등 열강의 외교공관이 잇따라 들어섰고, 뒤이어 선교사들이 들어와 선교와 교육, 의료 활동을 펼쳤다. 철도와 전화, 신문 등 서양의 이기와 문화가 처음으로 선보인 곳도 이곳이다. 지난달 31일 정동의 역사를 더듬어온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 이순우 소장과 함께 나선 정동길 답사에서도 그 면면한 역사의 숨결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동길은 크게 세 곳으로 뻗어있다. 서대문 터 근처인 경향신문사에서 시작돼 덕수궁 대한문 앞까지 이어지는 정동길이 중심이다. 경향신문사 사옥과 이웃하고 있는 프란체스코 교육회관에는 1894년 외교관들의 사교모임인 외교구락부가 있었다. 서울 주재 외교관에 한해 회원자격이 주어졌는데, 당구장이 처음 들어온 곳이기도 하다. 20m쯤 내려간 맞은편 창덕여중에는 프랑스 공사관이 있었다. 1899년 준공된 이 공사관은 서울 성곽 안쪽 언덕 위에 있었는데, 성벽 아래에는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종착역 서대문정거장이 있었다. 서양 공사관 중 가장 빼어난 외관을 자랑해 외국인들 사이에 서울의 상징으로 통했다.
정동이라는 지명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묘 정릉(貞陵)을 이곳에 조성한 것에서 비롯됐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본부가 주둔했다. 하지만 정동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개화기 때부터다. 19세기말 개항과 동시에 외국인을 가장 먼저 맞이한 곳이 바로 정동이다. 한국을 무대로 외교 각축을 벌이던 미국과 영국, 러시아 등 열강의 외교공관이 잇따라 들어섰고, 뒤이어 선교사들이 들어와 선교와 교육, 의료 활동을 펼쳤다. 철도와 전화, 신문 등 서양의 이기와 문화가 처음으로 선보인 곳도 이곳이다. 지난달 31일 정동의 역사를 더듬어온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 이순우 소장과 함께 나선 정동길 답사에서도 그 면면한 역사의 숨결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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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정동길이 3일 덕수궁과 정동제일교회(분수공원 뒤 빨간 벽돌건물) 등 근대 문화유산들을 길 양쪽에 거느린 채 개화기 외교와 정치의 중심지인 정동 일대를 휘감아돌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
정동길은 크게 세 곳으로 뻗어있다. 서대문 터 근처인 경향신문사에서 시작돼 덕수궁 대한문 앞까지 이어지는 정동길이 중심이다. 경향신문사 사옥과 이웃하고 있는 프란체스코 교육회관에는 1894년 외교관들의 사교모임인 외교구락부가 있었다. 서울 주재 외교관에 한해 회원자격이 주어졌는데, 당구장이 처음 들어온 곳이기도 하다. 20m쯤 내려간 맞은편 창덕여중에는 프랑스 공사관이 있었다. 1899년 준공된 이 공사관은 서울 성곽 안쪽 언덕 위에 있었는데, 성벽 아래에는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종착역 서대문정거장이 있었다. 서양 공사관 중 가장 빼어난 외관을 자랑해 외국인들 사이에 서울의 상징으로 통했다.
망루만 남은 옛 러시아 공사관
외교 공관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옛 러시아 공사관이다. 1890년 완공된 러시아 공사관은 정동길 언덕에 자리잡아 한눈에 서울을 내려다보았다. <한국과 이웃나라들>(1897)의 저자인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높은 탑과 화려한 정문은 이 도시에서 매우 이채로운 건물’이라고 묘사했지만, 지금은 망루만 남아있다. 이곳이 결정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아관파천 때였다. 1896년 2월11일 새벽 고종과 왕세자인 순종은 인천에 와 있던 150명의 러시아 수병의 호위를 받으며 극비리에 러시아 공관으로 옮겼다. 일국의 왕과 왕세자가 왕궁에 있지 못하고 외국 공관에 피신하여 타국 군대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나라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소장은 고종이 아관파천길을 통해 피신했다는 통설은 잘못됐다고 한다. 현재 미국대사관저 북쪽의 쪽문에서 옛 러시아 공사관에 이르는 구간인 ‘아관파천 길’은 피신로가 아니라 아관파천 기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과 덕수궁을 오갈 때 이용한 안전통로였다는 것이다. 러시아 공사관 터와 붙어있는 현재의 미 대사관저는 1883년 미국 공사 푸트가 민계호의 집 등 여러 채의 집을 사들여 국내 최초로 개설한 외국 공사관인 미국공사관이 있었던 곳이다. 이 소장은 “원래 있던 미국공사관 본관을 헐고 들어선 게 현 대사관저인 하비브하우스”라며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옛 공사관의 별관”이라고 말했다. 정동극장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미 대사관저 곁에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인 중명전은 원래 고종을 위해 도서관으로 지어진 건물로, 1907년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현장이기도 하다.
