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홍 기자] 유럽 대륙에 새로운 형태의 철의 장막이 내려지고 있다. 과거 냉전 시대의 장막이 이념의 벽이었다면 2026년을 목전에 둔 지금의 장막은 기술과 안보라는 명분으로 세워진 디지털 방벽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으로 미국과의 대서양 동맹마저 흔들리는 가운데, 그 중심에는 중국의 통신장비 거인 화웨이도 우뚝 서 있다.
당장 유럽연합(EU)이 화웨이와 ZTE 등 중국 기업을 겨냥해 사실상의 퇴출 명령을 내리면서 글로벌 통신 시장은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단순한 권고를 넘어선 법적 강제 조치, 이에 따른 중국의 강력한 반발은 미중 패권 전쟁의 전선이 유럽으로 확장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봐야 한다.
다만 위기는 곧 기회라는 오래된 격언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미국의 압박으로 허약한 유럽이 끌려가던 코로나 시기가 아닌, 유럽 자체적으로 미국과 어설픈 날을 세우며 화웨이를 내치는 지금이 더 확실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당장 유럽연합(EU)이 화웨이와 ZTE 등 중국 기업을 겨냥해 사실상의 퇴출 명령을 내리면서 글로벌 통신 시장은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단순한 권고를 넘어선 법적 강제 조치, 이에 따른 중국의 강력한 반발은 미중 패권 전쟁의 전선이 유럽으로 확장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봐야 한다.
다만 위기는 곧 기회라는 오래된 격언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미국의 압박으로 허약한 유럽이 끌려가던 코로나 시기가 아닌, 유럽 자체적으로 미국과 어설픈 날을 세우며 화웨이를 내치는 지금이 더 확실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화웨이의 고립, 유럽의 강경 대응,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냉철한 생존 전략을 심층 분석할 필요가 있다.
사진=화웨이 |
디지털 주권의 이름으로... 유럽, 중국산 장비에 '사형 선고'를 내리다
지난 수년간 유럽은 5G 사이버보안 툴박스(Toolbox)라는 이름으로 회원국들에게 고위험 공급업체의 장비 사용을 자제할 것을 권고해왔다. 그러나 권고는 어디까지나 권고일 뿐 강제성이 없었다. 독일을 비롯한 다수의 회원국은 가성비와 기술력을 앞세운 화웨이 장비를 걷어내는 데 소극적이었고 27개 회원국 중 권고를 이행한 국가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가 권고의 의무화, 즉 법제화 카드를 꺼냈기 때문이다. 20일(현지시간) EU 집행위원회는 중국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 ZTE 등의 제품을 핵심 인프라에서 3년 내 완전히 철거하는 내용을 담은 사이버 보안법 개정안을 공개했다.
헤나 비르쿠넨 EU 기술주권·안보·민주주의 담당 집행위원은 "우리 경제와 사회를 지탱하는 정보통신기술 공급망을 확보해 시민과 기업을 보호하려는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새롭게 공개된 사이버보안법(Cybersecurity Act) 패키지는 중국산 장비에 대한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이동통신망에서 고위험 공급업체의 장비 사용을 금지하는 것을 넘어 회원국들이 이를 의무적으로 이행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 해당 회원국은 막대한 재정적 제재를 받게 된다. 유예 기간은 단 3년. 통신사업자들은 고위험 공급업체 목록이 발표된 후 36개월 이내에 해당 업체의 장비를 뜯어내고 대체 장비를 설치해야 한다. 통신사들에게 천문학적인 교체 비용을 강요하는 조치지만 EU는 안보라는 대의명분 아래 이를 밀어붙이고 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규제의 범위다. 이번 조치는 단순히 5G 이동통신 기지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법안은 국가 안보와 직결된 18개 핵심 인프라 분야로 규제 대상을 대폭 확대했다. 여기에는 전력 공급 시스템, 태양광 에너지 인프라, 상수도 관리 시스템, 자율주행 차량 및 커넥티드 카, 클라우드 컴퓨팅, 드론 및 드론 방어 시스템, 보안 스캐너, 의료 기기, 우주 서비스, 반도체 등이 포함된다.
사실상 현대 사회를 움직이는 모든 신경망에서 중국의 흔적을 지우겠다는 의도다.
