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만세운동은 처음 이주현·박진택·배만두·이상은·김상옥에 의해 (1919년) 3월 17일 단행하기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비밀이 누설되고 배만두가 붙잡히면서 운동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독립기념관 한국사연구소의 ‘배만두’에 관한 공식 기록은 이게 다다. 국가보훈처에서도 배만두는 ‘열거 인물 중 한 명’으로만 나온다.
경남 고성 이외 지역에선 무명에 가까운 이 독립운동가의 생애는 파란만장하다. 10대 초반 고성교회(1908년 설립)를 다녔고, 10대 중반 고종, 순종을 경호했고, 10대 후반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의 생애엔 신흥무관학교, 건국준비위원회, 한국독립당 같은 단체가 나온다. 3·1만세운동에서 자유시참변, 제헌의회 선거 같은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에도 관련됐다. 김구, 김원봉, 이범석, 지청천(이청천)도 배만두의 삶에 직접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여러 기록을 모아 정리한 ‘로정 배만두 선생과 항일 독립운동’(하기호, 경남향토사총서 제20집, 2010) 등을 참고했다. 큰손자인 배원열을 인터뷰해 보완했다.
경남 고성 이외 지역에선 무명에 가까운 이 독립운동가의 생애는 파란만장하다. 10대 초반 고성교회(1908년 설립)를 다녔고, 10대 중반 고종, 순종을 경호했고, 10대 후반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의 생애엔 신흥무관학교, 건국준비위원회, 한국독립당 같은 단체가 나온다. 3·1만세운동에서 자유시참변, 제헌의회 선거 같은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에도 관련됐다. 김구, 김원봉, 이범석, 지청천(이청천)도 배만두의 삶에 직접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여러 기록을 모아 정리한 ‘로정 배만두 선생과 항일 독립운동’(하기호, 경남향토사총서 제20집, 2010) 등을 참고했다. 큰손자인 배원열을 인터뷰해 보완했다.
배만두가 조선보병대((창덕궁수비대) 시절 촬영한 사진. 후손 배원열 제공 |
배만두는 1896년 고성 하이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한학을 배웠다. 1908년 설립된 고성 교회에도 다녔다. “큰 세상을 보러 가겠다”며 1914년쯤 서울로 가 YMCA 야학에서 공부했다. 학업을 마친 후 들어간 곳이 조선보병대(창덕궁수비대)다. 순종 호위 업무를 맡았다. 배원열은 “할아버지는 거기서 3년을 보냈다. (축소, 해산 과정에서 대원들이) 일제 헌병대나 경찰, 교도관 등으로 재취업했다. 출세하고 싶은 사람은 헌병대로 갔다. 할아버지는 ‘아이고, 나는 안 하련다’ 하고 고향으로 내려오셨다고 한다”고 말했다.
1919년 배만두는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과 전국 각지의 3·1만세운동 소식을 듣게 된다. 3월 15일 고성읍 덕선리 선동마을의 철성의숙 교장 박진완 집에서 이상은, 김상욱, 이주현 등과 함께 독립만세 의거를 계획한다. 동원 책임을 맡은 배만두는 학생들을 만나러 다녔다.
3월17일 제1차 거사일 새벽 일본 헌병이 배만두 집을 덮쳐 체포했다. 그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제2차, 제3차 의거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남은 이들이 3월 22일, 4월 1일 각각 의거를 일으켰다.
배만두는 조선인 일본 헌병대원 도움으로 경찰서에서 탈출한다. “탈출을 도와주고, 돈까지 쥐여준 사람이 박정희 정권 때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지낸 김학열의 부친입니다. 할아버지와 조선보병대에 같이 들어갔다가 일본 헌병에 지원한 인물입니다.” 훗날 김학렬은 박정희 정권 때 야당에서 친일파 아들이라고 문제 삼을 때 고성을 찾아와 탈출 도움을 증언해달라고도 요청했다. “할아버지가 친필로 ‘김학렬 아버지가 불이익을 감수하고도 나를 감옥에서 도망가게 해줬다’는 내용의 글을 적어줬답니다.”
