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95회>]
한국에 직설 충고해 온 日 외교관 미치가미 은퇴
‘위험한 낙관론이 한국사회 뒤덮고 있다’고 지적
일본을 연구하기보다 비난에 주력한다고 비판
“일본,중국 제대로 이해하느냐가 한국 미래 좌우”
한국에 직설 충고해 온 日 외교관 미치가미 은퇴
‘위험한 낙관론이 한국사회 뒤덮고 있다’고 지적
일본을 연구하기보다 비난에 주력한다고 비판
“일본,중국 제대로 이해하느냐가 한국 미래 좌우”
최근 은퇴한 미치가미 히사시 주불가리아 일본대사는 1980년대 서울대 유학을 포함 한국에 5차례, 10년 넘게 살면서 한국사회를 향해 공개적으로 충고해왔다. 이 때문에 "일본 외교관 답지 않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사진은 한중일 3국협력사무국(TCS) 사무총장으로 서울에 근무할때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 |
얼마 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일본 외교관의 페이스북에 짧은 글이 올라왔습니다. “보고가 늦었습니다. 작년 11월 42년 반의 외무성 근무를 마쳤습니다. 각지에서 많은 분을 만나고 배우고 일본을 알리고 교섭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한국, 중국, 미국, 제네바, 두바이, 미크로네시아, 불가리아와 둘도 없는 나날들에 크게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쓴 이는 주불가리아 일본 대사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미치가미 히사시(道上尚史) 대사. 그가 자신이 근무한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한국을 언급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의 외교관 인생에서 한국에 가장 오래 근무하며 한국인들과 각별한 관계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서울대 유학한 ‘코리안 스쿨’
도쿄대 법학부 출신인 그는 1983년 외교관이 된 후 1985년 서울대 외교학과에 유학했습니다. 이후 주한 일본 대사관에서 1998~2000년 1등 서기관·참사관으로, 2011~2014년에는 문화원장·총괄공사로 근무했습니다. 2017년 부산 총영사로 부임했고, 2019년에는 한·중·일 3국협력사무국(TCS) 사무총장을 맡아 서울에서 근무했습니다. 서울대 유학을 합치면 한국에서만 5차례, 10년 넘게 살면서 40년 넘게 한국의 변화를 지켜봐 왔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은퇴는 일본 외무성 내 ‘코리안 스쿨’ 중에서 최고참 지한파 외교관의 퇴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00년, 그가 1등서기관으로 대사관 정무과장을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1999년부터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로 일하면서 수많은 일본 외교관을 만났지만, 유독 그가 기억에 남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모리 다케오(森健良) 전 차관, 아이보시 고이치(相星孝一)전 주한 일본대사와 동기인데 외무성 안팎에서의 평가가 엇갈립니다. “일본 외교관답지 않다”며 그를 비판하는 이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미치가미 대사는 그만큼 개성이 강한 외교관인데, 한국 사회를 향해 직설적인 충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한국인들과의 관계를 비교적 잘 유지하면서 한국에 도움이 되는 얘기를 해 왔다는 점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다(韓國人に生まれなくてよかった)’라는 책을 낸 무토 마사토시(武藤正敏) 전 주한 일본 대사와는 비교됩니다.
미치가미 히사시 대사가 2016년 출간한 '한국인만 모르는 일본과 중국' 표지. 그는 한국인들이 '공기'에 휩쓸리지 않고 일본과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한국의 미래를 좌우한다고 지적했다. |
“칭찬보다 필요한 것은 불편한 충고”
그가 2016년 펴낸 ‘한국인만 모르는 일본과 중국’의 서문은 ‘한국의 미래를 위한 제언’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은 멋진 나라라고 칭찬을 늘어놓기는 쉽다. 하지만 그런 칭찬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반대 방향에서 솔직하게 썼다.”
10년이 지난 지금 읽어봐도 그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한국이 공기에 휩쓸리지 않고 인접국인 중국과 일본을 제대로 이해하는가의 여부가 한국의 국익과 미래를 좌우한다”며 “지금의 한국은 냉정히 말해 일본은 물론 중국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한국의 과거사 인식에 대한 그의 충고는 일본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지만 새겨들을 만합니다. “국제사회의 상식으로 보면 ‘역사’와 ‘민족의 기억’은 긴장 관계에 있으며, 단순한 민족의 기억을 극복한 지점에 비로소 올바른 역사가 있다.” 한국 사회가 일제 식민지 문제에만 몰두해 미래 지향적 한일 협력을 ‘친일’로 몰아가는 분위기를 비판한 대목입니다.
