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홍 기자] 유럽연합(EU)이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망 무임승차 논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칼을 빼 들었다. EU 집행위원회(EC)가 망 이용대가 분쟁에 규제기관이 직접 개입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디지털 네트워크법(DNA·Digital Networks Act)' 입법을 공식 제안하면서다.
그동안 "인터넷은 무료"라며 망 투자 비용 분담을 거부해 온 넷플릭스, 구글 등 거대 콘텐츠 사업자(CP)들을 제도권 협상 테이블로 강제 소환하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통신 선진국인 한국이 수년째 입법 문턱에서 좌절했던 망 이용대가 논의가 EU의 이번 결단을 계기로 제22대 국회에서 강력한 동력을 얻을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이 역시 유럽 역내의 현안이라 글로벌 이슈와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않다.
시장 자율에서 '제도적 개입'으로… DNA 법안의 핵심
그동안 "인터넷은 무료"라며 망 투자 비용 분담을 거부해 온 넷플릭스, 구글 등 거대 콘텐츠 사업자(CP)들을 제도권 협상 테이블로 강제 소환하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통신 선진국인 한국이 수년째 입법 문턱에서 좌절했던 망 이용대가 논의가 EU의 이번 결단을 계기로 제22대 국회에서 강력한 동력을 얻을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이 역시 유럽 역내의 현안이라 글로벌 이슈와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않다.
시장 자율에서 '제도적 개입'으로… DNA 법안의 핵심
EU 집행위원회가 지난 21일(현지시간) 발의한 디지털 네트워크법(DNA)은 유럽 통신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법안이다. 통신사(ISP)와 CP 간에 망 이용대가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할 경우 더 이상 사적 자치의 영역에 방치하지 않고 정부(규제기관)가 직접 심판관으로 나서겠다는 것이다.
법안의 제192조에 신설된 '분쟁조정 메커니즘'이 태풍의 눈이다. 이에 따르면 ISP와 CP 간 대가 협상이 결렬될 경우 어느 한쪽의 요청만으로도 회원국 규제기관은 즉시 조정회의(Conciliatory meeting)를 소집해야 한다.
단순히 만남을 주선하는 수준이 아니다. 규제기관은 양측의 의견을 청취한 뒤 구체적인 조치 방안과 합의 권고안을 담은 보고서를 내놓아야 한다. 만약 합의가 불발되면 규제기관이 제시하는 '협력 가이드라인'을 따라야 한다. 사실상 규제기관이 적정 대가를 산정하고 이를 따르도록 압박하는 구속력을 갖게 되는 셈이다.
법안의 제192조에 신설된 '분쟁조정 메커니즘'이 태풍의 눈이다. 이에 따르면 ISP와 CP 간 대가 협상이 결렬될 경우 어느 한쪽의 요청만으로도 회원국 규제기관은 즉시 조정회의(Conciliatory meeting)를 소집해야 한다.
단순히 만남을 주선하는 수준이 아니다. 규제기관은 양측의 의견을 청취한 뒤 구체적인 조치 방안과 합의 권고안을 담은 보고서를 내놓아야 한다. 만약 합의가 불발되면 규제기관이 제시하는 '협력 가이드라인'을 따라야 한다. 사실상 규제기관이 적정 대가를 산정하고 이를 따르도록 압박하는 구속력을 갖게 되는 셈이다.
EU가 이처럼 강력한 카드를 꺼낸 배경에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위기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구글, 넷플릭스 등 미국계 빅테크 기업들이 유럽 전체 트래픽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면서도 정작 망 고도화에 필요한 투자 비용은 통신사에게 전가하는 구조가 지속 불가능하다는 판단이다.
집행위는 법안 제안 이유에서 "망 이용이 통신사에 불균형적이거나 지속 불가능한 투자를 초래해서는 안 되며, 트래픽 유발로 발생한 이익은 네트워크 투자 재원으로 공유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한국 통신업계가 줄기차게 주장해 온 공정 기여(Fair Share) 원칙을 EU가 공식 법리로서 인정한 셈이다.
한편 DNA 법안은 망 이용대가 외에도 유럽 통신 인프라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파격적인 규제 완화와 안보 강화책을 담았다. 우선 통신사들의 주파수 사용 기한을 폐지해 '무기한 할당' 체제로 전환한다. 수조 원에 달하는 주파수 경매 비용과 재할당 불확실성을 제거해 5G, 6G 등 차세대 네트워크에 대한 장기 투자를 유도하기 위함이다.
낡은 구리선(Legacy)망은 2035년까지 완전히 종료하고 광케이블로의 전환을 의무화했다. 아울러 중국 화웨이, ZTE 등 보안 우려가 있는 국가의 통신장비 사용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는 통신사에는 주파수 할당을 제한하는 등 고강도 제재를 가하기로 했다.
