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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_희곡당선작/ 당선소감 심사평] 그들의 약속

조선일보 정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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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_희곡당선작/ 당선소감 심사평] 그들의 약속

서울맑음 / -3.9 °
물건은 확실히 제대로 챙겨 왔어요?… 한번에 끝냅시다. 다음엔 제대로 태어나자구요
잠깐만요! 그래도 한날 한시에 죽는 사인데…잘 살아왔다고 위로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등장인물
최대성 ID S라인. 40대 초반의 남자.
김예진 ID 하루키. 30세 여자.

장소
서울의 어느 칙칙하고 누추한 여관방

* 최대성이 담배를 피우며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릴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고 신경을 바짝 세운다.
 잠시 후 노크소리, 똑똑.

최대성 (심호흡하고 노크) 똑똑똑

문 밖 노크소리, 똑똑똑.

최대성과 문 밖 노크소리가 한 번씩 교차로 똑-똑-똑-똑, 반복되자
 이내 안심하고 곧 결의에 찬 표정으로 바뀐다.

최대성 …… 하루키?
문밖 S라인!

최대성은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눈을 꾹 감은 채 문을 활짝 연다.
문이 열리자 최대성처럼 눈을 꾹 감고 서 있는 여자, 김예진.
둘은 거의 동시에 눈을 뜨고 서로를 확인하고 놀란다. 동시에

최/김 여자야? / 남자야?

김예진 (멍하다가) 저, 여기 혹시 S라인이라고…….

최대성 제가 S라인인데요.

김예진 네? 그쪽이 S라인?!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뭐야? 이거 완전 사기 아냐?

최대성 뭐? 사기? 이 사람이 날 언제 봤다고 대뜸 사기야?

김예진 S라인이라면서요? 사기 아님 변태야?

최대성 벼, 벼언태?

김예진 세상에 어떤 남자가 아이디로 S라인을 써요?

최대성 남자는 S라인 쓰면 안 된다는 법 있어?

김예진
 뭐가 그렇게 당당해요? 변태 주제……

최대성
 아니 어따 대고 계속 변태, 변태야?! 그러는 그쪽은? 뭐? 하루키? 참나…… 부라퀴도 아니고.

김예진
 하루키는 유명한 작가 이름이라구요! 무라카미 하루키! 현대사회의 고독과 허무를 그린 <상실의 시대>를 쓴 작가라구요. 모르면 가만히나 있지, 무식한 거 자랑하구 있나.

최대성 네에, 그러세요? 아이고 무식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그렇게 유식하신 분께서는 뭐가 아쉬워 예까지 오셨수? 저야 무식해서 지금 당장 죽어도 아쉬울 게 없다지만, 어째 유식하신 분께서……

김예진 (그만 울음을 터뜨린다.)

울음소리가 너무 커서 순간 놀란 최대성.
아예 주저앉아 서럽게 우는 김예진의 모습에 당황하기 시작한다.

최대성 (어찌 달래보려고 애쓰며) 어, 어이 아가씨, 아니 부라퀴, 아니 하, 하루키 씨 그, 그만 해요.

김예진 (바닥까지 쳐가며 더 크게 운다.)

최대성 하, 그, 참…….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다니까. 옆방 들을라. 내가 나쁜 놈도 아니고……. 뭐 자살이 착한 짓도 아니지만, 아니 뭔 말이야. 암튼 옆방 듣겠어요. (계속 운다.) 하아참, 이러다 주인 올라오겠네. 그럼 우리 쫓겨나요. 죽지도 못하고 쫓겨난다니까요!

순간 울음을 뚝 그친 김예진, 방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코를 팽하게 풀고 앉는다.

약간 어이없는 최대성, 울음이 그치자 안심이 되는지 헛웃음이 나는 것도 같다.

최대성  (김예진 옆으로 가서 앉으며) 하긴, 곧 죽을 사람들인데 남자면 어떻고 여자면 어때. 안 그래요?

김예진  (무시하고) 물 좀 주세요. 너무 울었더니 목이 다 아프네.

최대성  (가방에서 소주를 꺼내 따라주며) 물보다 이게 나을 걸요?

김예진  (단숨에 마시고 잔을 머리 위에 털며) 크…… (방안을 빙 둘러보며) 무슨 여관이 이리도 후져?

최대성 그나마 여기가 아직 단속이 덜 해서 안전하다구요. 그 정도 사전정보도 없이 자살하려 했나. (김예진의 빈 잔을 보며) 간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죠!

김예진 (잔을 채워주며) 물건은 확실하게 가져 왔어요?

최대성 그쪽이야말로 제대로 챙겨 왔어요?

김예진 망할 놈의 의약분업! 수면제 달라니까 처방전 없으면 안 된다잖아요! 그래서 수면유도제 사왔어요. 효과가 덜 할까 봐 제일 큰 사이즈 사느라고 돈을 배로 썼다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농약을 맡는 건데.

최대성 농약은 구하기 쉬운 줄 아쇼? 어찌 됐든 준비해 온 거나 꺼내봅시다.

두 사람은 각각 가방과 핸드백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꺼낸다.
검은 봉지에 담긴 수면유도제와 농약. 침묵.

김예진 아까도 말했듯이 효과가 덜 할까 봐 좀 많이 샀어요. 조금 귀찮게 됐지만 그래도 금방이니까……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최대성, 수면유도제와 농약을 반씩 나누어 각자의 앞에 둔다.
 묵묵히 약병을 따고, 손 안 가득 알약을 담는다.
 가만히 있는 김예진에게 눈빛으로 어서 하라고 눈치를 준다.

김예진은 조금 울먹이며 병을 딴다.

최대성 한 번에 끝냅시다. 우리, 다음엔 좀 제대로 태어나 보자구요! (하며 알약을 입에 털어 넣는 순간)

김예진
 잠깐만요!

