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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남자' 복 받은 앙상블로 살아난 역사...반가운 사극 마스터피스[봤어영]

이데일리 김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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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남자' 복 받은 앙상블로 살아난 역사...반가운 사극 마스터피스[봤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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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준 감독 신작
2월 4일 개봉
[이데일리 스타in 김보영 기자] 짧은 기록에 숨은 역사를 스크린에 아름답게 펼친 이야기꾼 장항준의 기발한 상상력, 유해진·박지훈을 비롯한 대체불가 드림팀 앙상블로 극장을 깨울 웰메이드 사극이 오랜만에 돌아왔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감독 장항준)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1457년 청령포,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촌장과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된 어린 선왕의 이야기다. 한국 영화 최초로 단종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뤘다. ‘리바운드’, ‘더 킬러스’, ‘오픈 더 도어’, ‘기억의 밤’ 등을 연출한 장항준 감독의 신작이다.


비운의 왕 단종의 유배 생활과 촌장 엄흥도에 얽힌 역사적 기록은 많지 않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 뒤 엄흥도란 사람이 곡을 하며 그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지낸 뒤 숨어 살았다는 한 두 줄의 기록 정도가 전부다.

조선의 왕, 실존 인물에 관한 역사가 소재인 만큼 고증에 충실해야 하지만, 기록 자체가 많지 않은 만큼 역사적 사실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많은 부분을 배우들의 존재감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에 기대야 했다.



‘왕과 사는 남자’는 아픈 죽음으로 끝이 나고 만 비운의 역사를 설명이나 대사로 처리하지 않고, 관계성과 개인의 변화, 성장으로 조명한 독특한 접근법이 돋보인다. 유배돼 외롭고 무력한 일상을 이어가던 어린 선왕 이홍위(박지훈 분)의 변화와 성장, 그 변화에 영향을 가장 많이 주고 그의 마지막조차 곁에서 보필한 촌장 엄흥도(유해진 분)의 특별한 우정을 통해서다.


극의 클라이맥스와 마지막 정해진 슬픈 결말을 제외하면, 이 영화에는 특별히 극적인 사건이나 갈등들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외진 산골로 유배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휩싸여 죽음만을 기다렸던 병약한 선왕이 더 이상은 잃지 않기 위해 변화를 택하는 강인한 거목(巨木)으로 각성하게 된 계기와 과정은 이 영화 속에서 그렇게 과하거나 특별하지 않다. 식음을 전폐하던 그가 유배지의 보수 주인 엄흥도와 유배지 마을 사람, 궁녀 매화(전미도 분)와 함께하며 조금씩 밥술을 뜨고,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까막눈인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의 이름을 쓸 수 있게 글을 가르치다 마침내 역사를 바로잡고자 화살을 들게 된 것은 작은 일상의 반복, 작지만 어제보다 한 발 나아간 순간의 선택들이 쌓인 결과로 비춰진다. 둘러싼 상황의 냉혹함, 모든 관계가 단절된 고립감으로 시름시름 앓던 이홍위가 사실은 왕으로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깊이 간직한 사람이었음을, 어린 시절 왕위에 올라 왕관의 무게를 견딜 만큼 강인한 사람이었음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작은 변화들로 서서히 드러난다. 그 모든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엄흥도란 인물을 매개로 해서다. 정치가 상당 부분 개입됐던 기존의 사극 영화들과 다르게 일상물적인 매력도 돋보인다. 후반부를 제외하면 특별히 극적인 사건들이 없는 만큼 시선이 자연스레 인물들에 쏠린다.


서사 자체보다는 배우들의 역량과 캐릭터의 매력이 훨씬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작품이며, ‘왕과 사는 남자’는 캐스팅의 미덕과 앙상블 기대감을 제대로 충족했다.


과장된 신파, 웅장한 비장미를 최대한 덜고 인물이 처한 상황 자체에 집중한 담담한 톤과 완급 조절이 인물의 매력과 시간이 흘러도 볼 수 있는 세련미를 살린다.

유해진과 박지훈, 한명회 역 유지태의 존재감과 캐스팅이 이 영화의 든든한 중심축을 형성해 빈 틈 없는 몰입을 선사한다. 박지훈의 깊은 눈빛 연기와 성장이 이번 영화에서 제대로 빛을 발했다. ‘약한영웅’이 박지훈에게 배우로서 잠재력을 증명케 한 작품이라면, ‘왕과 사는 남자’로 박지훈은 ‘배우 박지훈’으로서 존재감을 확실히 굳혔다. 눈빛과 표정으로 서서히 생기를 찾으며 각성으로 나아가는 단종의 성장 과정을 섬세히 그려냈다. ‘왕의 남자’, ‘올빼미’ 등 사극 장르에서 수차례 진가를 발휘한 유해진은 제대로 물 만나 또 한 번 인생 캐릭터를 경신했다. 두 배우의 앙상블이 티격태격과 애틋함을 오가며 친우 같기도, 부자(父子) 같기도 한 두 인물의 특별한 관계성을 밀도 있게 완성했다. 간신으로 역사에 남아 주로 야비하고 기회주의적인 이미지로 소비됐던 한명회란 실존 인물을 냉철하고 무자비하면서 힘 있는 당대의 절대 권력자로서 새롭게 내세운 유지태의 위압감과 카리스마가 두 인물의 비극적인 관계와 서사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초중반부의 가볍고 담담한 톤, 극적이지 않은 일상 분위기를 지루하지 않게 풍성히 채운 유해진, 장항준표 위트와 코미디가 적재 적소에서 빛났다. 전미도와 김민 등 조연들과 이준혁, 박지환, 안재홍, 정진운 등 주연급 특별출연 배우들의 존재감과 활약도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다. 분명히 조용하고 담담한데 마지막 순간 묵직한 울컥함이 여운을 주는 힘 있는 사극이다.

오는 2월 4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