탈출 뒤 배만두는 외가가 있는 경남 의령을 거쳐 만주로 갔다. 이범석(1900~1972)이 조교로 있던 운남육군강무학교로 가 군사 교육을 받았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한다. 당시 교장이 이시영(1868~1953)이었다. 배원열은 “조선보병대 여러 선후배와 이곳에서 만났다”고 했다. 조선보병대 군사 교육 경험자인 그는 이곳에서 신병들을 가르쳤다. 1921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대한독립군 이청천 부대 대원으로 활동했다. 경상북도경찰부에서 작성한 <고등경찰요사>(1934) 등에 신흥무관학교 입교, 만주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 사실이 적혀 있다.
노년의 배만두. 후손 배원열 제공 |
독립군 밀명을 받고 1930년 함경도 흥남으로 갔다. 이곳에서 목수와 노동자로 일하며 군자금모집과 독립군 초모(招募) 공작 등 활동을 이어갔다. 흥남 서호진 작두섬 쪽에 큰 어장을 가진 한경진의 장녀 한보배(1904~1991)와 재혼한다. 당시 고성 집안에서는 배만두가 독립운동을 하다 사망한 줄 알았다. 첫 부인은 남편이 죽은 줄로 여기고 딸을 데리고 나가 재혼했다. 그 소식을 건너들은 배만두도 재혼하게 된다. 큰아들 배영이 1931년 흥남에서 태어난다.
배만두는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고 서울로 들어간다. 고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사업가 정세권이 경영하던 건양사에 입사했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부동산 개발 회사인 건양사는 북촌 한옥 마을 사업 등을 맡았다. 배만두는 흥남질소비료공장의 작업동 건설공사, 소록도 한센병 병원 건축공사 현장에서 파견 근무를 했다.
의거 공소시효가 지난 1930년대 후반 다시 고성으로 돌아가 ‘백일공무사(白日工務社)’라는 이름의 건설회사를 만든다. ‘백의민족이 일본을 지배한다’는 뜻으로 지은 것인데, 일본 당국은 그 속뜻을 몰랐다고 한다. 배원열은 “조선인이 살 집과 조선어학회 건물을 지어준 정세권 사장이 조선총독부에 찍힌 뒤 회사가 어려워지자 할아버지에게 남은 재산 일부를 떼어주며 고성에 가서 건설회사를 하라고 했다고 한다. 아마 점조직을 만들라고 한 듯하다”고 말했다.
배만두는 건설회사로 번 돈을 몰래 빼 독립군 자금으로 보냈다고 한다. 돈을 많이 벌었는데, 재산이 늘지 않아 의심을 받기도 했다. 배원열은 “경쟁 건설업체에서 ‘돈을 그리 벌었는데 왜 없냐’고 의심들을 하니까 할아버지가 아차 하고는 재산이 있는 척하느라 다 쓰러져가는 농장도 사고 그랬다고 들었다”고 했다.
군자금을 두고 배만두 집안에는 ‘김 선생’에 관한 이야기가 내려온다. 김 선생은 1940년대 두 번 배만두 집을 찾았다. “어스름 불빛에 왔대요. 두 분이 소뿔로 만든 반지를 맞춰봤어요. 김 선생은 빨간 태극 문양, 할아버지는 거는 파란 태극 문양이죠. 그 김 선생이란 분이 김원봉(1898~1958)입니다. 회사를 담보로 거액을 줬다고 해요. 정세권이 김원봉을 할아버지한테 보냈을 거라고 하더군요.” 배원열은 “6·25 때 고성이 인민군에 함락됐을 때 김원봉이 할아버지를 북한에 데려가려고 찾은 적도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배만두는 공소시효 소멸에도 요시찰 인물이었다. “일본 헌병들이 1년에 한두 차례 구둣발 신고 집에 들어와 장롱 등을 뒤집고 가는 일을 봤다”는 아버지 배영의 목격담을 전했다. 헌병들은 해방 뒤 배만두 집을 다시 찾았다. 배만두는 중국어는 능통했지만, 일본어는 서툴렀다고 한다. 아들 배영이 중간에서 통역했다. “아버지 말로는 태극기를 펴두고 할아버지와 헌병들이 술을 마셨다고 해요. 헌병들은 할아버지한테 ‘(감시, 사찰해) 미안하다. 조선이 부강한 나라가 되길 빈다’고 사과했어요. 도쿄가 쑥대밭이 되었다는 말도 하고요. 할아버지는 ‘일본은 다른 나라 침략하지 말고, 잘 사는 나라가 되길 바란다’고 했고요.”