최대성 (순간 입에서 툭 터져 나오는 알약들)

김예진 이대로 죽긴 너무 하잖아요. 그래도 명색이 한날한시에 죽는 사인데 우린 서로 이름도 모르고…… 왜 죽는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제 말은 이제 저 문밖으로 다신 못 나가는데 그동안 그래도 잘 살아왔다고, 고생 많았다고 위로는 해줘야 할 거 아니에요? 적어도 그 정도의 삶에 대한 예의는 지켜줘야잖아요.

최대성 진짜 가지가지 하네……. 하긴 내일 아침까지 빌린 방이니 그 안에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 부라퀴 씨는 왜 죽으려고 하는 거요?

김예진 매너는 어디 엿 바꿔 드셨나. 적어도 이름부터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부라퀴가 아니라 하루키라구요.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의 하, 루, 키!

최대성 아, 알았어요. 하루키 씨. 이름이 뭐에요? 난 최대성이오. 크게 성공하란 이름인데 쪽박에 피박까지 뒤집어썼네, 젠장.

김예진 전 김예숙, 아니 김예진 이에요.

최대성 김예숙?

김예진 예진이라니까요! 얼마 전에 개명 신청했단 말이에요! 촌스럽게 예숙이가 뭐야.

최대성 김삼순, 이말년도 당당하게 사는 판국에 예숙이가 뭐 어때서.

김예진 쇼 호스트 이름이 좀 세련돼야 폼 나잖아요. 김예진의 명품산책, 김예진의 쇼핑가이드, 김예진의 초이스 컬렉션…… 거기다가 영화배우 손예진, 허준의 예진아씨. 예숙이보다 예진이가 낫잖아요. (한숨) 한 번도 써먹지 못하고 죽게 됐지만.

최대성
 쇼 호스트였어요?

김예진 지망생이요. 정확하게 공채8수생이요. 8년간 홈쇼핑이란 홈쇼핑 회사는 다 지원했어요. 이젠 각 회사 인사부장, 질문 패턴까지 꽉 잡고 있다구요.

최대성 아니 그런데 왜……

김예진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어요? 그러는 그쪽은 어쩌다가……

최대성 쪽박에 피박까지 썼다고 했잖아요. 오나가나 그놈의 홈쇼핑! (다시 술잔을 비운다.)

김예진 홈쇼핑이 왜요?

최대성 사업 다 말아먹고 막판에 죽기 살기로 홈쇼핑 진출했다가…… 돈은 돈대로 떼이고 밀려오는 반품에…… 참나 사람들도 너무 하지. 반품을 하려면 딱 보고 아니다 싶으면 더 먹지를 말아야지. 실컷 다 먹어놓곤 효과가 없다는 둥, 부작용 생겼다는 둥, 사기 같다는 둥…… 대체 누가 더 사기야?

김예진 먹는 장사 했어요?

최대성 먹는 장사라뇨? 이래 봬도 건강기능식품이라구요. 세계 특허를 받은 헬시다이어트껌!

김예진 다이어트 껌?

최대성 (재빨리 호주머니에서 껌 하나를 꺼내며) 이게 그냥 껌이 아니에요. 특히 여성들에게 빠져나가기 쉬운 칼슘과 철분이 요 껌 안에 농축되어 있다구요. 씹으면 씹을수록 뇌가 활발하게 작용해서 식욕도 사라지고 특허 성분으로 위가 수축돼서 밥을 조금만 먹어도 금세 배가 부르게 되니, S라인 되는 건 진짜 시간문제라니까요! 맛은 또 어떻고! 부라퀴…… (순간 김예진, 말 자르며)

김예진 예진!

최대성 아, 그래 예진 씨도 다이어트 해 본 적 있죠? 다이어트할 때 맛난 간식, 입에나 댈 수 있었습니까? 그런데 요 껌은 달콤한 간식으로도 그만이에요. 딸기맛, 망고맛, 초코맛, 허니밀크 그러니까 꿀 탄 우유맛까지 골라 씹는 재미에 자일리톨 성분까지 함유돼 있어 치아건강에도 왔다라니까요!

김예진 (현혹되어) 우와, 정말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저 좀 주세요. 제가요 덴마크, 식초, 황제, 한방, 효소, 최근엔 레몬디톡스까지 안 해 본 다이어트가 없다니까요.

최대성 이제 와서 이게 무슨 소용 있어요?

김예진 하긴 그렇네요.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야…… 암튼, 그래서 아이디가 S라인이구나.

최대성 그러는 예진 씬 왜 부라 아니 하루킵니까?

김예진 아까 말했잖아요. <상실의 시대> 작가 이름이라구요.

최대성 상실의 시대?

김예진 네, 상실의 시대. 제 인생 자체가 상실의 시대죠. 젊음 상실, 의욕 상실, 자신감 상실, 이젠 미래 상실까지…… (다시 한 잔 마시고) 홈쇼핑계의 마이다스의 손, 업계 최고의 쇼 호스트가 되고 싶었어요. 홈쇼핑 녹화까지 해가면서 밤새 모니터하고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까지 바꿨건만…… 이젠 다른 지원자들보다 나이도 많고 사람들 시선에 주변 눈치에…… 엄마…… 우리 딸 쇼 호스트 되면 난 뉴스도 안 보고 맨날 홈쇼핑만 봐야지, 하면서 잔뜩 기대하셨는데…… 아버지가 아무데나 취직해서 시집갈 준비나 하라고 구박해도 그거 다 막아주시고 학원비에 용돈까지 다 대주셨는데…… 저도 양심이 있죠, 언제까지 그렇게 받고만 살아요. 나쁜 자식! 똑같이 백수일 땐 우리 이 난관을 잘 해쳐나가자고 하더니만 취직하고 나니 뭐? 우린 인연이 아닌가 봐? 치사한 놈! 그래, 나도 너 같은 놈하곤 인연 아닌 게 천만다행이다! …… 적어도 그놈보단 잘 되고 싶었는데……

최대성 그런 놈은 꼭 자기 같은 여자 만나서 똑같이 당합디다.