넷플릭스 사례가 남긴 과제와 22대 국회의 움직임
한국은 세계 최초로 5G를 상용화하고 망 이용대가 논의를 가장 먼저 공론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빅테크의 거센 반발과 통상 마찰 우려로 인해 입법이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세계 최대 단일 시장인 EU가 망 이용대가 분쟁 조정을 법제화함에 따라, 한국 역시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명분을 쥐게 됐다.
실제로 한국은 망 이용대가 분쟁의 최전선이었다. 당장 SK브로드밴드와 넷플릭스 간의 소송전은 전 세계 통신업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비록 양사가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으며 소송을 취하했지만 이는 개별 기업 간의 사적 화해였을 뿐 '망 이용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법적 원칙을 확립하지는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넷플릭스는 한국 통신사에 일부 비용을 지불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구글(유튜브)은 여전히 "망 이용료 법안이 통과되면 한국 내 사업 운영 방식을 변경하겠다"며 크리에이터들을 앞세워 여론전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22대 국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망 이용대가 관련 법안(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을 잇달아 발의하며 입법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현재 국회 과방위에는 이해민, 김우영, 이정헌, 김장겸, 최수진 의원 등이 발의한 법안들이 계류 중이다.
법안은 접근 방식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빅테크의 무임승차를 방지하고 공정한 시장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는 대전제에는 뜻을 같이한다.
먼저 이해민(조국혁신당) 의원과 김우영(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안은 EU의 DNA 법안과 가장 유사한 '절차적 규제' 방식을 취한다. 대가 지급을 법으로 직접 강제하기보다는, 글로벌 CP가 국내 ISP와의 망 이용 계약 체결을 부당하게 지연하거나 거부하는 행위를 금지행위로 규정하고, 분쟁 발생 시 방송통신위원회의 재정 절차를 거치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이는 시장 자율성을 존중하면서도 협상 자체를 거부하는 빅테크의 '몽니'를 제어하겠다는 현실적인 접근이다.
반면 이정헌(더불어민주당) 의원 안은 보다 강력하다. 일정 규모 이상의 트래픽을 유발하는 부가통신사업자가 정보통신망을 이용할 경우, 계약 체결을 의무화하고 계약서에 트래픽 전송 용량과 대가 산정 방식을 명시하도록 강제했다. 사실상 '무임승차' 자체를 원천 봉쇄하는 '망 무임승차 방지법'의 성격이 짙다.
여당인 국민의힘 김장겸, 최수진 의원은 망 이용대가 문제를 안보 및 ICT 기금 이슈와 연계하여 접근하고 있다. 김장겸 의원 안은 망 이용대가 계약 의무화와 함께 글로벌 CP의 국내 대리인 지정 제도를 강화하여 법적 책임성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뒀다. 최수진 의원 안은 부당이득 반환 법리를 차용하여, 망 사용료를 내지 않고 수익을 올리는 행위를 부당이득으로 간주해 규제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글로벌 연대 통한 입법 골든타임, 이번엔 다를까
EU의 DNA 법안은 향후 유럽의회와 이사회의 심의, 의결을 거쳐 최종 확정된다. 통상적으로 이 과정에 1~2년이 소요되지만 EU 집행위가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어 입법 속도는 예상보다 빠를 수 있다. 그리고 EU가 법안을 최종 통과시킬 경우 이는 한국의 입법 추진에 결정적인 '트리거'가 될 전망이다. 그동안 구글 등 빅테크 기업들이 주장해 온 "망 이용료 부과는 한국만의 갈라파고스 규제"라는 논리가 더 이상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지금이 망 이용대가 법제화의 골든타임이라고 입을 모은다. AI, 메타버스, 자율주행 등 미래 산업의 발전으로 데이터 트래픽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상황에서, 네트워크 투자 비용을 통신사나 일반 소비자에게만 전가하는 구조는 한계에 봉착했다. 누군가는 비용을 치러야 하며, 그 비용은 수익을 가장 많이 가져가는 주체가 분담하는 것이 시장 경제 원리에 부합한다는 지적이다.
한편 이번 EU의 DNA 법안에는 '중국산 통신장비 퇴출'과 '레거시망 조기 종료'라는 안보 및 산업 진흥 이슈가 함께 담겨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 국회 역시 망 이용대가 문제를 단순한 기업 간 분쟁이 아닌, 국가 디지털 인프라의 고도화와 안보 주권 확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망 이용대가로 확보된 재원이 국내 통신 인프라 재투자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콘텐츠 산업의 발전으로 선순환되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물론 넘어야 할 산은 여전히 높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망 이용료 법안을 무역 장벽으로 규정하며 통상 압력을 가할 가능성이 있고 유튜브 등 플랫폼 기업들이 인기 크리에이터와 소비자를 볼모로 여론전을 펼칠 수도 있다. 다만 EU라는 레퍼런스가 나오며 상황은 묘하게 돌아갈 전망이다.
<저작권자 Copyright ⓒ ER 이코노믹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