유럽이 이토록 강경하게 돌아선 배경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남긴 트라우마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 실제로 값싼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의존하다가 에너지 위기를 겪었던 유럽은 특정 국가, 특히 권위주의 국가에 대한 기술적 의존이 언제든 무기화될 수 있음을 뼈저리게 학습했다. 작년 한 해 동안 EU 내에서 발생한 사이버 공격 사건이 급증하고 그 피해액이 수천억 달러에 달한다는 통계는 이러한 위기감을 증폭시켰다. 그리고 유럽은 이제 화웨이 장비를 단순한 통신 도구가 아닌 중국 공산당의 잠재적 정찰 자산이자 사보타주 도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잊혀질 권리를 시작으로 미국 빅테크와 신경전을 벌이며 역내 ICT 영토를 지키려는 유럽의 10년전 전선이 이제는 중국으로도 확장되는 분위기다.
늑대의 반격과 깊어지는 전선, 끝나지 않는 진흙탕 싸움
중국과 화웨이는 즉각적이고 거칠게 반응했다. 당장 중국 외교부는 이를 노골적인 정치적 조작이자 보호주의라고 비난하며 유럽이 제 발등을 찍는 행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자국 기업의 합법적 권익을 수호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유럽산 제품, 특히 독일의 자동차나 프랑스의 명품, 혹은 유럽의 농산물에 대한 보복 관세나 수입 제한 조치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중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유럽 기업들에게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대목이다.
화웨이 역시 물러서지 않고 있다. 성명을 통해 EU의 조치가 객관적인 기술 표준이나 증거가 아닌 출신국을 기준으로 기업을 차별하는 행위라며 이는 EU의 기본법 원칙인 공정성과 비차별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지난 수십 년간 유럽에서 사업을 영위하며 단 한 건의 보안 사고도 일으키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강력한 기초체력에 대한 자신감이 큰 역할을 한다. 실제로 미국의 강력한 제재로 스마트폰 사업이 고사 직전까지 갔던 화웨이는 자체 개발한 7나노 칩을 탑재한 메이트60 프로를 성공적으로 출시하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바 있다. 차이나텔레콤과 협력하여 화웨이의 AI 반도체 어센드(Ascend) 시리즈만을 기반으로 한 거대언어모델(LLM)을 선보이는 등 기술 자립도 가속화하고 있다.
매출은 다시 성장세로 돌아섰고 연구개발(R&D) 투자 규모는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서방의 제재가 화웨이를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독자적인 기술 생태계를 구축하게 만들어 통제 불가능한 괴물로 키우고 있다는 분석을 낳게 한다.
그러나 유럽 시장에서의 퇴출은 화웨이에게 단순한 매출 감소 이상의 타격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유럽은 화웨이에게 있어 중국 본토를 제외한 가장 크고 상징적인 시장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곳에서의 퇴출은 화웨이 기술에 대한 글로벌 신뢰도의 추락을 의미한다.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제3세계 시장에서의 입지마저 흔들 수 있다.
엔비디아의 쿠다(CUDA) 생태계가 장악한 AI 시장에서 화웨이의 독자 노선(CANN)이 얼마나 확장성을 가질지도 미지수다. 결국 고립된 생태계는 결국 갈라파고스가 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하버드 대학에 자금 출처를 숨기고 연구비를 지원했다는 의혹과 한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씨드 포 더 퓨처 프로그램이 보여주는 이중적인 행태는 화웨이에 대한 불신을 더욱 키우고 있다.
독이 든 성배인가, 난세의 동아줄인가... 화웨이 리스크의 재해석
화웨이 장비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백도어(Backdoor)다. 제조사가 사용자 몰래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는 뒷문을 만들어 정보를 빼돌리거나 시스템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우려다. 하지만 냉정하게 짚어볼 사실은 지난 십수 년간 미국과 유럽의 정보기관들이 화웨이 장비를 샅샅이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스모킹 건, 즉 명확한 백도어의 증거를 공개적으로 제시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증거가 없다고 해서 위험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현재의 화웨이 배제 흐름은 기술적 검증보다는 지정학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한국이 주목해야 할 화웨이의 리스크는 보안보다는 벤더 락인(Vendor Lock-in)과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 가능성이다. 화웨이는 최근 한국 시장에 AI 반도체를 공급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하면서 칩 단품 판매가 아닌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결합된 클러스터 형태의 공급을 고집하고 있다. 이는 초기 도입 비용을 낮출 수는 있어도 한번 화웨이 시스템을 도입하면 나중에는 다른 업체로 갈아타기 힘든 종속을 초래할 수 있다.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는 한국 기업이 미국의 제재 대상에 오를 경우 엔비디아나 인텔 등 미국산 핵심 부품을 수급하지 못하게 되어 회사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공포도 실재한다.
