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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K전투기 타고… ‘빨간 마후라’ 휘날리며 한 번 더 날고 싶다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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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K전투기 타고… ‘빨간 마후라’ 휘날리며 한 번 더 날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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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이 만난 사람] 百壽 맞는 ‘빨간 마후라’ 두 영웅, 김두만 장군과 배우 신영균
하늘의 별과 지상의 별이 만났다. 백년의 격랑을 헤쳐온 두 노장의 목덜미에 붉은 머플러가 훈장처럼 빛났다.

‘6·25전쟁 10대 영웅’인 김두만(99)은 1952년 1월 북한 군수물자 요충지인 평양 승호리 철교 폭파 임무를 수행한 전투조종사. 이를 모티프로 만든 영화 ‘빨간 마후라’ 주연 배우가 한국 영화계 대부(代父) 신영균(98)이다. 영화는 신드롬이 됐다. 공군사관학교와 파일럿을 지원하는 젊은이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로 시작하는 주제가는 전국민 애창곡이 됐다.

은발에 더블 수트로 멋을 낸 배우 신영균이 올해 백수(白壽)를 맞은 김두만 장군 손을 힘주어 잡았다. “한해 위인데도 저보다 훨씬 젊어 뵈십니다.” 김 장군은 ‘케데헌’으로 골든 글로브를 휩쓴 신영균의 손녀 이재씨를 축하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젊은이더군요. 얼마나 자랑스러우십니까?”

영화에서처럼 조종복을 입고 전쟁 당시 주력기였던 F-51D 앞에 선 두 ‘탑건’은 “조국의 하늘로 한번 더 날아오르고 싶다”며 해맑게 웃었다.

1964년 개봉돼 25만 관객을 끌어모으며 대흥행한 영화 '빨간 마후라'의 포스터. '연산군'에 이어 신상옥 감독과 호흡을 맞춘 배우 신영균은 '산돼지' 나관중 소령으로 열연해 큰 사랑을 받았다. /조선일보 DB

1964년 개봉돼 25만 관객을 끌어모으며 대흥행한 영화 '빨간 마후라'의 포스터. '연산군'에 이어 신상옥 감독과 호흡을 맞춘 배우 신영균은 '산돼지' 나관중 소령으로 열연해 큰 사랑을 받았다. /조선일보 DB


◇ 목숨 건 전투, 목숨 건 영화

-F-51을 다시 보니 어떠신가?

김두만(이하 김): “설렌다. 몸은 노쇠하나 나는 여전히 피 끓는 파일럿이다.”


신영균(이하 신): “‘빨간 마후라’ 같은 전투 영화를 한번 더 찍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젠 늦은 것 같다.”

-두 분이 직접 만난 건 처음인가?

신: “6년 전 전·현직 공군참모총장 14분을 초대해 저녁 식사를 했는데 그날 장군님이 편찮으셔서 못 오셨다.”


김: “‘빨간 마후라’로 우리 공군의 위상을 높여주신 것에 늘 감사해왔다. 난 주로 흰색 마후라를 맸는데, 영화가 나온 뒤 나를 비롯해 모든 조종사들이 빨간 마후라로 바꿨다(웃음).”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이 영화의 모티프였다.

김: “평양서 동쪽으로 10km 떨어진 철교를 폭파해 북한군 보급로를 차단하는 작전인데, 유엔군이 여러 차례 실패한 뒤 우리 군에 단독으로 맡겼다. 김신 장군 지휘 아래 편대장인 내가 1월 12일, 13일 출격했지만 실패했다. 실패 원인이 고공 투하에 있다고 판단, 목숨을 건 저고도 강하 작전으로 바꿨다. 15일에 출격한 옥만호, 윤응렬 편대가 마침내 성공시켰다.”


-승호리 전투에선 전사자가 없었지만, 영화에선 나관중 소령(신영균 분)이 피격된 전투기를 몰고 적진으로 돌진한다. 그 장면을 목숨 걸고 촬영하셨다던데.

