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조선일보 언론사 이미지

[그 영화 어때] 웰컴 투 광천골, 순박한 휴먼 사극 ‘왕과 사는 남자’

조선일보 백수진 기자
원문보기

[그 영화 어때] 웰컴 투 광천골, 순박한 휴먼 사극 ‘왕과 사는 남자’

서울맑음 / -3.9 °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쇼박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쇼박스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백수진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180번째 레터는 설 연휴를 앞두고 개봉하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입니다. 올해 설 연휴에는 세 편의 한국 영화가 잇따라 극장을 찾습니다. 장항준 감독·유해진 주연의 사극 ‘왕과 사는 남자’를 시작으로, 류승완 감독·조인성 주연의 첩보 액션 ‘휴민트’, 김태용 감독·최우식 주연의 가족 드라마 ‘넘버원’까지 장르도 다양하게 준비돼 있습니다. 차례로 레터를 보내드릴 예정이지만, 오늘은 가장 먼저 출격하는 ‘왕과 사는 남자’(2월 4일 개봉)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예고편부터 기대가 컸습니다.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휴먼 사극, 믿고 보는 베테랑 배우 유해진과 드라마 ‘약한 영웅’을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은 박지훈의 조합, 게다가 한국인이 애틋하게 여기는 단종의 숨겨진 이야기라니. 어쩌면 극장가의 흥행 가뭄을 시원하게 해갈해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됐습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쇼박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쇼박스


단종의 비극은 오랫동안 사극의 단골 소재였지만, 그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대부분 세조의 왕위 찬탈 과정에 집중하다 보니, 단종의 마지막 1년은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죠. 실록에는 단순히 단종이 사망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어 세조가 사약을 내렸다는 설과, 하인이 목을 졸랐다는 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 까지 여러 해석이 엇갈립니다.

영화는 이제껏 다뤄지지 않았던 단종의 마지막 시간, 그리고 그의 곁을 지켰던 충신 엄흥도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강원도 영월의 호장이었던 엄흥도는 실존 인물로, 단종의 무덤인 장릉 옆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까지 세워져 있는데요. 후환이 두려워서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고, 평생을 숨어 살아야 했던 충신입니다. 영화는 몇 줄에 불과한 그의 기록에서 출발해 상상력을 과감하게 발휘합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쇼박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쇼박스


이야기는 1457년 노산군으로 강등된 이홍위(박지훈)가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나며 시작됩니다. 산골 마을 광천골의 촌장 엄흥도(유해진)는 유배 온 양반 덕분에 부유해졌다는 옆 마을의 소식을 듣고, 마을의 부흥을 위해 자기 마을도 유배지가 되기를 자처하죠. 옆 마을 노루골 촌장 역으로 안재홍 배우가 특별 출연해, 죄인 유치를 위해 경쟁을 벌이는 모습이 코믹하게 그려집니다.

하지만 권세 높은 양반이 와서 마을에 콩고물이 떨어질 것이란 기대와 달리, 광천골을 찾은 이는 수염도 제대로 나지 않은 어린 선왕. 졸지에 선왕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된 엄흥도는 점차 그와 가까워지고, 그 과정에서 깊은 갈등에 빠지게 됩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쇼박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쇼박스


역사적 기록에 기반했다고는 하나, 사극 마니아라면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스포일러가 될까 구체적으로 언급하긴 어렵지만, ‘저게 가능하다고?’ 싶은 장면도 적지 않았습니다. 치밀함을 기대하기보단, 살짝 흐린 눈을 하고 순박하고 따스한 동화처럼 보는 편이 좋습니다. 20여년 전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이 떠오르기도 했는데요. 삶의 의지를 잃은 선왕과,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백성들의 인간적인 유대가 영화의 중심을 이룹니다.

단점을 먼저 말씀드렸지만, 장점도 분명합니다. 기존 사극과 차별화된 캐릭터들이 눈에 띕니다. 영화 속에서 단종은 무력하고 나약한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고, 백성을 지키는 군주로서의 성장을 보여줍니다. 수양대군 대신 한명회가 악역으로 등장하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그간 왜소하고 비열한 간신으로 묘사돼 왔던 한명회를, 배우 유지태가 장대한 체구와 위압적인 카리스마로 새롭게 그려냅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의 가장 큰 강점입니다. 엄흥도 역의 유해진은 정 많고 익살스러운 촌장으로 시작해,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단종을 지키기까지 감정 변화를 유려하게 표현합니다. 장 감독이 드라마 ‘약한 영웅’을 보고 캐스팅했다는 단종 역의 박지훈 역시 극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줍니다. 분노와 슬픔, 두려움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큼직한 눈망울을 보고 있으면, 왜 단종 역에 박지훈을 캐스팅할 수밖에 없었는지 고개가 끄덕여지실 겁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쇼박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쇼박스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 나면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신선한 소재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초반부의 과장된 코미디와 마냥 선하고 아기자기한 산골 마을 묘사는 철 지난 드라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각본과 연출 모두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비교적 정직하게 흘러갑니다.

요즘 ‘용두사미’ 영화들이 많은데, 이 영화는 오히려 후반부로 갈수록 힘을 발휘합니다. 어느새 아버지와 아들처럼 가까워진 두 사람의 마지막 선택 앞에서는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총평을 하자면, 명절 연휴 가족과 함께 보기에는 무난한 선택지지만, 그 이상의 매력을 찾아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아쉬움은 남지만, 아직 ‘넘버원’과 ‘휴민트’ 시사회가 남아 있습니다. 설 연휴에 볼 만한 다른 영화들도 차례차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는 세상의 창이고 호수이며 거울. 여러분을 그 곁으로 데려다 드립니다.

그 영화 어때 더 보기

[백수진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