김예진 정말 그럴까요?

최대성 그렇다니까요! 나 봐요. 울 집사람 고생만 시키다 지금 여기 이렇게 앉아 있잖아요.

김예진 그게 무슨……

최대성 중학교 앞에서 애들 상대로 떡볶이랑 튀김 파느라 찌든 기름 냄새에 자잘한 화상에…… 사업 족족 말아먹을 때마다 잔소리를 퍼붓든가, 딴 놈이랑 살림을 차리든가 하면, 뭐 화가 나도 맘이야 편했을 텐데, 그냥 암말 않고 떡볶이 만들고 김밥 말고 그럽디다.

김예진 대인배시네요.

최대성 네, 대인배죠. 그러니 나한테 더 화가 나고. 그때 대박 사업 하나 있다길래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었건만. 잠실구장 도배하고도 남을 껌이랑 빚만 고스란히 남았지 뭐요. (한 잔 마시고) 그래서 이혼했어요. 그간 고생시킨 것도 모자라 빚까지 같이 질 순 없잖아요.

김예진 그렇다고 이혼하면 어떡해요?

최대성 안 하면, 당장 가게부터 빼야 하는데.

김예진 아무리 그래도…… 그래서 지금 부인은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최대성 들리는 말로는 여즉 떡볶이 장사한다는 말도 있고, 재혼했다는 말도 있고…… 뭐 염치가 있어야 찾아가보든 말든 하지.

김예진 아무리 말아먹었어도 명색이 사업했다는 분이 이렇게 배알이 없어서야.

최대성 누가 할 소리! 그렇게 엄마 생각하는 사람이 죽기는 왜 죽어요? 게다가 내 보기에 아직 예진씨 한창때구먼, 무슨 나이를 먹었다고, 허참.

김예진 그거야 엄마한테 너무 미안하니까 그렇죠. 게다가 남들이 계란 한 판 될 때까지 여태 뭐하고 살았냐고 물을 때마다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아요? 30평생 백수인생! 저도 친구들처럼 사무실에서 찍은 사진이나 해외 출장 가서 찍은 사진 이런 거 홈페이지에 올리고 싶었는데…… 특히 방송 시작 전 분장하고 찍은 사진을 꼭 올리고 싶었어요. (셀프카메라 포즈 취하며) 생방 5분 전의 나, 찰칵! 게스트 탤런트 누구누구랑 찰칵! (사이) 근데 이제 누가 절 써주겠어요. 마지막으로 면접 본 회사에서 어느 임원이 그러데요, 김예진 씨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하긴, 그렇게 시험보고도 안 됐으면 포기할 때도 된 건데 말이죠.

최대성 거 어느 회사에요? 진짜 웃기네! 서른 훨씬 넘은 나이에 시작해서 대박 터뜨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사람이 임원으로 있는 회사면 아예 안 가는 게 나아요!

김예진 현실을 인정하란 얘기겠죠. 그렇게 지원했는데도 안 된 거면 실력이 안 된다는 거잖아요……

최대성 쇼 호스트 실력은 임원이 아니라 소비자가 평가하는 거 아니에요?

김예진 (잔뜩 풀이 죽어서) 임원들이 어디 그거 모르겠어요?

최대성 (갑자기 큰 목소리로 주머니에서 껌 한 뭉치 왕창 꺼내며) 자! 내가 소비자다 생각하고 요 껌 한 번 팔아 봐요.

김예진 네?

순간 무대조명이 화려하게 바뀌며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
처음엔 당황한 김예진은 이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김예진 아름다운 몸매가 경쟁력이 되는 현대사회. 그래서 많은 분들이 다이어트를 하지 않나 싶은데요, 그 길이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저 김예진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다이어트를 여러분들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바로 이 헬시다이어트껌인데요, 먼저 이 제품은 여성분들에게 부족한 칼슘과 철분이 풍부하며 자일리톨 성분으로 여러분의 치아건강까지 생각했습니다. 또 무엇보다 세계 특허를 받은 특수성분으로 위를 수축하여 적은 양을 먹어도 포만감을 느껴 자연히 식사량을 줄여주는, 정말 이상적인 다이어트보조식품이 아닐 수 없는데요, 이 똑똑한 제품을 들고 나온 최대성 사장님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최대성 (자못 긴장한 말투로) 아, 예 안녕하십니까.

김예진 아니 그렇게 딱딱하게 나오면 어떡해요? 요즘은 쇼 호스트들보다 업주들이 말을 더 잘하는 시대라구요. 다시 해요! 안녕하세요, 사장님.

최대성 (능청맞게) 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S라인 대표 최대성입니다.

김예진 이 헬시다이어트껌, 정말 씹을수록 위가 작아지나요?

최대성 네 그렇습니다. 미국 올림픽 선수촌에서 체조선수들을 위해 특별 제작된 것으로 식약청으로부터 안정성과 기능성을 인정받았습니다.

김예진 그 까다롭다는 식약청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다면 더 의심할 여지가 없겠네요. 그러니 여러분들도 안심하시구요, 편안한 마음으로 헬시다이어트껌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인생을 사시는 분들의 영상, 함께 보시죠.

외국광고에 성우가 더빙을 한 듯한 과장된 목소리로 연기하는 두 사람.
둘 다 사회자와 모델을 오가는 1인다역으로 진행한다.

최대성 날씬한 몸매를 원하십니까? 여기 헬시다이어트껌이 있습니다! 운동이 힘들다구요? 배고픔을 참기 어렵다구요? 운동은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으시다구요? 걱정 마세요! 여기 헬시다이어트껌이 다이어트로 고민하는 모든 분들께 명쾌한 해답을 드리겠습니다!

