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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과 이슬로 깊어지는 염색, 장현승 [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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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과 이슬로 깊어지는 염색, 장현승 [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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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승의 염색 작업으로 만들어진 누비옷. 필자 제공

장현승의 염색 작업으로 만들어진 누비옷. 필자 제공




제미란 | 디자이너·아트 워크샵 리더





‘누운 뫼’라 불리다 와산이 되었다는 제주 중산간 마을. 천연염색가 장현승의 공방으로 향하는 길은 눈보라와 칼바람이 매서웠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오르며, 명장을 만나기 위해 치러야 할 통과 의례인가 생각했다. 마을 어귀에는 눈을 인 키 큰 동백나무가 붉은 통꽃을 툭툭 떨구며 수문장처럼 서 있다. 그 너머로 둥근 황토집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강한 인상의 외양과 달리 속내 천진한 사람, 천연 염색가, 장현승의 작업장이다.



겨울 정원으로 들어서니 염색작업에 최적화한 생태계가 펼쳐진다. 숙소를 겸한 작업장이 있는 본채, 천을 널어 말리는 너른 마당, 염료를 끓이는 가마솥과 물로 씻어내는 수세 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안쪽으로는 유목민의 천막을 연상시키는 방사형 서까래가 거대한 작업공간을 떠받치고 있다. 사실 이 집은 20여년 전, 치매를 앓던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지어졌다고. 휠체어가 오갈 수 있도록 문턱을 없앴고, 지붕은 제주 오름의 능선을 닮도록 설계됐다. 둥근 황토벽 한쪽으로 기관차 같은 화목 난로가 열기를 뿜고, 주위로 염색된 천과 옷들이 겹겹이 쌓여, 공간 전체가 야생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감물 염색은 방습·방충 효과가 뛰어나 습기 많은 제주에서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생존의 기술이다. 천에 물든 땡감의 타닌이 햇빛과 이슬을 반복해서 만나며 발색이 깊어지고 무늬도 만들어낸다. 장현승은 감물을 베이스로 그 위에 쪽물이나 양파, 한약재와 토속 재료까지 덧입혀 색을 쌓아 올린다. 붓으로 그리지 않을 뿐, 화가의 페인팅 작업과 다르지 않다. 그의 천은 곶자왈의 수목과 돌, 태풍이 지나간 김녕 바다, 수백년 된 고목의 껍질, 고생대 암반의 다채로운 빛깔을 떠올리게 한다. 제주 풍경을 고스란히 떠내서 데칼코마니처럼 품고 있다.



그가 천연 염색과 연이 닿은 것은 일본에서다. 도예를 배우며 생업을 이어가던 시절, 자연 재료만을 고집하는 염색 스승을 만났다. 묵묵히 그의 가르침을 따르던 어느 날, 스승은 그를 따로 불러 공개하지 않던 기법을 전했다. 평생 염색의 길을 갈 사람이라 알아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본을 떠나 제주로 돌아와야 했다. 치매에 시력까지 잃어가던 노모를 모시기 위해서였다. 고단했지만 행복했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전하는 에피소드 하나. 더듬더듬 그의 얼굴을 만지던 어머니가 “여기 이 호박을 따야겠다” 하시더라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우연히 길 가던 이가 그가 입고 있던 옷의 만듦새를 알아보고 주문을 했다. 그 인연으로 장현승은 본격적인 염색가의 길로 들어섰다.



반복된 노동으로 손마디는 변형되었고, 망막을 다치는 부상을 입고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작업에 나선다. 그가 만든 옷들 또한 경이롭고 대담해서,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는 이에게나 비로소 어울린다. 전적으로 자연이 개입하는 공정이라 동일한 무늬는 존재할 수 없고, 대량 생산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고된 작업을 이어받을 제자도 아직 없다. 그럼에도 “화목 난로 청소하다 얻은 그을음과 목초액으로 염색하면 어떤 빛이 나올까?” 상상하는 그의 눈빛에는 호기심만 가득하다. 장현승의 공방은 오늘도 태양과 이슬, 노동과 예술이 교차하는 자연의 놀이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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