신: “그땐 특수촬영기법이 없으니 신상옥 감독이 일등 사격수를 데려와 내 뒤에서 실탄을 쏘게 해 촬영했다. 총알이 내 머리를 스쳐 조종석 유리를 뚫고 나가도록! 식은땀이 흘렀지만, 영화배우가 영화 찍다 죽는 것도 영광이라고 생각했다(웃음).”

-극중 나관중 소령이 남긴 유서가 관객을 울렸다.

신: “나 같은 놈은 죽어 전쟁터의 재가 되고 거름이 될 테니 너희는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는 대사를 아직도 왼다. 나관중은 진짜 군인, 진짜 사나이였다.”

'빨간 마후라'의 두 영웅 김두만 장군과 신영균 배우가 두 손을 꼭 잡고 담소하는 모습. 정장 차림의 신영균은 "승호리 전투의 주역을 만나기 위해 붉은 타이에 붉은 행커치프를 꽂고 왔다"며 웃었다. /장경식 기자

'빨간 마후라'의 두 영웅 김두만 장군과 신영균 배우가 두 손을 꼭 잡고 담소하는 모습. 정장 차림의 신영균은 "승호리 전투의 주역을 만나기 위해 붉은 타이에 붉은 행커치프를 꽂고 왔다"며 웃었다. /장경식 기자


◇ 김두만 “내 무덤은 하늘, 수의는 조종복”

-장군도 나관중처럼 미리 유서를 쓰고 출격하셨나?

“나는 쓰지 않았다. 죽고 사는 건 하늘에 달린 일. 조종사에겐 하늘이 무덤이고, 전투기가 관이며, 조종복이 수의다.”

-출격할 때마다 두렵지 않으셨나?

“왜 두렵지 않겠나. 그러나 일단 전투기에 오르면 그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뿐, 두려움이나 잡념에 빠질 겨를이 없다.”

-죽을 고비도 많이 넘기셨더라.

“내가 아니라 후배 조종사들이 살아남았어야 했다. 금강산 창도리 북한군 보급기지를 폭파할 때 스물네 살 이일영 중위가 전사해 큰 충격을 받았다. 내 생에 가장 슬픈 날이었다.”

-대한민국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을 기록하셨다.

“100회인지도 몰랐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니 정비사들이 몰려와 헹가래를 쳐주더라. 이 중위가 전사한 이틀 뒤여서 크게 기쁘지 않았다.”

-비행복에 땀이 마를 새없이 출격을 해서 김정렬 초대 공군참모총장이 찾아와 ‘용감한 건 좋지만 무모해선 안된다’고 충고했다더라.

“앞에선 ‘알겠습니다’ 했지만, 돌아서서는 ‘그래도 출격할 겁니다’ 했지(웃음).”

-승호리 전투 후엔 사천 기지로 내려가 조종사를 양성하셨다.

“전쟁 중인데 전투기를 몰 조종사가 없었다. 하루 8번씩 비행 훈련을 하며 혹독하게 가르쳤다. 석 달 후 강릉 기지로 보냈더니 이 친구들이 훈련보다 전투가 더 쉬웠다고 하더라(웃음). 전원 100회 출격을 기록했고,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최초의 국산 전투기 FA-50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글썽이시더라.

“6·25가 발발했을 때 우리에겐 전투기가 단 한 대도 없었다. 미국에서 F51을 보내주기 전까지 연락기와 훈련기에 폭탄을 싣고 날아가 맨손으로 떨어뜨려야 했다. FA-50, KF-21처럼 좋은 전투기를 타고 싸웠다면 분단이 아닌 통일을 이뤘을 거란 아쉬움에…. 최용덕, 김정렬, 김영환 장군 등 1세대 항공인들이 살아 계셨다면 후배 공군들을 정말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전투기와 장비가 아무리 좋아도 결국은 사람이라고도 했다.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군인 정신이 없다면 최첨단 전투기도 고물에 불과하다.”

-비상계엄으로 군이 크게 흔들렸다.

“무엇이 국가 위해 옳은가를 판단했어야 한다. 대통령은 최고 지휘관이지만 대통령이 국가와 국민을 앞서는 건 아니다.”

-올해 백수를 맞으셨다.