김예진 으음, 처음엔 믿지 않았죠. 어떻게 껌으로 살을 뺄 수가 있겠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이 헬시다이어트껌으로 날씬해진 사람들을 보고 바로 시작했죠. 그러자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거에요!

최대성 에, 그냥 과대광고겠거니 하고 별 기대 없이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서서히 저한테서 변화가 일어나지 뭡니까. 앉아서 피자 세 판은 기본인 내가 이제 한 조각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니, 허! 정말 기적 같은 일이죠.

김예진 (사회자가 되어) 과연 헬시다이어트껌이군요! (최대성에게) 토마스! 헬시다이어트껌의 위력, 정말 놀랍지 않아요?

최대성 지져스 크라이스트! 정말 대단해요! (김예진에게) 루시! 내 바지를 봐요. (허리띠를 끄르면 축구공이 하나 들어갈 정도로의 폭이 남아 있는 허리둘레를 보이며) 이게 바로 헬시다이어트껌 덕분이라면 믿으시겠어요?

김예진 오 마이 갓! 정말 놀랍군요! 언제 어디서나 출출할 때 씹은 달콤한 헬시다이어트껌이 이렇게까지 엄청난 변화를 주다니,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는군요.

최대성 보통 다이어트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바로 헬시다이어트껌이기에 가능한 거 아니겠어요?

김예진 (다시 목소리를 바꿔서) 첫 아이를 낳고 살이 빠지지 않아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어요. 각종 다이어트를 다 해봐도 아기를 키우는 엄마로선 도저히 무리였죠. 자신감도 없어지고 왠지 남편도 멀어지는 것 같고……(훌쩍이다 밝은 표정) 그러다 이 헬시다이어트껌을 만나고부터 서서히 처녀 때의 몸매로 돌아오는 제 자신을 발견했죠. 정말 하루하루가 가볍고 기쁨의 연속이에요. 남편의 사랑도 되찾은 것 같아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최대성에게) 허니! 호호호……

최대성 오우, 마이 안젤라! 하하하!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배를 잡고 웃는다.
최대성 가만, 우리 죽기로 한 사람들 아닌가?

김예진 그러게요. 뭐가 좋아서 이렇게 웃는 거지? 미친 거 아냐?

최대성 (자조적인 웃음) 죽기 전에 쇼 한번 해 본 거죠, 뭐.

김예진 스튜디오 조명은커녕 칙칙한 여관방 형광등 아래서 쇼라니. 진짜 우울하니까 웃음밖에 안 나오네.

최대성 그래도 잠시나마 웃었으니 됐죠.

김예진 이 꼴로 전 쇼 못 해요. 예쁜 옷에 메이크업 하고 카메라 앞에서 내 꿈을 펼쳐보는 것이 그렇게 큰 욕심인가요?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쇼가 여관에서라니, 이건 너무 하잖아!

최대성 아니 그럼 여태 한 번도 못 해봤단 말이에요?
김예진 계속 미역국 먹었는데 어떻게 해요?
최대성 젊은 사람이 참 갑갑하네.

김예진 뭐라구요?

최대성 요즘 거 뭐냐, 블로그다 트위터다 해서 다들 자기 맘대로 사진이나 동영상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고 그러잖아요. 그걸로 뜨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나야 얼굴 내밀다간 얼굴 안 다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만 예진 씨가 나처럼 쫓아다니는 빚쟁이가 있어요, 사채업자가 있어요?

김예진 그런 건 없어도……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어요.

최대성 아니 그런 자신감도 없이 어떻게 업계 1인자가 되려고 해요? 내가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168킬로의 사내가 혹독한 다이어트 과정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인터넷 올렸는데 그게 그냥 대박 터진 거에요! 아마 지금 연봉 몇 억씩 나가는 유명 트레이너가 됐다는 말도 있어요.

김예진 그거랑 전 좀 다른 분야…….

최대성 (말 자르고) 거참 아까부터 이것저것 엄청 따지네. 어차피 잘 안 되면 지금처럼 죽으면 되는 거지.

김예진 차라리 그냥 죽는 게 낫지, 비웃음까지 받고 죽으라고요? 너무 잔인한 거 아니에요?

최대성 혹시 알아요? 예진 씨 동영상이 포털 사이트 메인화면에 뜰지. 인터넷소설, 요리, 다이어트…… 그런 분야로 유명한 사람들 봐요. 다들 처음엔 자기 블로그나 홈페이지에서 시작한 게 서서히 알려지면서 책 내고 텔레비전 나오고 그러잖아요.

김예진 (거의 현혹된 수준) 근데 전 상품을 소개해야 하는 건데……

최대성 그거야 자기 맘이죠. 굳이 상품이 아니더라도 내 주변의 좋은 것들 소개한다는 식으로 하면 되죠.

김예진 듣고 보니 그렇네요. 하루는 내가 아끼는 물건을 소개하고, 하루는 요즘 유행하는 걸로, 하루는 좋아하는 영화, 음악, 드라마……

최대성 오케이! 바로 그거죠! 역시 젊으니까 머리가 빠릿빠릿 돌아가잖아요. 늙긴 누가 늙어.

김예진 그러게. 왜 내가 여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가만! 아니 그렇게 잘 아는 분이 왜 여기 왔어요?

최대성 그, 그야 남 이야기는 쉬운 법이라잖아요. 뭐, 결국 다 말아먹었어도, 난 그래도 사활을 걸고 뭔가 했으니 미련은 없어요.

