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투자은행 J.P. 모건이 12일~15일(현지 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한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 현장. /JP모건 |
미·중 갈등 속에서도 세계 주요 제약사들이 차세대 신약 후보 물질을 중국 바이오 기업에서 사들였다.
지난 12~16일(현지 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제약·바이오 투자 행사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JPMHC 2026, 이하 JPM)’ 기간 중국 기업들의 기술 수출 소식이 잇달아 나왔다.
다만, 현장에서는 세계 경기 둔화와 미·중 갈등 여파가 체감됐다. 행사에 참여한 국내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비자 발급 문제로 현장에 오지 못한 중국 파트너들이 제법 있다”며 “미중 갈등 여파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예년에 비해 세계 각국의 중견 제약사나 스타트업의 참가 규모가 줄었는데, 경기 영향도 있다”고 했다.
미국·유럽 내부에서만 혁신을 찾기 어려워진 빅파마(대형 제약사)들이 아시아권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미중 갈등 부담에도 실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지정학적 갈등 영향도 일부 읽히지만 빅파마들은 산업적 가치와 기술이라는 실리를 우선으로 삼고 있다”며 “중국 바이오 기업들이 여러 신약 후보 물질을 빠른 속도로 발굴하고 임상 연구를 진행해 시장에 올리는 전략으로 글로벌 파트너십 기회를 키워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시장에서 한국 기술에 대한 관심도 매우 높아졌다”면서 “한국 기업에도 분명히 기회가 열리고 있다”고 말했다.
◇ 연초부터 중국 바이오 기술 수출 잇달아
우선 미국 제약사 애브비(Abbvie)가 지난 12일(현지 시각) 중국 바이오기업 레미젠(RemeGen)과 이중항체 항암제 후보물질 RC148에 대한 기술 이전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계약 규모가 최대 56억달러(약 8조2000억원)에 달한다.
RC148은 PD-1과 혈관내피성장인자(VEGF)를 동시에 표적으로 삼는 차세대 항암제 후보물질이다. 이번 계약에 따라 애브비는 중화권 지역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 RC148을 개발, 제조, 상업화할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확보했다.
스위스 제약기업 노바티스(Novartis)는 이번 행사 기간에만 중국 기업과 두 건의 기술 도입 계약을 맺었다. 노바티스는 먼저 12일(현지 시각) 신경퇴행성 질환 치료제를 연구·개발 중인 중국계 바이오벤처 사이뉴로파마슈티컬스(Sineuro Pharmaceuticals)의 알츠하이머 치료제를 뇌로 전달하는 항체 기술을 최대 17억 달러(약 2조5000억원)에 도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어 13일에는 중국 존센펩립바이오텍(Zonsen PepLib Biotech)로부터 방사성 리간드 치료제(RLT)의 도입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RLT는 특정 암세포 표면 단백질을 인식하는 리간드에 방사성 동위원소를 결합시켜 체내로 전달하는 정밀 표적 항암 요법이다.
노바티스는 이번 계약에 따라 존센펩립의 펩타이드 기반 신약 후보 물질에 대한 글로벌 독점 라이선스를 획득했다. 제품 개발과 상업화까지 모두 노바티스가 담당한다. 존센펩립은 선급금 5000만달러 (약 740억원)을 받는다. 개발과 규제, 판매에 따른 마일스톤과 사용료도 받을 예정인데, 총액은 공개하지 않았다.
글로벌 제약사와 중국 바이오 기업 간 라이센스 계약 비중. /스티펠(Stifel) 보고서 |
업계에선 중국 기업들의 기술 수출 약진이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 혁신의 결과라고 평가하고 있다. 방대한 임상 데이터, 빠른 의사결정 구조, 임상 초기 단계부터 글로벌 기술 수출을 염두에 둔 중국의 전략에 따른 성과라는 분석이다.
골드만삭스 리서치가 지난달 낸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상반기 기준, 환자 대상 임상 개발에 새로 진입한 신약 후보 물질의 약 46%가 중국 바이오 기업에서 나왔다.
이관순 한국제약바이오협회 미래비전위원장(GI파트너스 대표)은 “중국은 2010년대까지만 해도 신약 개발 수준이 우리보다 낮았지만, 정부가 제약·바이오를 핵심 전략 산업으로 지정하고 집중적으로 육성한 결과 기술 수출 규모가 한국의 10배 이상으로 커졌다”고 말했다.
◇ “한국 바이오, 임상 경쟁력 강화해야”
반면 이번 행사 기간 국내 기업의 기술 수출 소식은 나오지 않았다. 알테오젠이 정맥주사(IV) 제형을 피하주사(SC)로 전환하는 기술 ‘ALT-B4′의 글로벌 기술 수출 계약을 위해 상대 기업과 막바지 조율 중이라는 소식을 전했는데,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
증권 시장도 출렁였다. JPM 기간인 12~16일 코스피 제약 지수는 0.3% 상승하며 코스피 지수 대비 5.2%포인트 밑돌았고, 코스닥 제약 지수는 2.9% 하락하며 코스닥 지수 대비 3.6%포인트 하회했다.
이선경 SK증권 연구원은 “JPM 기간 대규모 M&A 기대감이 있었음에도 국내 기업의 빅딜 소식 부재로 제약·바이오 섹터 전반에 실망감이 반영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JPM 기간 기대했던 빅딜 부재는 다소 아쉬운 상황이나, 최근 제약사들이 중요한 딜(거래) 발표를 JPM 기간에 맞춰서 일정을 조율하지는 않는 데다 업계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지리적으로 접근이 편한 콘퍼런스를 활용하는 경향도 있어, 실망하기는 이르다”는 의견을 냈다.
전문가들은 한국 바이오 기업이 대형 기술 수출을 이루기 위해서는 임상 전략 강화가 필수라고 입을 모은다.
이상훈 에이비엘바이오 대표는 “국내 기업 가운데 임상 2상 이상에 진입한 파이프라인(신약 후보군)이 극히 적은 게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며 “대규모 기술 수출을 위해서는 후기 임상 단계까지 끌고 갈 수 있는 전략과 자금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JPM 현장에서 빅파마들과 만나보니 아시아에 대한 관심은 분명히 커졌고, 중국 다음은 한국에 기회가 있다는 확신도 생겼다”며 “플랫폼(약물 전달) 기술을 보유한 한국 바이오 기업들이 임상 2상 단계의 자산을 더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허지윤 기자(jjyy@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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