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한겨레 언론사 이미지

‘사건’의 진정한 재현은 어떻게 가능한가? [.txt]

한겨레
원문보기

‘사건’의 진정한 재현은 어떻게 가능한가? [.txt]

속보
金총리 "조선·핵잠·핵연료 韓관심사 언급…밴스 부통령 적극 공감"
기억·서사 | 오카 마리 지음, 김병구 옮김, 교유서가(2024)

기억·서사 | 오카 마리 지음, 김병구 옮김, 교유서가(2024)


빼어난 문학은 한 공동체가 겪은 폭력적 사태를 환기하고 이를 치유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치열하게 담는 법이다. 작가가 힘겹게 재현한 그때 그 일을 읽으면서, 일상에 젖어 마땅히 동의해야 할 가치가 훼손당하는 것을 모른 체했다는 자성에 이른다. 그런데 가끔 이런 재현의 윤리성에 의문이 들기도 한다. 미증유의 사건을 직접 겪지도 않고 도대체 얼마나 객관적 진실에 육박하게 재현했을까, 그런데 정작 사건을 겪은 사람은 생존해 있지 않거나, 증언할 능력이 없다면 사건의 온전한 재현은 가능할까, 라고 말이다. 이런 의문이 일어날 적에 읽어볼 만한 책이 오카 마리의 ‘기억·서사’이다.



지은이는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예로 든다. 기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한 병사를 구하려고 특별부대가 편성된다. 이유는 라이언의 세 형제가 전사해서다. 만약 네 형제가 다 전사한 사실이 알려지면 여론에 악영향을 끼칠 테다. 한 사병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서도 아니고, 참척의 고통을 겪을 어머니를 위한 배려도 아니다. 전쟁 혐오증을 미리 차단하려는 조치일 뿐이다.



영화는 바로 이 대목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야 했다. 휴머니즘을 포장한 국가주의적 책략이었지 않은가. 이 영화의 반전은 라이언이 동료병사를 버리고 전선을 이탈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일어난다. 독일 전차부대에 맞서 다리를 지켜내기로 하고 특별부대도 이 전투에 참여했는데, 다 죽고 라이언만 살아남았다. 특별부대원은 정의롭지 못한 명령을 받았으나, 라이언의 정의로운 결정에 동참하여 대의를 위한 죽음을 선택한 것이 되어버렸다. ‘기억의 횡령사태’가 벌어진 셈이다.



지은이는 사건을 언어화하는 일은 사건을 과거로 길들이는 일이 아니겠냐고 묻는다. 과거의 것으로 길들인 사건은 우리의 기억 속에 안정된 은거지를 찾아낸다. 그러니 말해지지 않은, 사건의 잉여부분이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언어라는 가두리에 완전히 갇히지 않고 넘쳐흐르는 사건의 조각이 있는 법이다. 리얼리즘의 욕망이란 재현 불가능한 ‘현실’이나 ‘사건’의 잉여를 부인하는 행위와 결부되어 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전반부에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된 리얼한 전투장면은 ‘사건’의 잉여로 연결된 문을 봉인하려는 기만적 술책이다.



지은이는 나름 대안을 제시한다. ‘사건’의 폭력의 흔적을 상처로써 현재의 이야기에 기록하는 데에서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 가질 가능성이 있다. 클라이스트의 단편소설 `칠레의 지진'이 이를 보여준다. 지진을 겪고 나서 펼쳐진 광란의 상황에서 남의 자식 대신 내 자식을 잃은 부부는 살아남은 남의 자식을 키우기로 한다. 부조리한 폭력을 저지른 집단은 이 사건을 기억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부는 그 학살의 기억을 끊임없이 상기할 수밖에 없다.



서사장치로 말하여서 감춘다면, 어떻게 해야 감추려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지, 또는 그것을 읽어낼 수 있을는지 고민해야 마땅하다. 지은이는 프로이트식으로 표현하면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사건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아갈 적에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사건을 겪은 그 사람 ‘되기’에 희망이 있다는 말이다.



도서평론가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겨울밤 밝히는 민주주의 불빛 ▶스토리 보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