김예진 어머? 없긴 왜 없어요? 이 많은 껌들, 아깝지도 않아요? 이가 닳도록 다 씹어버리던가, 진짜 어디 도배를 하던가, 하다못해 식당에 헐값으로라도 넘기던가 해서 조금이라도 남겨먹어야죠. 그리고 부인은요? 아직도 떡볶이 장사를 하는지 아님 정말 누구랑 재혼했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제가 그쪽이라면 여기 오기 전에 부인부터 만났을 거에요. 재혼했으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뭐 삼류드라마 같아도 그게 인생이니까 부인 행복 빌어주면서 굿바이 하는 거고, 아직 떡볶이 장사하고 있으면 싹싹 빌고 나오겠어요.

최대성 그렇네요. 용서부터 빌어야겠네, 미안하다고……

김예진 네, 당연히 그래야…… (최대성의 풀죽은 모습을 보고) 아니 사모님도 이해할 거에요. 뭐 원수지간 돼서 헤어진 것도 아닌데.

최대성 원수 맞죠. 그렇게 고생시켰는데, 것도 남편이란 놈이……

김예진 아마 지금도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요. 여자 마음이란 게 그렇거든요. 좋게 헤어졌든 안 좋게 헤어졌든 그 사람이 어떻게 지내나 궁금하고, 날 한 번 찾아와 줬으면 하는 마음도 들고…… 근데 그 자식은 날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어요. 진짜 끝까지 나쁜 자식이야.

최대성 차라리 안 나타나는 게 낫지 않나? 겨우 정리 다 돼서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하는데 괜히 나타나서 마음만 들쑤셔 놓으면, 그건 더 나쁜 놈 되는 거잖아요.

김예진 이렇게 여자 맘을 몰라서야 어떻게 장사했어요?

최대성 그래서 여기 앉아 있잖아요.

김예진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고…….

풀이 죽은 두 사람, 잠시 침묵.
그때 갑자기 ‘꼬르륵’ 소리가 크게 울린다.

김예진,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고쳐 앉는데 다시 ‘꼬르륵’ 소리.

최대성 배고파요?

김예진 아, 아니 뭐, 조금…… (다시 크게 ‘꼬르륵’)

최대성 (약간 웃으며) 조금?

김예진  (신경질 내며) 이런 거 좀 모르는 척 해주면 덧나요? 진짜 사람 민망하게시리.

최대성 배고픈 게 뭐가 민망해요? 자연적인 현상이구먼. 저녁 안 먹었어요?

김예진 죽는 마당에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요?

최대성 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 말 몰라요? 뭐 좀 먹읍시다. 나도 좀 출출하던 참인데. 가만…… 여기 어디 야식 메뉴판이 있을 텐데…… (화장대에 놓인 메뉴판을 집으며) 아, 여기 있네. (메뉴판을 훑어보며) 예진 씬 뭐 좋아해요?

김예진 (메뉴판을 뺏어들며) 으음…… 짜장면, 짬뽕, 냉면, 족발, 보쌈…… 어쩜, 여긴 메뉴도 다 후졌어. 초밥이나 스파게티, 피자는 없나?

최대성 팽이 요리나 랍스터를 주문하시지.

김예진 뭐라구요? 그럼 최후의 만찬으로 족발이나 뜯으란 말이에요?

최대성 세상에 어느 여관이 자살자를 위한 최후의 만찬 메뉴까지 준비해 놓는답니까? 그리고 족발이 어때서? 야식으로 족발만한 메뉴가 또 어딨어요?

김예진 어쨌든 전 싫어요. (메뉴판 다시 보며) 다 거기서 거기네. 진짜 먹을 거 없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칼로리 제일 높은 걸로 해요. 더 이상 다이어트 안 해도 되니까 살찔 걱정 없이 정말 배 터지게 먹을 거에요.

최대성 또 그놈의 다이어트. 뭐, 좋습니다. 먹고 싶은 거 죄다 시켜서 정말 배 터져 죽자구요! 아참! 돈은 있어요?

김예진 네? (지갑을 탈탈 털어놓는다. 천 원 지폐 몇 장과 동전 몇 개가 고작이다. 창피해져서 변명투로) 아까 말했잖아요. 약을 배로 사서 돈 많이 들었다고……

최대성 뭐, 초밥? 스파게티? 피자?

김예진 (발끈) 백수가 무슨 돈이 있어요? 그러는 사장님은 얼마나 갖고 있는데요?

최대성 그보단 많네요. (지갑과 옷 주머니를 다 털어놓지만, 만 원 지폐 한 장과 천 원 지폐 몇 장, 동전 몇 개가 전부다)

김예진 네에, 정말 저보다 많긴 많네요. 사, 장, 님!

최대성 저승에 누가 돈다발 싸들고 가나요? 날 때처럼 가볍게 가는 거지.

김예진 어머, 그새 달관까지? 죽는 게 무섭긴 무섭네.

최대성 (무안한 듯 헛기침하며) 어차피 이리 된 거 허기만 면할 수밖에 없겠어요. (돈을 모아 계산하며) 만 원짜리 한 장에 천 원짜리가하나, 둘, 셋…… 여섯 장에 동전이…… 오호라! 오백 원짜리가 다섯 개씩이나! 음…… 총 만구천이백칠십 원! 근데 이거면 좀 애매하네요. 족발, 보쌈 둘 다 소(小)가 16000원, 중(中)이 2만원인데…… 캬, 아깝다. 730원만 있으면 중자 시킬 수 있는데! 이걸 깎아달라고 했다간 미친놈 소리만 들을 테고.

김예진 죽는 마당에 욕 좀 먹으면 어때요? 더 배부르고 좋겠네.

최대성 욕먹으면 오래 산다잖아요. 죽으러 온 사람이 더 살아서 뭐해요?

김예진 그럼 어떡해요? 소자 시켜서 누구 코에 붙이라구요.


최대성
할 수 없죠. 짜장면이나 시키는 수밖에.

