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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뉴욕의 겨울, 그 노란 온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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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뉴욕의 겨울, 그 노란 온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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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생성형 AI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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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1월은 유독 시리다. 허드슨강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이 마천루 사이를 휘감고 돌며 만들어내는 이른바 ‘빌딩풍’은 행인들의 두꺼운 코트 깃을 사정없이 파고든다. 세계 경제의 심장부이자 가장 화려한 조명이 꺼지지 않는 도시지만, 그 이면의 겨울은 이토록 혹독하고 건조하다. 그런데 2026년 1월, 이 차가운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낯설지만 묘하게 정겨운 풍경 하나가 포착됐다.

점심시간이 시작된 맨해튼 미드타운. 32번가 코리아타운 인근을 지나는, 소위 ‘잘나가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어딘가 달라졌다. 말끔한 정장에 롱코트를 걸친 그들의 손에 으레 들려 있어야 할 유명 프랜차이즈의 로고 박힌 커피 컵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손을 채운 건 투박하기 짝이 없는 종이봉투 혹은 은박지 뭉치다. 그 틈새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과 코끝을 스치는 달큰한 향기, 다름 아닌 군고구마였다.

미국 유력 매체 뉴욕포스트가 최근 대서특필한 이 ‘군고구마 현상’은 표면적으로는 숫자가 지배하는 팍팍한 경제 현실을 반영했다. 팬데믹 이후 천정부지로 치솟은 뉴욕의 물가가 직장인들의 점심 풍경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이다.

맨해튼에서 햄버거 세트 하나를 먹으려면 15달러(약 2만원)를 내야 하고, 건강을 생각해서 샐러드 볼 하나를 집어 들면 20달러(약 3만원)가 훌쩍 넘는다. 여기에 팁과 세금까지 더하면, 매일 점심값으로만 4만~5만원을 지출해야 하는 셈이다.

이 살인적인 ‘런치플레이션(Lunchflation)’의 파고 앞에서, 개당 3~5달러(약 4500~7500원) 남짓한 군고구마는 뉴요커들에게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도피처가 되었다. 3분의 1 가격으로 배를 채울 수 있다는 경제적 유인(誘因)은 그 어떤 마케팅보다 강력했다.

하지만 이 현상을 단순히 주머니 사정이 궁해진 도시 노동자들의 ‘궁여지책’이나 ‘가난한 자의 빵’으로만 독해한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문화적 변동의 본질을 절반도 보지 못하는 셈이다. 뉴욕 한복판에서, 그것도 가장 트렌디한 거리에서 군고구마가 팔린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건, 왜 하필 이 투박한 구황작물이 2026년 뉴욕의 겨울을 위로하는 아이콘이 됐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서구의 미식 문법에서 고구마, 특히 껍질째 구운 고구마는 오랫동안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 껍질을 벗기지 않은 채 불에 그을린 검은 외관은 그들에게 낯선 비주얼이었다. 뉴욕포스트조차 이번 보도에서 “자칫 구소련 시절의 배급 식량처럼 보일 수 있다”고 평했을 정도다.

화려한 가니쉬도, 식욕을 자극하는 붉은 소스도 없는 이 검은 덩어리는 확실히 뉴욕의 세련된 화법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 ‘못생긴 껍질’을 벗기는 순간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최근 틱톡(TikTok)을 비롯한 숏폼 플랫폼에서 수천만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는 ‘K-고구마’ 영상들은 이 반전을 정확히 타격한다. 조지아주의 인플루언서 코트니 쿡이 고구마 사이에 치즈스틱을 넣어 먹는 영상이 1000만 뷰를 넘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Z세대에게 군고구마의 노란 속살은 ‘자연이 빚은 마시멜로’이자 ‘죄책감 없는 달콤함(Guilty Free)’으로 재정의되고 있다.


가공된 설탕이나 시럽이 줄 수 없는 묵직하고 원초적인 단맛, 그러면서도 베타카로틴과 비타민 C, 칼륨이 풍부한 ‘슈퍼푸드’라는 서사는, 몸과 지갑을 동시에 챙겨야 하는 현대인의 이중적인 강박과 욕망을 절묘하게 파고들었다. 1달러짜리 피자가 주는 건강에 대한 죄책감 대신, 고구마는 “나는 내 몸을 아끼고 있다”는 심리적 만족감까지 덤으로 얹어주는 것이다.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군고구마는 미각(味覺) 그 너머에 있는 ‘촉각(觸覺)의 위로’다. 한국인에게 겨울철 군고구마는 단순한 허기 채우기 수단이 아니다. 퇴근길 아버지의 코트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그 온기, 친구와 호호 불어가며 나눠 먹던 추억이 스민 정서적 매개체다. 품속에 넣으면 성능 좋은 핫팩이 되고, 두 손으로 감싸 쥐면 언 손을 녹여주는 난로가 되는 이 다기능성은 차가운 샌드위치나 샐러드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이리라.

뉴욕포스트 기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 역시 “1월 추위 속에서 핫팩처럼 얼어붙은 손을 따뜻하게 해주는 장점”을 꼽은 부분이었다. 뉴욕의 겨울은 춥고, 도시의 삶은 고단하다. 차가운 샐러드는 위장을 채울지언정 마음의 한기까지 달래주지는 못한다. 반면 갓 구워낸 군고구마는 물리적인 따뜻함을 넘어 정서적인 온기를 전달한다. 호호 불어가며 껍질을 까고, 손끝이 까맣게 그을리는 것도 잊은 채 ​​​​​​​뜨거운 속살을 베어 무는 그 일련의 과정. 그 순간만큼은 치열한 경쟁도, 살인적인 물가도, 직장 상사의 압박도 잠시 잊힌다. 가장 차가운 도시의 최전선에서, 가장 원시적인 불의 온기가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K-컬처가 도달한 새로운 지점이기도 하다. 그동안의 한류가 K-팝을 듣고 K-드라마를 보는 시청각 중심의 ‘감상하는 문화’였다면, 이제 세계는 한국인이 추위를 견디고 계절을 나는 ‘생활의 감각’ 자체를 공유하고 소비하기 시작했다. 파이브가이즈의 감자튀김 대신 한인 마트(H마트)의 군고구마를 선택하고, 라디오시티 뮤직홀 근처 노점에서 김을 내뿜으며 고구마를 먹는 행위는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선 삶의 방식(Lifestyle)으로의 확장을 의미한다. 한국의 겨울철 생존 지혜가 뉴요커들의 겨울 나기 방식으로 번역되어 이식된 셈이다.

어릴 적, 퇴근한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던 누런 종이봉투. 그 안에 담긴 투박한 고구마 몇 덩이가 온 가족의 겨울밤을 따뜻하게 데워주던 기억이 있다. 그 구수한 냄새가 2026년 뉴욕 5번가에서 재현되는 풍경은 묘한 기시감과 함께 뭉클함을 안긴다. 시대가 변하고 장소가 달라져도, 고단한 하루를 버티게 하는 위로의 온도는 매한가지인 듯하다.

화려한 미사여구나 비싼 코스 요리가 아니더라도 좋다. 때로는 거친 껍질 속에 숨겨진 뜨거운 진심 하나가 더 절실할 때가 있다. 꽁꽁 얼어붙은 세상, 우리에겐 서로의 빈속을 덥혀줄 따뜻한 군고구마 같은 온기 하나면 충분하지 않을까. 맨해튼 빌딩 숲 사이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을 보며, 문득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한 겨울을 꿈꿔본다.

아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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