“고아나 다름없던 내가 파일럿이 되기 위해 소년병 비행학교에 갔다가 가미카제 특공대로 투입되기 직전 광복을 맞았다. 내 나라 군복에, 내 나라 국기가 그려진 전투기를 타고, 조국의 하늘을 원없이 날았으니 얼마나 축복 받은 인생인가. 다시 태어나도 나는 대한민국의 조종사가 될 것이다.”

김두만 장군이 지난 2015년 최초의 국산 전투기인 FA-50에 탑승해 엄지를 치켜세운 모습. 88세의 고령에도 무사히 비행을 마쳐 화제가 됐다./ 공군 제공

김두만 장군이 지난 2015년 최초의 국산 전투기인 FA-50에 탑승해 엄지를 치켜세운 모습. 88세의 고령에도 무사히 비행을 마쳐 화제가 됐다./ 공군 제공


2013년 수원공군기지를 찾은 신영균 배우가 조종복에 '빨간 마후라'를 두르고 전투기에 탑승한 모습. /신영균예술문화재단

2013년 수원공군기지를 찾은 신영균 배우가 조종복에 '빨간 마후라'를 두르고 전투기에 탑승한 모습. /신영균예술문화재단


◇ 신영균 “내 관엔 성경과 빨간 마후라를”

-매일 칼 같은 정장에 행커치프를 꽂고 출근하신다 들었다.

“내일 죽어도 배우는 배우다워야 한다.”

-영화 ‘대부’의 알파치노 같으시다

“뭘 잡숫고 싶으신가, 하하!”

-배우 신영균에게 ‘빨간 마후라’는 어떤 의미를 지닌 영화인가?

“우락부락해서 별명이 ‘산돼지’였던 나관중 소령은 배우 신영균을 사나이 중 사나이로 만들어준 고마운 캐릭터다. ‘빨간 마후라’를 우리 공군의 상징이자 애국의 상징으로 남긴 것이 가장 뿌듯하다.”

-영화가 대흥행했다.

“1964년 명보극장에서 개봉했을 때 매표소부터 늘어선 관객 줄이 을지로 3가까지 이어졌다. 당시 서울 인구가 100만이었는데 25만명이 영화를 봤다. 암표가 그때 처음 생겨났다.”

-‘빨간 마후라’로 아시아영화제서 남우주연상을 받으셨다.

“60년대는 한국 영화의 황금기였다. 홍콩, 대만이 우리 영화를 교본으로 삼았다. 한류가 그때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신상옥 감독 발인식에 공군 군악대가 ‘빨간 마후라’를 연주했다던데.

“내가 장례위원장이라 공군참모총장께 부탁을 드렸다. 마지막 가는 길에 꼭 들려드리고 싶어서. 신상옥 감독은 빚쟁이가 몰려와도 비싼 필름을 아낌없이 쓰며 영화에만 몰두한 광인이었다.”

-공군 ‘올해의 탑건’ 수여식에서 매년 ‘신영균 특별상’을 시상한다.

“K전투기에 걸맞는 뛰어난 조종사들을 격려하고 싶어서, 대한민국의 하늘을 굳건히 지켜달라 당부하고 싶어서.”

-정작 본인은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

“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공군으로 갈 걸 그랬다.”

-사업가로도 성공하셨다. 500억 자산인 명보극장을 영화계에 헌납해 화제가 됐다.

“살면서 구두쇠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좋은 일을 해야겠다 마음 먹었는데, 아들이 먼저 제안해줘서 고마웠다.”

-YS땐 정치를 하셨다.

“의료보험도, 퇴직금도 없어 생계가 불안한 영화인들을 위해 뭐라도 해야만 했다. 더 젊은 나이에 정치를 시작했으면 더 큰 정치를 했을 것이다(웃음).”

-스캔들 한번 없이 배우로, 사업가로 성공한 비결이 궁금하다.

“서른셋에 남편을 잃고 황해도에서 서울로 3남매를 이끌고 내려와 공부시킨 어머니! 딴따라 되겠다고 해서 고무신짝에 여러 번 맞기는 했지만,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되려고 노력한 것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

-‘관 속에 성경과 빨간 마후라를 넣어 달라’고 하셨더라.