김예진 싫어요! 마지막인데 그래도 요리로 장식해야죠. 지지리 궁상도 아니고 짜장면이 뭐예요? 짜증나게.

최대성 그럼 이렇게 합시다. 족발 소자에 김치전이 3천원이니까 이렇게 시키고…… 뭐, 나머지 730원은 배달원 팁으로 주죠.

김예진 주고도 욕먹겠네. 좋아요. 그 대신 족발 말고 보쌈으로 해요.

최대성 거참, 아까부터 족발 되게 미워하네. 족발이 뭐 잘못했어요?

김예진 그 자식이 좋아했던 음식, 음악, 영화…… 이제 다 싫어요. 그러니까 보쌈으로 해요.

최대성 아직도 그 사람 생각해요?

김예진 그러게요. 저 참 바보 같죠? 그런데 자꾸 생각이 나네요. 같이 먹던 음식, 같이 보던 영화, 같이 부르던 노래…… 헤어지고 나면 다 별거 아니라던데, 저한텐 아직도 별 건가 봐요. (침울해진다.)

최대성 이해해요. 그래도 족발은 아무런 죄가 없잖아요. 족발로 합시다.

김예진 아 진짜! 이런 얘기까지 했으면 내키지 않아도 보쌈으로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정말 인정머리하고는!

최대성 누군 뭐 가슴 없나? 그래도 현실을 생각해야 할 거 아니에요? 족발은 고기가 한 접시지만 보쌈은 고기 반 김치 반이잖아요! 즉, 보쌈이 족발보다 양이 적다구요. 안 그래도 소자 시켜서 양도 적은데 고기도 반밖에 없는 보쌈을 시키자구요? 그것도 예진 씨 배신했던 남자 때문에?

김예진 어쨌든 전 족발이 싫다구요. 보쌈이 좋아요!

최대성 아 글쎄, 현실을 직시하라니까요!

김예진 직시건 투시건 간에 보쌈으로 해요!

최대성
족발로 하자니까요!

김예진
보쌈!

최대성
족발!

김예진
보싸암!

최대성
족바알!

서로 팽팽하게 노려본다.

김예진 그럼 게임으로 해요. 이긴 사람이 정하는 걸로. 어때요?

최대성
나중에 딴소리 없기에요.

김예진
탕수육 알죠?

최대성
오케이!

김예진
그럼 제가 먼저 시작할게요. 탕!

최대성
수!

김예진
육!

최대성
탕!

두 사람, 마주 앉아 노려보며 ‘탕-수-육’을 반복한다.
천천히 시작하다가 서서히 큰 소리에 빠른 속도로 반복한다.

최대성 수!

김예진
육!

최대성
탕!

김예진
타,타, 수수!

최대성
오케이! 게임 끝!

억울한 표정의 김예진, 패배를 인정하고 메뉴판을 건네준다.
의기양양한 최대성, 전화를 걸지만 이내 표정이 굳어진다.

김예진 왜 그래요? (대성이 아무 말 없자) 족발 시키려니까 안 받나 보네.
속 침묵하는 최대성에게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수화기를 뺏어든 김예진.
수화기로부터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국번이거나……” 안내방송이 들린다.

김예진 야? 번호가 바뀌었으면 이 메뉴판도 바꿔야지! 장난해?

최대성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없다.)

김예진 죽을 사람 상대로 우롱이나 하고! (최대성의 비위를 맞추며) 왜 갑자기 조용하세요? 다른 데 알아봐서 보쌈 말고 족발 시킬까요?

최대성
(담담하게) 어떻게요? 주인한테 이 근처 야식집 알려달라고 해요?

김예진 야식집이 여기 하나겠어요? 요즘 한 집 걸러 죄다 먹는 장사하는데. 분명 맛있고 싼 야식집이 있을 거에요. 없으면…… 아! 그래! 편의점! 편의점이 있잖아요! 연중무휴에 24시간 영업하니까 사먹을 수 있어요! 아까 여기 올 때 보니까 건너편 조금 지나서 편의점 두 개 있는 거 봤어요. 5분 거리도 안 되니까 얼른 나가서 사오면……)

최대성 (말 자르며) 사러 나가면, 돌아올 자신 있어요? 김예진 네?

최대성
까먹었어요? 우리, 다신 돌아오지 않을 길을 갈 사람들이라구요.

김예진 (울먹울먹해지며) 그럼 어떡해요? 배고파 죽겠는데 어떡하라구요. 최대성 어떡하긴 어떡해요. 빨리 가란 뜻이죠. 김예진 그게 무슨…….

최대성 우리 여기 들어온 지 벌써 한 시간도 넘었어요. 죽으러 온 사람들이 여태 이러고 있는 거, 웃기지도 않아요? 진짜,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김예진그야 배가 고프니까…… (갑자기 울음 터뜨리며) 억울해요! 속상해 미치겠어요! 하루하루 비참함의 연속이었단 말이에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마지막 순간까지 비참하게 가야 하냐구요!

최대성 그만 해요. 다음 세상엔 잘 살아보려고 이러는 거 아닙니까?

김예진 다음 세상이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런 게 있긴 하대요? 그걸 누가 보장해준대요? 나는 멋진 쇼 호스트로, 그쪽은 잘나가는 사업가로 다시 태어나게 해준다는 보장 정말 있긴 있냐구요!

최대성 그럼 여기 왜 왔어요? 죽는 게 장난이에요? 난들 뭐 이렇게 가고 싶은 줄 알아요? 난들, 집사람 두고 이렇게 가는 게 좋은 줄 아냐구요!

김예진
(움찔하며) 아, 아니 전 너무 속이 상해서 그만…… 죄송해요.
최대성
소리 질러서 미안해요. 하…… 근데 속은 시원하네. (다이어트껌을 내밀며) 저, 이거라도 씹을래요?

두 사람, 서로 무안한 듯 웃는다.

