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여 년간 AI는 신약 연구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점차 이동해 왔다. AI가 단백질 구조를 이해하고 분자를 설계하며 실험 대상을 좁히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히 입증됐다. 하지만 이를 산업 규모로 확장할 슈퍼컴퓨팅 환경과 통합 데이터 생태계는 부족했다.
엔비디아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아우르는 인프라를 쥐고 있다. 릴리와의 공동 연구소는 개별 프로젝트를 넘어 산업 전반의 기준선을 끌어올리려는 시도다. 초기 발굴부터 최적화, 시뮬레이션까지 대규모 연산이 기본 전제가 되는 연구 방식이 보편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국내 제약·바이오산업은 여전히 전환기의 성격이 짙다. 다수 기업이 AI를 도입해 후보물질 발굴이나 가상 스크리닝 단계에서 활용하는 사례는 늘었지만 이후 단계로의 확장은 아직 제한적이다. 글로벌 빅파마와 견줄 만한 장기 임상 데이터나 표준화된 전임상 데이터 풀을 보유한 기업이 드물어 규모와 질 모두 격차가 존재한다.
이런 여건을 고려하면 국내 제약·바이오산업은 추격전을 벌이기보다 자신이 설 수 있는 자리를 새로 찾는 전략이 현실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엔비디아와 릴리가 구축하려는 대규모 AI 생태계 안에서 K바이오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을 전략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그 핵심에는 데이터 전략의 재설계가 있다. 글로벌 빅파마와 같은 규모의 글로벌 임상 데이터를 갖추기 어렵다면 선택적으로 키우는 것이 합리적이다. 아시아인 유전체, 특정 희귀질환, 정밀의료 데이터 등이 후보로 거론된다. 이런 데이터가 표준화돼 축적되면 K바이오가 공동 연구 파트너로 참여할 가능성도 커진다.
초기 후보 발굴과 대규모 시뮬레이션은 엔비디아식 인프라와 빅파마가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 K바이오는 AI로 설계된 후보를 빠르게 시험하고, 규제 기준에 맞게 다듬어 산업화 단계로 연결하는 역량을 체계화하면 글로벌 신약 개발의 거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조직 구조는 데이터 과학자, 계산화학자, 생물정보학자, 임상 데이터 전문가가 연구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이동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실험 중심 문화에 계산 기반 사고를 결합하는 연구 문화의 전환이다.
제도 환경의 변화도 필수적이다. 의료 데이터 활용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적이면 국내 기업이 의미 있는 데이터를 플랫폼에 올리기 어렵고, 핵심 연구는 해외로 이동할 가능성이 커진다. 산업계와 정부가 동시에 풀어야 할 과제다.
결국 격차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해야 한다. 엔비디아가 불러온 변화 속에서 K바이오가 설 자리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개별 기업의 전략은 물론 데이터 표준화와 활용을 뒷받침하는 제도 환경, 연구 인력 구조의 전환, 산업 전반의 역할 분담이 맞물려야 한다. 이런 조건이 갖춰질 때 K바이오는 글로벌 AI 신약 생태계 안에서 주변부가 아닌 참여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이투데이/유혜은 기자 (euna@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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