여성 교육의 요람 ‘이화학당’
서양 문물이 처음 도입된 이곳에 ‘한국 최초’라는 수식이 붙은 근대 기관이 있던 자리가 몰려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알렌이 미국 공사관의 주치의로 중명전에 들어오면서 미국 장로교계의 종교 및 의료기관, 교육기관, 호텔 등이 이곳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외교관과 병사들을 위한 러시아 정교회가 지금의 경향신문 사옥 자리에 세워졌고, 공사관 앞에는 한국 최초의 수녀원도 있었다. 정동길을 중심으로 지금의 예원학교 쪽은 장로교가, 그 건너편은 감리교가 자리를 잡았다가 덕수궁의 확장으로 운명이 갈렸다. 장로교는 자리를 비워줘야 했던데 비해 정동교회와 한국 여성 교육의 요람인 이화학당 등 감리교 건물들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자리에 있던 손탁 호텔 역시 정동 거리에서 한 획을 그은 명소였다. 초대 러시아 공사로 아관파천의 주역인 베베르의 처형인 손탁(Miss Sontag)은 1885년 32세의 처녀로 한국에 와 25년 동안 살며 1902년 서울 최초의 서양식 호텔을 지었다. 당시 유일한 영빈관이었던 이곳을 이토 히로부미도 이용했으며, 러일전쟁 때는 훗날 영국 총리가 된 처칠도 묵은 바 있다.
굴곡의 역사 ‘시립미술관 자리’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사립교육기관인 배재학당 터(지금의 배재공원)와 서울시립미술관 사잇길은 유달리 변화가 많았던 곳이다.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정동교회에서 배재학당터로 이어지는 길은 당초 서양인들이 ‘파인 스트리트(pine street)’로 불렀다. 배재학당 앞에 있던 향나무를 소나무로 오인한 탓인데, 그 나무 때문에 이 일대는 ‘왜송동’으로도 불렸다. 수령이 565년인 이 향나무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말을 묶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자리는 유난히 주인이 자주 바뀐 굴곡 많은 역사의 현장이다. 최초의 민간신문사인 독립신문이 이곳에 자리잡아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과 함께 정동을 근대 언론의 발상지로 만들었다. 매국노 이완용이 첫 학생으로 입학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학교인 육영공원도 이곳에 있었다. 이후 독일영사관을 거쳐 일제 강점기에는 토지조사국이 있던 총독부 정동 분실과 경성지방법원이 차례로 들어섰다가 해방 후 대법원 청사로 쓰였다. 친일파 귀족들의 모임인 조선총독부중추원과 식민사관을 편 조선사편수회가 있었다는 점에서 정동은 식민통치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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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의 또다른 옆길인 영국공사관(현 대사관)·성공회 서울성당 길 역시 근대사의 흔적이 배어있는 곳이다. 국내 유일의 로마네스크 양식 건축인 서울성당을 지나면 덕수궁의 북문이었던 영성문 자리가 있다. 경복궁과 영국, 미국, 러시아 공사관과 통하던 영성문은 지금의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에 버금갈 만큼 화려했으나 일제가 1920년 주변 땅을 사들여 헐어버렸다.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1954)에 영성문 길이 전에는 청춘 남녀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길이었다고 묘사된 것을 보면 지금의 덕수궁 돌담길이 데이트 코스가 된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근대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최근 정동길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는 5월 문화재청의 근대유산 관련 행사에 이어 하반기에는 서울역사박물관의 ‘정동1900’ 특별전 등이 기다리고 있다. 중명전에 있는 문화유산국민신탁은 이에 맞춰 정동 답사객들을 위한 도보 탐방프로그램을 운영한다. 10명 이상이 예약하면 역사해설사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 7~8월, 12~3월은 휴무이다.
<주영재 기자 jyeong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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