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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 게 아니라 놓쳤다”…지각비 3억, 서울 집값 ‘관망’의 배신 [부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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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 게 아니라 놓쳤다”…지각비 3억, 서울 집값 ‘관망’의 배신 [부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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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망의 대가는 ‘부동산 지각비’…매매·분양·월세 동반 폭주에 퇴로 막힌 실수요자
“조금만 더 내려오면 사자고 했죠. 그런데 내려오기는커녕 계단을 몇 칸씩 뛰어오르더군요.”

서울 마포구에서 전세로 살고 있는 직장인 김모(42)씨는 요즘 퇴근 후 습관처럼 부동산 앱을 켠다. 1년 전만 해도 ‘현실적인 선택지’였던 매물들은 이제 검색 결과에서조차 사라졌다. 김씨가 계약 직전까지 고민하던 아파트는 10개월 만에 3억원이 올랐다. 그는 “그때 샀으면 무리였겠지만, 지금은 아예 불가능한 가격”이라며 “기다린 게 아니라 놓친 것”이라고 말했다.

거래는 뜸하지만 신고가 거래가 이어지면서 실수요자들의 체감 진입 가격은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뉴스1

거래는 뜸하지만 신고가 거래가 이어지면서 실수요자들의 체감 진입 가격은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뉴스1


서울 주택 시장에서 ‘관망’은 더 이상 안전한 선택이 아니다. 집값 하락을 기대하며 한 발 물러선 사이, 매매·분양·전월세 비용이 동시에 치솟으며 실수요자들의 퇴로를 하나씩 지우고 있다. 현장에선 이 흐름을 ‘부동산 지각비’라고 부른다. 기다린 시간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비용이 붙는 구조다.

◆거래는 끊겼는데 가격은 오른다…현장의 괴리

23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한 공인중개사는 매매 문의 전화가 하루에 몇 통 되지 않지만, 간혹 성사되는 거래는 대부분 신고가라고 최근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 공인중개사는 “매물은 거의 없고, 살 수 있는 사람만 산다”며 “한두 건의 거래가 주변 시세를 통째로 끌어올리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한강변을 따라 형성된 고가 단지들은 ‘그들만의 리그’가 됐다. 넓은 평형대 고급 주택이 억대 단위로 가격을 경신해도, 체감 온도는 오히려 더 빠르게 전파된다.

마포·성동·용산구 등 이른바 ‘마용성’ 지역에서도 “오늘이 가장 싸다”는 말이 공공연히 오르내린다. 매수를 망설이던 실수요자들 사이에서 조급함이 번지는 이유다.

◆분양가도 멈추지 않았다…상한선이 사라진 체감


기다림이 독이 되는 건 분양 시장도 마찬가지다. 공사비 인상과 자재 가격 상승이 겹치면서 분양가는 한 번 오르면 되돌아오지 않는다.

예비 청약자 박모(39) 씨는 “작년만 해도 ‘이번은 패스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분양은 더 비쌌다”며 “상한제가 있어도 체감 가격은 계속 위로만 간다”고 말했다.

청약을 기다리는 동안 대출 금리는 쌓이고, 자금 계획은 흔들린다. ‘당첨만 되면 된다’는 기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으로 바뀐다. 분양 공고가 나올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청약 대기자들 사이에서 먼저 나온다. 분양가는 숫자보다 체감이 빠르다.


집을 사지 않고 버티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전세 매물이 줄어들면서 세입자들은 자연스럽게 월세로 이동하고 있다. 마포구의 한 다세대주택에 사는 이모(35)씨는 “전세를 유지하면 언젠가 집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월세를 내느라 저축이 줄어든다”며 “집값을 모으기 위해 버텼는데, 버티는 비용이 너무 커졌다”고 했다.

월세는 집값처럼 한 번에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몇 달이 지나면 통장 잔고에서 가장 먼저 차이가 난다. 집값이 오르는 동안 저축 속도는 느려지고, 그 차이는 다시 진입 장벽이 된다.

집값 하락을 기다리던 실수요자들이 전세·월세 부담과 함께 ‘기다림의 비용’을 떠안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뉴시스

집값 하락을 기다리던 실수요자들이 전세·월세 부담과 함께 ‘기다림의 비용’을 떠안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뉴시스


◆“지금은 타이밍보다 감당 능력의 문제”

전문가들은 현재 시장을 두고 “예측 자체가 무의미해진 구간”이라고 말한다. 공급 부족과 신축 선호가 맞물리며, 가격이 내려올 명분보다 버틸 이유가 더 많은 구조라는 설명이다.

한 부동산 시장 전문가는 “이제는 ‘언제 사느냐’보다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느냐’를 먼저 따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조금만 더 보자”는 말이 가장 비싼 말이 돼버린 사례를 현장에선 이미 여러 번 봤다는 설명이다.

서울 집값을 둘러싼 불안은 숫자보다 체감에서 먼저 온다. 거래는 뜸하지만 신고가는 이어지고, 실수요자들의 기준선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진다. 기다림이 미덕이던 시절은 지났다. 지금 시장에서 기다림은 비용이 된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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