“빈손으로 가는 길. 성경과 빨간 마후라 하나면 외롭지 않을 것 같다.”

-‘거절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기회’라는 손녀 이재씨의 골든 글로브 수상 소감이 화제였다.

“동네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항의할 만큼 지독히도 노래 연습을 하던 아이였다. 놀랍고 대견할 뿐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골든 글로브를 휩쓴 이재. 배우 신영균의 손녀다. /이재 인스타그램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골든 글로브를 휩쓴 이재. 배우 신영균의 손녀다. /이재 인스타그램


◇ 번개처럼 지나가는 靑春이란다

-건강을 유지하시는 비결이 궁금하다.

김: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라면도 먹고, 피자도 먹고, 함바가(햄버거)도 먹고.”

신: “삼시세끼 소식하고 매일 1시간씩 운동한다. 헬스장에서 권노갑(96)씨를 만나는데 학창시절 그이는 복싱선수, 나는 레슬링 선수였다.”

-신문을 정독하신다고.

김: “조선일보를 비롯해 신문 3개를 본다. 사설까지 다 읽으면 서너 시간이 금세 간다.”

신: “신문을 봐야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눈이 나빠져 더 오래 읽지 못 하는 게 한이다.”

-나라 안팎 상황이 어렵다.

신: “너무들 싸운다. 우리가 빨갱이가 돼서 뭐하고 우익이 돼서 뭐 하나. 후손들을 생각해야지. 제발 포용의 정치를 해주면 좋겠다.”

김: “전쟁은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국론이 분열되고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해이가 심할 때 터진다. 국방도 미국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 평화는 구걸이 아니라 강력한 힘으로 이루는 것이다.”

-역대 대통령 중 어느 분을 좋아하셨나?

김·신: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영화 ‘빨간 마후라’의 마지막에 박정희 대통령이 에어쇼 관람하는 모습이 짧게 스친다.

김: “방위산업의 씨앗을 뿌린 박정희 대통령과 과학자, 엔지니어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 오늘의 공군은 없었을 것이다.”

신: “박 대통령은 영화 발전에도 관심이 많았다. 대종상 영화제에 직접 나와 시상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백세 인생에 점수를 주신다면?

김: “90점? 좋아하는 비행기를 원없이 타봤으니(웃음).”

신: “점수는 모르겠고, 그저 열심히, 후회없이 살았다.”

-청년들에게

김: “맨손으로 폭탄을 떨어뜨리던 우리가 전세계에 무기를 수출하는 나라가 됐다. 기적은 그냥 오지 않는다. 역경을 뚫고 이겨내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신: “‘빨간 마후라’의 가사처럼 ‘번개처럼 지나가는’ 것이 ‘청춘’이더라. 이왕 태어난 거 불꽃처럼 뜨겁게, 번개처럼 담대하게 살아봐야 하지 않겠나, 하하하!”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만난 김두만 장군과 신영균 배우(오른쪽). '빨간 마후라'의 두 영웅은 "이 나이가 되면 나라 걱정이 앞선다"며 "강한 군대와 포용의 정치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고 했다. /장경식 기자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만난 김두만 장군과 신영균 배우(오른쪽). '빨간 마후라'의 두 영웅은 "이 나이가 되면 나라 걱정이 앞선다"며 "강한 군대와 포용의 정치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고 했다. /장경식 기자


☞김두만·신영균

김두만:1927년 경남 의령 출생. 일본 육군소년비행학교, 조선경비대 보병학교, 육군항공학교를 졸업했다. 1952년 1월11일 대한민국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을 달성했다. 제10전투비행단장, 공군작전사령관을 거쳐 11대 공군참모총장에 올랐다. 맥아더, 백선엽 장군과 함께 ‘6·25전쟁 10대 영웅’에 선정됐다.

신영균:1928년 황해도 평산 출생. 서울대 치대를 졸업한 뒤 1960년 영화 ‘과부’로 데뷔, ‘미워도 다시 한번’ 등 300여편 작품에 출연했다. ‘연산군’으로 대종상 남우주연상, ‘빨간 마후라’ ‘상록수’로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5, 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신영균예술문화재단 명예이사장이다.

[김윤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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