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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산책] '신년음악회', 시간의 흐름이 멈추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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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산책] '신년음악회', 시간의 흐름이 멈추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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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새해가 시작되는 첫날이 되면 전 세계인의 귀와 시선은 오스트리아 수도 '빈'으로 향한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1870년 개관한 '무지크페라인' 황금홀에서 연주하는 신년음악회를 보기 위해서다.

1941년, 빈에서 시작된 이 음악회는 이제는 수천만 명이 TV와 극장에서 생방송으로 지켜보는 전 세계인의 축제이자, 새해를 여는 하나의 '의식(儀式)'으로 자리 잡았다.

수많은 클래식 애호가에게는 언젠가 반드시 직접 경험해야 할 '버킷리스트'의 정점에 놓인 음악회이기도 하다.

단일 음악회로는 가장 유명하고 제일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지만, 역설적으로 신년음악회만큼 단조롭고 개성 없는 연주회도 드물다.

세상에서 가장 예측 가능한 음악회이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전통 춤곡인 요한 슈트라우스 일가의 지극히 세속적인 왈츠가 해마다 반복된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마지막에 반드시 등장하는 '푸른 도나우' 왈츠에 맞추어 몸을 흔들고, 앙코르처럼 연주되는 '라데츠키 행진곡'에 박수를 치기 위해 이 음악회를 기다린다.

어떤 면에서는 구태의연하기도 하고 시대착오적이기도 한 '신년 음악회'가 여전히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은 불확실의 광장이자 불안의 밀실이다.


미지의 우주이자 무질서의 정글이다.

새해의 첫날은 그런 세계로 등 떠밀리듯 첫 발을 내어 딛는 순간이다.

무한한 기대만큼이나 무수한 두려움이 솟아오르는 순간이다.


끝은 결과를 받아들이면 되지만 시작은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빈의 신년음악회는 바로 이 지점, 새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의식(意識)'과 나아가기를 주저하는 '무의식'이 교차하는 순간을 정교하게 파고든다.

왈츠는 목적지로 나아가는 음악이 아니다.

교향곡처럼 긴장을 축적해 결말로 돌진하지도 않고, 소나타처럼 갈등과 해결을 전개하지도 않는다.

왈츠는 돌고 돈다.

그러나 그 회전은 진보가 아니라 귀환이다.

매번 다른 듯 보이지만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시간을 앞으로 밀지 않고 시간을 유예한다.

신년음악회는 바로 그 시간 속에서 새해에는 혁신하고 진보해야 하고, 성취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우리를 잠시 벗어나게 한다.

변화가 미덕이 되고 변모가 유행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전통이 반복되고 변할 수 없는 진실이 되돌아온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안심하게 한다.

왈츠가 흐르는 동안, 신년음악회는 불확실성과 불안을 견디기 위한 '의례'가 되고 진보와 혁신에 대한 강박을 잠시 잊을 수 있는 '의식'이 된다.

빈의 신년음악회에서 연주되는 왈츠에는 새로움과 놀라움도, 질문과 의미도, 설교와 설명도, 구원과 위안도, 진보와 혁신도 없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들은 의도적으로 회피되고 유보된다.

이러한 신년음악회의 철학과 미학은 지휘자 선택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1987년부터 매년 다른 지휘자를 초대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탈리아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가 일곱 차례나 초대된 사실은 상징적이다.

무티는 오페라와 교향곡 레퍼토리에서는 강한 해석적 개성을 보이는 지휘자이지만, 신년 음악회에서만큼은 전통을 질문하거나 해석하지 않는다.

전통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확신을 음악으로 제공한다.

빈 필하모닉이 그를 반복적으로 초청했다는 사실은, 신년음악회가 전통을 새롭게 질문하거나 재구성하는 장이 아니라, 전통이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데 적합한 지휘자를 선호해 왔음을 시사한다.

개성이 누구보다 뚜렷한 지휘자인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두 차례 초대된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왈츠는 강렬했지만, 혁명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변화나 진보가 아니라 '기쁨의 폭발'이자 '황홀한 정지'였다.

시작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끝의 무게를 불러오지 않았다.

반대로 아르농쿠르가 다시 초대받지 못한 이유는 그가 전통을 존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전통을 질문했기 때문이다.

그는 왈츠 안에서조차 구조를 드러내고, 관습의 기원을 해부했다.

시간의 흐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의 연주는 아름다웠지만, 편안하지 않았다.

종합하면 신년음악회의 왈츠 연주는 전통을 보존하는 연주가 아니라, 전통이 더 이상 의식되지 않도록 만드는 연주에 가깝다.

변화는 있어야 하지만 눈에 띄어서는 안 되고, 해석과 질문은 허용되지만 주장하거나 주입해서는 안 된다.

이미 알고 있는 음악을, 낯설지 않게 변주함으로써, 새해의 시간을 잠시 유예할 수 있는 지휘자만이 다시 초대받는다.

'전통은 단순히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획득된다.'라는 T.S.

엘리엇의 말대로 신년음악회의 전통은 이런 미학 속에서 매년 새롭게 갱신된다.

빈 신년음악회가 매년 반복되는 이유는 새로움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고 재촉하지 않고, 그 문턱에서 잠시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한다.

제국이 사라진 이후 오스트리아는 새로운 거대한 서사를 다시 만들기보다, 남아 있는 형식과 의례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을 유지해 왔다.

신년음악회는 그 선택이 음악으로 구현된 가장 정제된 형태다.

'푸른 도나우'가 흐르는 순간,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원을 그리며 회전하고,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는 감각 속에 머문다.

'라데츠키 행진곡'에 맞춰 울려 퍼지는 박수는 전진의 함성이라기보다,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안도의 몸짓에 가깝다.

이 음악회는 새해를 축하하기보다, 새해를 즉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반복되는 형식 속에서 불확실한 세계를 견딜 수 있는 순간의 멈춤을 제공한다.

매년 연주곡은 달라지지만, 마지막이 언제나 같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변화의 시간으로 들어가기 직전, 우리는 한 번 더 돌아온다.

그 귀환의 감각이야말로 이 음악회가 계속되는 이유이며 변하지 않는 형식이 오늘날까지 유효한 까닭이다.

유인재 미래도시성장연구소장·음악평론가 신년음악회,클래식,오케스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