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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의 넥스트 거버넌스] 〈11〉대한민국의 사각지대, 시스템 정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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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의 넥스트 거버넌스] 〈11〉대한민국의 사각지대, 시스템 정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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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대한민국 사회에서 예측 가능성이 가장 낮은 분야를 꼽으라면 단연 정치권의 인사다.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은 명확한 '진입의 규칙'을 갖고 있다. 대학 진학이나 기업 취업, 공무원 임용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역량을 갖춰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비교적 분명하다. 평가 기준이 공개되고 과정이 투명하기에 도전자들은 자신의 실력을 지표 삼아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하지만 유독 정치를 지망하는 인재들에게 부여되는 지침만은 칠흑 같은 '깜깜이'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역량은 국가 경영의 비전이나 전문성이 아니다. 대신 '누구 라인인가'라는 전근대적인 물음이 앞길을 막아선다. 공천 기준이 안개 속에 갇혀 있을 때, 그 어둠을 밝히는 유일한 도구는 '계파'라는 이름의 사적 연대뿐이다.

이 폐쇄적인 인적 네트워크는 선거라는 일시적 이벤트를 넘어 집권 이후 대통령실과 정부 구성에까지 거대한 고리로 이어진다. 국가의 명운을 결정할 인사 시스템이 공적 검증이 아닌 사적 충성심의 연쇄 고리로 작동하는 순간, 조직의 경쟁력은 고갈되기 시작한다. 적재적소(適材適所)가 아닌 적아(適我) 위주의 편향된 배치는 정부의 정책 실행력을 감소시키고 국가의 미래 경쟁력을 희미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결과로 귀결된다. 전문성이 결여된 '논공행상형' 인사는 공공 서비스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고통으로 돌아온다. 인재의 선순환이 막힌 조직에 혁신이 있을 리 만무하다.

정치권이 '그들만의 리그'에 매몰돼 있을 때, 민간 기업은 생존을 위해 인사 시스템의 대변혁을 완수해왔다. 과거 한국 기업들 역시 연고주의와 가신 정치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마주한 글로벌 무한 경쟁의 파고는 '인사가 곧 생존'이라는 서늘한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기업들은 'S급 인재' 영입을 위해 CEO가 직접 비행기를 타고 글로벌 인재를 찾아 나서는 것은 물론, 정교한 역량 평가 모델(Competency Model)을 구축해 주관적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물론 기업 인사 역시 완벽하지는 않다. 그러나 잘못된 인사는 곧바로 성과와 비용으로 드러나며, 그 실패는 다시 시스템 개선을 압박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러한 투명한 메커니즘은 단순한 보상 체계를 넘어 조직 전체에 혁신의 DNA를 심었고,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기업들을 글로벌 1류로 끌어올린 실질적인 근육이 되었다. 30년 전 “정치는 4류”라는 이건희 회장의 일갈은 정치 비하가 아니라 시스템 부재에 대한 경고이자 전환을 촉구하는 메시지였을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 정치를 뒤흔드는 '돈공천' 의혹과 계파 갈등의 구태를 끊어낼 유일한 길은 민간 수준의 '예측 가능한 인사 시스템'을 정치권에 이식하는 것이다. 정치를 기업처럼 운영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다만 공적 권한을 다루는 영역일수록 최소한의 공정성과 예측 가능성은 제도적으로 보장돼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적 배경이 없는 실력자들이 오직 자신의 역량과 국가적 비전만으로 헌신할 수 있도록 공천의 문턱을 낮추고 과정의 공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평가 기준의 공개, 외부 검증 절차의 도입, 결과에 대한 책임성 확보와 같은 최소한의 시스템만으로도 정치는 지금보다 훨씬 건강해질 수 있다.


인사가 만사(萬事)라면 시스템 없는 인사는 망사(亡事)다. 이제는 계파라는 낡은 횃불을 끄고 시스템이라는 현대적인 전등을 켜야 한다. 정치가 투명한 시스템을 갖출 때 비로소 우리는 유능한 정부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인재가 권력 앞에 줄을 서는 정치가 아니라, 정치가 인재를 제 발로 찾아오게 만드는 시스템. 그것이 정치 개혁의 시작이다. 그 변화의 종착지에 선진 대한민국의 도약이 기다린다.

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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