김예진
정말 아깝네요, 이 껌. 잘 팔렸으면 좋았을 텐데……. 최대성 아까처럼 정말 예진씨가 소개해줬으면 잘 팔렸을 텐데…… 예진씬, 단지 운이 없었던 거예요. 김예진 아까 화낸 게 미안해서라면 됐어요. 벌써 다 잊었으니까. 최대성 진짜예요.

김예진
뭐, 칭찬받으니까 기분은 좋네. (망설이며) 저, 근데요, 정말 이렇게 가도 괜찮으시겠어요?

최대성
네? 뭐가요? 김예진 …… 부인이요.

최대성
또 술 들어가게 하네. (잔을 채우려는데 이미 바닥난 술병을 보며) 언제 다 마셨대? 금방 갈 줄 알고 한 병만 사왔는데…… 밥도 없고 술도 없고, 참나…… (담뱃불로 라이터를 켜자 불꽃이 크게 터져 깜짝 놀라며) 뭐야? 눈썹 홀라당 타버릴 뻔했잖아! (라이터를 팽개친다.)

김예진
괜찮아요? (라이터를 주우며) 대박 클럽? 이름 참…… 대박, 대박, 우리는 쪽박에 피박. 대박 쪽박 피박, (서서히 랩처럼) 대박 쪽박 피박, 대박 쪽박 피박, 대박 쪽박 피박, 박박, 비바박, 바리리바라바박박……

서서히 리듬을 타며 랩을 하는 두 사람.

최대성
박박비바박 내 이름은 최대성, 대박나란 내 이름. 김예진 박박비바박 내 이름은 김예진, 원래 이름 김예숙. 최대성 난 쪽박에 피박쓰고 말았어, 대박 한 번 터뜨리지 못했어! 김예진 건 나도 마찬가지, 백수 인생 바가지 있어도 대박은 없지!

최대성
껌 팔아 대박을 꿈꾸던 나, 하지만 껌처럼 들러붙은 은행이자! 김예진 홈쇼핑의 1인자는 저 멀리, 취직해 날 차버린 애인도 저 멀리!
최대성 꽃 같은 내 마누라, 대인배 내 마누라, 지금 어디서 무얼 하나. 김예진 꿈 찾아 헤맨 시간, 이제 내 나이 계란 한 판, 오, 이 내 팔자.
같이 이놈의 세상에서 나 설 곳은 없는가 돈 벌 곳은 없는가 날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한 방 먹일 대박이란 없는가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내가 없어도 되는 세상 케세라세라세라세라 바라바라박박 케세라세라세라세라라라라

격렬한 노래와 춤으로 기진맥진해진 두 사람, 허탈한 웃음 뒤 침묵.

김예진
다음 세상이라는 게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정말 다시 태어난다면 아까 그쪽이 알려준 대로 이것저것 다 시도해볼 거예요.

최대성
예진씬 잘할 거예요.

김예진
바보처럼 남자 하나에 미래를 거는 일 따위도 안 할 거예요. 그런 놈하고는 쨉도 안 되는 멋진 여자로 살 거라구요!

최대성
암요! 예진씬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요!

김예진
근데 엄마! 엄마는…… 내가 다시 우리 엄마 딸로 태어날 수 있을까요? 최대성 …….

김예진
그래야 해요! 안 그러면 이렇게 죽는 의미가 없어요! 평생 효도 한 번 못 해 드렸는데…… 겉으로는 무뚝뚝한 아버지도 알고 보면 언제나 날 걱정하셨는데…… 난 다 알고 있으면서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했어요. 난, 단 1초라도 저로 인해 두 분 웃으시는 걸 봐야 해요! 안 그러면, 안 돼, 안 돼요!

최대성
진정해요, 예진씨.

김예진
그쪽도 마찬가지잖아요! 부인 다시 만나셔야죠. 제 말 틀려요? 최대성 그만 해요! 다음 세상 따윌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가는 사람이 이것저것 다 따지면 못 가요! 김예진 처음에 그러셨잖아요! 우리 다음엔 제대로 태어나보자고, 제대로 태어난다는 거, 그런 거 아니에요? 최대성 누가 그걸 몰라서 이래요?

김예진
안 돼. 난 정말로 우리 부모님 딸로 다시 태어나야 해요. 안 그럼 안 돼요.

최대성
제발 그만 좀 해요. 그렇게 자신 없으면 그냥 계속 딸 하면 되겠네! 그거, 안 죽어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두 사람,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다.

김예진
(대성의 표정을 살피다가) 저, 저기요, 혹시 지금 저랑 같은 생각…… 최대성 예진씨…….

김예진
그렇죠! 그래야 덜 억울하겠죠, 그쵸?

최대성
(미소 지으며) 일단은 해봐야.

김예진
(말 자르며) 제 말이요!

최대성
일단은 좀 해보고, 안 되면 다시.

두 사람, 마주보는 표정이 서서히 밝아진다.

김예진
그런데 그전에 해 둘 게 있어요.

최대성
또 뭐요? 김예진 일단 우리가 만난 사이트 있잖아요. 거기에
남녀방을 따로 만들어달라거나, 적어도 성별 표기 의무화, 이런 거 건의해야겠어요. 처음에 놀란 거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린다니까요. 최대성 어디 그뿐인가? 각종 여관 근처의 야식집 정보도 올리고. 김예진 나처럼 아직 모르는 사람을 위하여 수면제 정보에.
최대성 그거야 예진씨가 몰라도 너무 모른 거고, (예진의 서늘한 시선을 느끼자) 아니, 내 말은 아…… 그러니까 예진씨, 이 껌 씹으실…… (내민다)

김예진 (무시하고) 어쨌든 해볼 수 있는 건 죄다 해보고! 으음, 석 달 후 정도로 할까요? 약 100일간 죽기 살기로 해보고 진전이 없으면, 그때 다시 여기로. 최대성 자, 그럼 이 약들은.

