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지도 왜곡이 키운 ‘북극 환상’
메르카토르 투영법이 부풀린 그린란드의 크기
자원·항로 계산위 덧씌워진 시각적 착시
FT “지도는 사실이자 주장…트럼프는 그것을 안다”
메르카토르 투영법이 부풀린 그린란드의 크기
자원·항로 계산위 덧씌워진 시각적 착시
FT “지도는 사실이자 주장…트럼프는 그것을 안다”
지도 투영법은 모든 곳에서 면적과 형태를 동시에 보존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TF] |
[헤럴드경제=서지연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그린란드에 유독 강한 소유욕을 드러내는 배경에는 지정학·자원 전략 못지않게 ‘세계지도 착시’가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북극에 가까운 지역이 과장돼 보이도록 만드는 지도 투영법이 그린란드를 실제보다 훨씬 크고 전략적으로 압도적인 공간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21일(현지시간) 분석 기사에서 “지도는 사실을 보여주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특정한 관점을 주장하는 수단”이라고 지적했다. 지도에 무엇을 크게, 작게, 중심에 놓느냐에 따라 보는 사람의 인식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FT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효과를 잘 알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메르카토르 투영법으로 제작된 세계지도에서는 그린란드가 아프리카 대륙과 맞먹는 거대한 땅처럼 보이는데, 이런 시각적 왜곡이 그린란드를 ‘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적 공간’으로 인식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도에서 부풀려진 이미지가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상상력이 다시 외교·안보 전략 구상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반복된다고 FT는 설명했다.
아프리카만큼 커 보이는 섬, 실제는 14분의 1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세계지도는 메르카토르 투영법을 기반으로 한다. 이 방식은 항해와 방향 표시에는 유리하지만, 북극과 남극에 가까울수록 면적을 극단적으로 부풀린다. 그 결과 그린란드는 세계지도에서 아프리카 대륙과 맞먹는 크기로 그려진다.
하지만 실제 면적은 전혀 다르다. 아프리카 대륙 안에는 그린란드가 약 14개나 들어간다. 그린란드의 면적은 약 220만㎢로, 알제리보다도 작다. 그럼에도 지도 위에서는 ‘대륙급 섬’처럼 보이면서 지정학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FT는 “누가 감히 미국 대통령에게 그가 탐내는 북극 섬이 생각만큼 크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꼬집었다. 지도 속 착시는 정치적 판단을 왜곡할 수 있다는 의미다.
19일(현지시간) 그린란드 누크에서 눈이 내리는 가운데 사람들이 해안선을 따라 얼음 조형물 사이로 걷고 있다. [AFP] |
그린란드는 오랫동안 ‘얼음으로 뒤덮인 황량한 섬’ 정도로 인식돼 왔다. 전체 면적의 약 75%가 두께 수천 미터의 빙상으로 덮여 있고, 인구도 5만5000명 남짓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후 변화와 자원 문제가 맞물리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온난화로 빙하가 후퇴하면서 접근이 어려웠던 지하자원과 항로의 가치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석유와 가스, 네오디뮴·디스프로슘 등 희토류 광물이 대규모로 매장돼 있다는 추정이 나오면서 그린란드는 ‘자원의 보고’로 재해석됐다.
특히 전 세계 희토류 공급망의 90% 이상을 중국이 장악한 상황에서, 미국 입장에서는 그린란드가 판도를 흔들 수 있는 잠재적 카드로 떠올랐다. 중국이 주도하는 자원 질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게임 체인저’라는 인식이 힘을 얻었다.
북극 항로의 부상도 그린란드의 전략적 가치를 끌어올리고 있다. 북극해를 통과하면 유럽과 동아시아를 잇는 해상 운송 거리가 기존 수에즈 운하 경로보다 약 40% 단축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과 러시아가 북극 항로 개발에 협력하는 상황에서, 미국으로서는 그린란드를 전략적으로 방치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실제로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덴마크와 방위 협정을 맺고 그린란드 북서부에 미사일 탐지용 공군 기지를 운영해 왔다.
그린란드는 이미 군사적으로는 미국 전략망 안에 들어와 있는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구상은 이를 자원과 항로까지 확장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지도 밖 현실’은 다르다…그린란드 연약한 흙과 퇴적층 ‘아킬레스건’
[헤럴드DB] |
문제는 지도 위 상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다. 최근 과학자들은 그린란드 빙상 아래 지반이 단단한 기반암이 아니라 연약한 흙과 모래 퇴적층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지질 구조는 대규모 자원 채굴의 가장 큰 장애물로 꼽힌다.
퇴적층 지반에서는 시추 장비가 쉽게 막히고, 붕괴 위험으로 작업 중단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비용은 급증하고 상업성은 떨어진다. 빙하 이동이 잦아지면 해상 시추 시설의 안전 리스크도 커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린란드의 ‘아킬레스건’이 트럼프 행정부의 자원 구상에도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FT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도에 유독 집착해온 점에도 주목했다. 그는 집권 1기 당시에도 백악관에 대선 결과 지도를 걸어두며 붉은색으로 채워진 광활한 미국을 강조했다. 인구 분포가 아니라 면적이 주는 인상을 정치적 메시지로 활용한 것이다.
지도는 객관적 사실처럼 보이지만, 어떤 투영법과 표현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FT는 “지도는 사실이면서 동시에 주장”이라며 “트럼프는 그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린란드를 향한 트럼프의 집착은 자원·군사·항로라는 계산 위에, 세계지도가 만들어낸 ‘북극 환상’이 덧씌워진 결과일 수 있다. 문제는 그 환상이 현실의 물리적·지질학적 한계를 넘을 수 있느냐는 점이다. 그린란드는 지도 속에서는 거대하지만, 현실에서는 자연의 제약이 분명한 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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