문예춘추에 실린 ‘위험한 낙관론’
미치가미 대사는 한국의 경제력이 일본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서면서 일본을 경시하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제가 도쿄 특파원 시절인 2019년 그가 ‘문예춘추’ 11월호에 썼던 기고문을 기억합니다. 그 제목은 ‘한국을 뒤덮은 위험한 낙관론의 정체’. 그는 한중일 3국 협력 사무국 사무총장으로 서울에 부임하기 전에 부산 총영사로 재직하며 겪은 경험을 토대로 이 글을 썼습니다.
소녀상과 징용 노동자상 문제로 총영사관이 겪었던 긴장, 2019년 7월 총영사관 도서실에서 자료를 열람하던 학생들이 갑자기 마당으로 나와 짧은 반일 시위를 벌였던 일까지, 현장에서 느낀 일들을 담담하게 서술합니다. 그리고 그는 문재인 정부의 반일 정치화를 지적하며 “한국 사회에서 일본을 공부하려는 분위기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일본은 이제 관광과 음식의 대상이 돼버렸다”며 “과거처럼 산업·기술·법률·행정·학문·패션을 진지하게 연구하며 배우려는 흐름은 크게 줄었다”고 썼습니다.
그는 한국인들과의 모임에서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나는 스시가 좋다, 이자카야에 간다, 일본 여행도 많이 가 봤다, 자식들이 일본어 공부한다, 그러니까 일본을 잘 안다. 우리 세대는 반일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하지만 즐기고 소비하는 것과 일본에 대한 외교는 별개 문제입니다.” 일본을 소비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한국 사회를 비판한 겁니다. 일본을 심층 연구하는 이들은 눈에 띄게 줄어드는데, 지난해 방일 한국인 여행객 수가 945만 9600명으로 1000만명에 육박한 것은 그의 지적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휴일에도 한국 공부하는 ‘벤쿄카이’
저에게는 그의 비판이 매우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한국 사회의 치부를 들킨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도쿄에서 보니 한국과는 달리 일본 사회에서는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과 2019년 7월 아베 내각의 한국을 겨냥한 경제 조치 이후, 한국을 공부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늘어났습니다.
그즈음 한일 관계에 관심이 많은 일본 지식인들의 벤쿄카이(勉強会·공부 모임)에 초대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휴무(休務)인 토요일에 열린 모임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했다가 금세 자세를 가다듬어야 했습니다. 발표자가 “일본은 약속을 중시하는 반면 한국은 정의가 중요하다”며 양국을 비교 분석하자 20여 명의 참석자는 열심히 메모했습니다.
문재인 정권과 한국 사회에 대한 분석에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하는 모습엔 긴장감마저 느껴졌습니다. 한 참석자는 “난난갓토(남남갈등·南南葛藤)가 무슨 뜻이냐”고 제게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조선일보 제휴사인 마이니치 신문에서는 서울 특파원으로 파견됐던 중견 기자의 사내 특강이 열렸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누구인지, 한국의 집권 세력은 어떤 이들인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아 기자들과 직원들을 상대로 벤쿄카이를 연 것입니다.
2017년 미치가미 히사시 부산총영사가 한일관련 행사에서 정의화 전 국회의장(오른쪽에서 두번째), 장제국 동서대 총장(맨 오른쪽) 등과 함께 했다. |
NHK도 아닌 민영 상업 방송이 주말 황금 시간대에 한일 관계를 2시간 동안 다룬 기획을 방영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주간지, 월간지에는 한국 관련 기사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면서 자극적인 혐한(嫌韓) 기사로 연결되는 부작용도 나왔습니다.
한국은 장기 전략 갖고 일본 다뤄야
도쿄의 한국 특파원들은 일본인들을 만날 때마다 한국의 현 상황을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덕분에 한동안 일본에서는 생소한 ‘세키헤이세산(적폐청산·積弊淸算)’의 뜻을 자주 설명해줘야 했습니다.
일한교류기금 초청으로 일본의 대학생 10여 명을 대상으로 특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특강을 마치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이메일을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세 명에게서 한국 국회의원의 일본에 대한 관심, 한국 젊은이들의 정치 참여 등에 대해 구체적인 질문을 받아 답장해줬습니다. 일본 사회는 징용 배상 판결에 흥분하기보다는 한국을 공부하려는 분위기가 엿보이는데, 한국에서는 일본을 비난하고 일본과의 접촉을 끊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 것처럼 보여 안타까웠습니다.
미치가미 대사는 양국의 대비되는 모습을 염두에 두고, 한국이 국가 차원에서 일본을 치밀하게 연구하고 관리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 점을 지적해 왔습니다. 일본은 한국의 외교·안보·경제에서 핵심 변수 중 하나인데, 장기 전략 없이 즉각적인 반응과 반발만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솔직한 충고는 불편하지만, 새겨들어야 할 경고로 남아 있습니다. 다시 만날 때는 그의 쓴소리 대신 “한국 사회의 공부하는 모습에 일본이 긴장해야겠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이하원 외교안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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