대성, 어느새 구석에 처박힌 약 봉지들을 가운데로 꺼낸다. 한참을 바라보는 두 사람.

김예진 가지고 가긴 그렇고…… 어떡하죠?

최대성 (약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으며)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살 수 있어요.

김예진
이제 어디로 가실 거예요?

최대성
예진씨는요?

김예진
집에 가야죠. 일단 외박한 거 싹싹 빌고 낮 되면 동영상 찍을 카메라 살 거예요.

최대성
조만간에 인터넷으로 검색해 볼 거예요. 예진 씨 동영상요. 그럼 이만 일어날래요?

김예진
잠깐만요! 최대성 또 이번엔 뭐에요?

김예진
(망설이며) 저, 저기요, 정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최대성
그놈의 인연 타령은!

김예진
저, 그러니까, 그거요……. 최대성 네? 그거라니, 뭘……. 김예진 그거, 그러니까요, 그 껌…… 저 조금만 주시면 안 될까요? 아까 말했듯이 제가 원푸드, 덴마크 안 해본 다이어트가 없어서…….

최대성
덴마크든 불란서든 이래 봬도 장사꾼인데 그냥은 못 주죠. (장난기 어린 얼굴로) 예진씨가 소개해주면 모를까.

김예진
그야 당연하죠! 김예진의 베스트 오브 베스트로 소개할게요!
최대성 자요. (껌 한 뭉치를 건네주며) 그리고 이것도. (아까 모은 돈을 쥐여주며) 택시 타고 가요. 첫차 다니려면 멀었잖아요. 나야 아저씨니까 이 시간에 걸어도 괜찮고, 기왕 온 거 뜨신 물에 샤워 좀 하고 갈게요. 그러니 사양 말고 받아요.

김예진
정말 고마워요. 제가 진짜 멋지게 소개할게요, 이 껌. 최대성 (밝게) 기대할게요. 조심히 가요. 김예진 고마워요. 사장님도 행운을 빌어요.

예진, 가방을 들고 방문을 열고 나간다.
홀로 남은 대성, 쓰레기통에서 비닐봉지를 꺼낸다.

최대성
(사이) 남 이야기야 쉽지. 그래도 가기 전에 좋은 일 하나 했네. 이제 가고 나면 당신에게 좋은 일 되는 거지? 그렇지, 여보?

침대에 걸터앉아 농약과 수면유도제를 삼키고 눕는 대성.

암전. <막>

[당선 소감] "맘껏 기뻐하고 더 열심히 글 쓰고파"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5분경, 나는 신주쿠의 한 서점, 6층에 있었다. 처음엔 약간의 흔들림이 점점 세지더니 이내 여기저기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났고 책장의 책들이 와르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격한 흔들림에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난 이상하게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멍했던 것 같다. 어쨌든 난 무사했고 지금 이렇게 기쁜 순간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때 건물을 빠져나와 엄청난 인파 속에서 뒤늦게 밀려오는 공포에 눈물이 왈칵했을 때, 나는 내가 어떤 상황이든 살아 있음에 감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먼저 이 영광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생각하면 눈물 먼저 날 것 같은 내 가족-아버지 정여현 님, 어머니 김순자 님, 언니 정지연 님, 동생 정윤미와 제부 조슈아와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진이, 늘 죄송해요. 그리고 사랑합니다. 졸업한 지 10년이 된 제자를 여전히 챙겨주시는 추계예술대학교 김다은 교수님, 연극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은인 김영수 님, 내 연극정신의 토대가 되어준 극단 문학좌(文學座)와 당선을 제 일처럼 축하해준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제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밍기뉴 나무-김규호, 당신을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걸작입니다. 맘껏 기뻐하고 맘껏 사랑하고 보다 열심히 글 쓰며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979년 서울생, 추계예대 문창과 졸.

▲2008~2011 日 극단 文學座 연출부

[심사평] "단막희곡의 묘미 제대로 살려낸 작품"

이강백(왼쪽), 임영웅씨.

이강백(왼쪽), 임영웅씨.

금년 신춘문예 희곡 응모작들은 대체로 세태 풍자가 많았다. 노인문제, 실업문제 등 사회적 문제를 희곡에 담으려는 노력도 엿보였다. 최종심까지 남은 작품은 최보영 작 'TV쇼', 배윤 작 '칼잡이', 정상미 작 '그들의 약속' 등 3편이다.

'TV쇼'는 무대와 객석 사이에 거대한 TV처럼 보이는 프레임이 있다. 하루종일 TV만 시청하는 가족이 등장인물이다. 객석의 관객들은 TV를 통해 그들을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 그들 역시 TV를 통해 관객들을 바라본다. 이러한 극적 장치가 이 작품의 묘미이다. 그런데 등장인물들이 단조롭다. 성격과 행동이 너무 유형화되어 있다.

'칼잡이'는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역할이 잘 살아 있다. 대사도 재치 있고 군더더기가 없다. 작품의 무대가 되는 횟집도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희곡으로서는 장면 변화가 너무 많다. 모두 10장면인데 TV극본이나 시나리오에 가깝다.'그들의 약속'은 단막희곡의 형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희곡 심사를 맡은 우리는 이점을 높이 평가한다. 단막극이란 오직 한 장면만으로 써야 한다는 것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연극 역시 영상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음도 인정한다. 그러나 단막희곡의 특성을 잘 살려내는 작품을 보면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의 묘미는 마지막 부분의 반전에 있다. 자살 사이트에서 만난 두 남녀가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남자는 여자의 고민을 듣고 그 정도의 문제로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남자는 여자를 살려 보낸다. 그러한 과정이 극적 재미도 있으면서도 작위적이지 않다.

임영웅·연출가, 이강백·극작가


[정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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