헌병들은 고성 등지에서 철수할 일본인들의 안전을 요청하려 이날 배만두를 찾았다. 일본인들에게 돌멩이 하나 던지는 한국인이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헌병이 찾아온, 1945년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합디다.” 배영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일본인 아이들이 일본 패망에도 고성 땅을 떠나기 싫어하는 것을 보고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고 나중에 배원열에게 전했다.
배영도 고초를 겪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명문인 진주공립농업학교로 진학하려 했다. 담임 선생은 추천서를 써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불령선인(不逞鮮人)이었기 때문이다. 배영은 대신 고성 농중에 진학한다. 이후 목사가 되길 바란 배만두 뜻에 따라 연희대학(연세대 전신) 신학과에 들어갔다가 자퇴했다.
해방 뒤에는 여러 동지와 재회한다. 고성을 찾은 김구, 이범석과 각각 만난 기록이 남아 있다. 이청천으로부터 이범석이 조직한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에서 일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사양했다. 고성에서 건국준비위원회 고성군부위원장, 한국독립당 고성군당위원장으로 일했다.
1948년 제헌의회 선거 때 출마 제안도 뿌리쳤다고 한다. 불출마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선거 참여를 거부한 김구의 한국독립당 방침이었다. 당시 50대였던 배만두는 본인이 나설 나이가 아니라고도 여겼다. 대신 후배 하나를 소개했는데, 그 후배가 한국전쟁 때 납북된 뒤 북한 재북평화통일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했다가 1958년 12월 숙청된 이구수(1913~1967)다.
배만두는 해방 뒤에도 여러 활동을 직접 널리 알리지는 않은 듯하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하에서 건준 활동, 김원봉과 이구수와의 관계 등을 밝히기 힘들었을 것이다.
배만두가 1973년 3·1절 경남 고성 대성초등학교에서 기념 축사를 하고 있다. 후손 배원열 제공 |
1979년 3월 1일 오후 5시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1운동 60주년 날이다. “오직 묵묵히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내용의 유언을 남겼다. “독립유공자 되려고 독립운동한 게 아니다. 신청하지 말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장손인 배원열은 할아버지의 생애를 두고 “비분강개의 마음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게 존경스럽다. ‘멋지게 한세상 살다 가셨네’ 하는 생각도 든다. 막 결혼해서 갓 난 딸도 둔 상황이라면, 나는 그렇게 못했을 것 같다”고 했다.
배원열은 만주 등지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수백, 수천의 무명 독립운동가들도 떠올렸다. “할머니가 된 지청천 장군 따님(지복영)이 어린 시절 자기와 놀아주던 아버지 부하들 이야기하는 걸 텔레비전에서 오래전 봤어요. 그중 한 명이 할아버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할아버지는 행장의 일부라도 남았는데, 수백 명 부하들 또 남모르게 다른 곳에서 목숨 걸고 활동한 많은 운동가는 이름도 남지 않았다. 그분들 희생이 전해지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생사고투]는 세상에 덜 알려진 채로 또는 무명으로 묻힌 이들의 삶과 죽음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과거나 동시대 게시일 즈음 출생하거나 사망한 이들이 생전 겪은 고투를 전합니다. 지금 죽음에 맞서 싸우는 생존자들 이야기도 들려 드립니다.
☞ 온몸, 온힘으로 올무 쫓던 그는 “사람이라서 미안”했다[생사고투]⑨양시종
https://www.khan.co.kr/article/202511101649001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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