다만 리스크의 이면에는 반드시 기회비용이 존재한다. 현재 글로벌 AI 시장은 엔비디아의 독주 체제다. H100, H200 등 고성능 GPU는 부르는 게 값이고 그마저도 없어서 못 구하는 실정이다. 한국의 AI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들은 장비 부족으로 경쟁에서 뒤처질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상황에서 화웨이의 어센드 칩은 엔비디아 대비 압도적으로 저렴한 가격과 즉시 공급 가능한 물량을 무기로 내세운다. 성능이 다소 떨어진다 해도 가성비와 수급 안정성 측면에서는 분명한 대안이 될 수 있다.
게다가 화웨이는 지금 벼랑 끝에 몰려 있다. 유럽마저 등을 돌린 상황에서 화웨이에게 IT 강국 한국은 반드시 잡아야 할 교두보이자 레퍼런스기 때문이다.
분위기도 좋다. 사실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즉 코로나 당시 화웨이는 유럽과 밀착했으나 멀어진 바 있다. 이는 미국의 압박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유럽은 미국과의 대서양 동맹마저도 장담할 수 없다. 그린란드 사태 등 골치아픈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자체적으로 화웨이를 밀어낸다는 것은 새로운 사태의 전기를 시사한다. 그 연장선에서 화웨이가 얻을 타격과, 그런 화웨이와 손을 잡을 경우 확보할 수 있는 한국의 이득은 새로운 계산이 필요하다.
협상 테이블에서 한국이 칼자루를 쥘 수 있음을 의미한다. 화웨이가 한국 시장 진출을 위해 파격적인 가격 할인, 기술 지원, 심지어 소스 코드 공개와 같은 보안 검증 조치까지도 수용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것이다.
화웨이의 절박함을 국익으로 치환하라
세계가 화웨이를 버리는 지금이야말로 역설적으로 한국이 화웨이와 손을 잡고 실리를 챙겨야 할 골든타임이다. 맹목적인 친중 정책을 펴자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계산된 비즈니스 논리로 접근하자는 것이다.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샌드위치 신세가 아니라 양쪽의 패를 모두 쥐고 흔드는 캐스팅 보터가 되어야 한다.
먼저 화웨이 장비를 지렛대로 삼아 국내 통신 및 AI 인프라 구축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 이미 LG유플러스가 화웨이 장비를 도입하여 5G 망을 구축하고도 별다른 보안 사고 없이 운영하고 있는 선례가 있다. 고물가와 경기 침체로 신음하는 한국 경제 상황에서 인프라 투자 비용 절감은 기업과 소비자 모두에게 이득이다. 화웨이의 저가 공세를 이용해 에릭슨, 노키아, 삼성전자 등 경쟁 업체들의 가격 인하를 유도하는 메기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나아가 화웨이와의 협력을 기술 고립이 아닌 기술 흡수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화웨이는 연간 수십조 원을 R&D에 쏟아붓는 기술 기업이다. 특히 5.5G, 6G 등 차세대 통신 기술과 AI 최적화 기술에서는 세계적인 수준을 보유하고 있다. 보안 우려가 덜한 비핵심 분야나 폐쇄형 내부망, 연구용 인프라 등에서 화웨이와 협력하며 그들의 기술 노하우를 습득하고 한국의 파운드리나 메모리 반도체와 연계할 수 있는 고리를 찾아야 한다.
유럽의 화웨이 퇴출로 생긴 빈자리를 한국 기업이 차지하는 반사이익 전략과 별개로 한국 내에서는 화웨이를 협상 카드로 활용하는 유연함도 필요하다. 미국에게는 우리가 화웨이와 협력하지 않는 대가로 더 많은 반도체 보조금과 기술 이전을 요구하고 중국에게는 화웨이 장비 도입의 조건으로 한국 게임 판호 발급 확대나 배터리 시장 개방 등을 요구하는 식의 교차 협상이 가능하다. 화웨이가 절박할수록 한국이 요구할 수 있는 청구서의 액수는 커진다.
감정에 치우친 반중 정서는 국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돈에는 국경도, 사상도 없다. 그리고 유럽이 화웨이를 쫓아내는 것은 그들의 안보적 판단에 따른 것이지만 한국은 한국만의 셈법이 필요하다. 안보 리스크는 철저한 기술적 검증과 격리된 망 분리 정책으로 통제하되 화웨이가 내미는 경제적 이득은 확실하게 챙기는 지혜가 필요하다.
적의 손이라도 나의 이익을 위해 잡을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지금 격변하는 기술 패권 전쟁에서 한국이 살아남고 번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화웨이의 겨울은 한국에게 따뜻한 봄을 가져다줄 땔감이 될 수 있다. 지금은 문을 걸어 잠글 때가 아니라 활짝 열어젖히고 가장 비싼 입장료를 받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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